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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302618
한자 五峰書院
영어음역 Obong Confucian Academy
이칭/별칭 집성사/구산사원
분야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건물
지역 강원도 강릉시 성산면 오봉리지도보기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임호민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서원
건립시기/일시 1556년(명종 11)연표보기
관련인물 공자|주자|송시열|함헌
정면칸수 집성사 3칸
측면칸수 집성사 2칸
소재지 주소 강원도 강릉시 성산면 오봉서원길 32[오봉리 58-6번지]
소유자 강릉유도회(江陵儒道會)
문화재 지정번호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45호
문화재 지정일 1973년 7월 31일연표보기

[정의]

공자(孔子), 주자(朱子), 송시열(宋時烈)함헌(咸軒)을 제향하는 서원.

[개설]

1777년(정조 1)에 어촌 심언광의 후손인 심상현(沈尙顯)어촌이 중국에서 가져왔다는 주자의 영정을 계기로 하남영당을 중건하고 서원을 창건하려 하였다. 그러나 사인(士人) 김형진(金衡鎭)은 그 영정(影幀)이 진상(眞像)이 아니라고 하면서 명륜당에서 재회(齋會)를 열어 반대한 후 권학준(權漢準), 김미(金侎), 박한소(朴漢紹)를 경원장(京院長)에게 보내어 그 진위를 판명케 하였다. 그 때의 경원장은 송덕상(宋德相)이었고 향원장(鄕院長)은 이택징(李澤徵)이었다. 그 뒤에 태학에서 충주 운곡(雲谷)에 소장된 주부자의 영정을 하남재(河南齋)에 옮겨 오니 이 때 김형진은 단독으로 상소를 올렸다. 도백(道伯) 김희(金熹)가 강릉부사 이진규(李晋圭), 춘천부사(春川府使) 이방영(李邦榮), 간성군수(杆城郡守) 조한진(趙漢鎭)을 조사관으로 파견하여 조사한 결과 진상이 아닌 것으로 판명되어 조령(朝令)에 의하여 영당은 훼철되었고, 주자의 영정은 오봉서원에 옮겨지게 되었다.

한편 1806년(순조 6)에 송시열의 서원배향이 논의되다가 당시 당론에 합당하지 않는다 하여 거절되었다. 그러나 순조 13년 권한룡(權漢龍)이 연천(漣川) 임장서원(臨漳書院)의 예를 제시하며 송시열의 위패를 오봉서원에 봉안했다. 이에 김학두(金學斗), 조석헌(曺錫憲) 등 팔유생(八儒生)들이 적극 반대하였다. 반대 유생들은 구류나 귀향의 조처가 처해졌으며, 지역 노론계의 의지대로 우암 송시열의 추배는 실현되었다.

[건립경위]

오봉서원칠봉(七峰) 함헌(咸軒)이 1552년 중국 남경(南京)에 사신으로 갔다가 오도자(吳道子)가 그린 공자의 영정과 행단도(杏亶圖) 1폭을 가지고 돌아와 1556년(명종 11) 향촌 사림인 최운우(崔雲遇) 등과 협의하고 당시 강릉부사 홍춘년(洪春年)과 강원도관찰사 윤인서(尹仁恕)에게 건의하여 세운 서원이다.

[명칭유래]

오봉서원강릉시 성산면 오봉리에 자리 잡고 있는데 이곳 지명이 중국 구산 즉 공자가 살았다는 곳과 같다 하여 이곳에 서원을 짓게 되었다 한다.

[위치]

강릉시 서쪽 성산면 오봉리에 있는 오봉댐을 가기 전 우측 산 중턱에 있다.

[변천]

1556년(명종 11) 공자의 영정을 봉안하면서 건립되어 1782년(정조 6)에는 주자의 영정을 봉안하였고, 1831년(순조 32)에는 우암 송시열의 영정도 함께 봉안하였다. 1882년(고종 19)에 칠봉 함헌의 공을 기리고 칠봉사를 재건하였다.

1868년(고종 5) 서원철폐령 이후인 1882년(고종 19)에 서원 곁에 칠봉사라는 사우를 짓고 칠봉 함헌을 모셨는데, 이 경우는 서원훼철 후 향중사림의 공론으로 지어졌다기 보다는 오봉서원 건립을 주도했던 함헌의 후손들에 의해 추진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오봉서원의 경우 배향인물의 추이에 의하면 초기에는 향중 공론에 의해 유지되었으나 서원 훼철령 이후에는 공론화된 서원으로서의 면모는 상실되었다. 물론 이 과정에서 함헌의 후손들이 주도하면서 지역 사림으로부터 지원을 받았으나 그 성격이 교학적 기능을 우선시 했던 예전의 기능에서 벗어나 성현과 선조에 대한 향사만을 중요시하게 되었다.

1902년 오봉서원에 설단(設壇)을 설치하고 매년 가을 상정일(上丁日)에 다례를 행하였고, 1914년에는 집성사를 중건하였으며, 1916년 석단과 문장을 다시 짓고 묘정비를 중건하였다. 1928년 집성사 우측에 칠봉사를 중건하고 우측 담장 옆에 강당도 건립하였다.

[형태]

민정중(閔鼎重)이 찬(撰)한 「오봉서원급칠봉사병원기(五峰書院及七峰祠倂院記)」에 보면, “聖廟三間 前廊幷神門五間 左右齋廊六間 講堂風詠樓十間 書冊庫一間 七峰祠一間 大門一間(성묘삼간 전랑병신문오간 좌우재랑육간 강당풍영루십간 서책고일간 칠봉사일간 대문일간)”이라 하여 건립 후 숙종조까지의 서원 규모를 살필 수 있다. 현재는 맞배지붕이며, 정면 3칸, 측면 2칸의 집성사, 맞배지붕인 칠봉사, 그리고 정문이 있고, 집성사 담장 넘어 좌측으로 팔작기와지붕 정면 4칸, 측면 2칸의 오봉강당이 있다.

[금석문]

1806년(순조 6) 이만수가 찬하고 조윤대가 쓴 기적비와 1856년(철종 7) 조두순이 찬하고 이종우가 쓴 묘정비가 있다. 그리고 구묘정비(舊廟庭碑)가 서원 앞뜰에 세워져 있다. 강당에는 율곡(栗谷) 이이(李珥)가 지은 원규(院規), 퇴계(退溪) 이황(李滉)명재(明齋) 윤증(尹拯)이 지은 서원도시(書院圖詩) 현판 그리고 ‘오봉강당(五峯講堂)’이란 현액이 걸려 있다.

人才淵藪古臨瀛(인재연수고임영) 인재들이 옛 임영의 땅에 모여

闢學丘山澗石淸(벽학구산간석청) 구산의 냇가 맑은 돌 구비에 배움의 터를 열었네

看圖知院稱嘉名(간도지원칭가명) 서원에 걸린 그림을 보니 아름다운 이름을 알겠네

病謝鋪張愧不情(병사포장괴부정) 병을 핑계로 학문을 펴지 못한 내처지 부끄럽네

降聖千年名己近(강성천년명이근) 성인이 나신 지 천년 명성이 이미 예 가깝도다

乞靈今日敎將明(걸영금일교장명) 오늘 이 서원의 힘을 입어 가르침이 밝아지리니

寄語諸君須堅坐(기어제군수견좌) 그대들의 굳건한 배움의 자리에 한 마디 부치니

從來出入害功程(종래출입해공정) 오가는 길에 방해나 되지 아니할지.

- 퇴계(退溪) -

曾聞祠廟在臨瀛(증문사묘재임영) 일찍이 임영의 땅에 사묘가 있음을 들었노라

遺像今朝拜肅淸(유상금조배숙청) 성인의 모습을 남겨 오늘 깨끗한 세상 기리네

鳶魚臺上偶題名(연어대상우제명) 연어대 위 제명을 맞추어 걸어두고

風詠樓前暢遠情(풍영루전창원정) 누각의 앞에서 시를 읊으며 깊은 정감을 펴노니

脚踏關東一頭地(각답관동일두지) 관동의 한 지역을 두루 누벼

塵眸刮得十分明(진모괄득십분명) 눈 가린 티끌을 비벼내 훤히 밝도다

退老詩篇垂史蹟(퇴노시편수사적) 퇴계 선생 시는 역사의 공적을 세우시고

栗翁模範示工程(율옹모범시공정) 율곡 선생은 나아갈 길의 모범을 보이네.

- 명재(明齋)-

[의의와 평가]

오봉서원은 강원도 지역에서 최초로 세워졌으며, 강릉 지역 사림들의 발의와 지방장관들의 협조로 건립되어졌다. 그리고 비사액 서원임에도 불구하고 숙종 7년(1681)에 위토 3결과 모속인 20명을 국가로부터 하사받아 사액서원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1.12.18 2011 한자 최종 검토 1806년(순조 6년) ->1806년(순조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