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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302005
한자 書院
영어음역 Seowon
영어의미역 Confucian Academy
분야 종교/유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강원도 강릉시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임호민

[정의]

조선시대 지방의 사립 교육 기관.

[개설]

조선왕조 최초의 서원은 1543년(중종 38) 풍기군수(豊基郡守) 주세붕(周世鵬)이 세운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이다. 이후 서원은 전국 각지에서 꾸준히 증설되었다.

서원은 사림의 장수(藏修)·강학(講學)의 장소이다. 사림들이 서원 건립에 적극적이었던 까닭은 성리학적 지배 질서를 확립하고자 하는 의도였으며, 이 과정에서 재지사족층의 사회적 역할을 제도적으로 구체화하려는 것이었다. 사림이 주도한 서원의 창립은 재지사족의 사회적·정치적 기반의 확립과 관련이 있다.

[서원 현황]

1. 오봉서원

강릉 지방에는 2개의 서원이 전해진다. 첫째, 오봉서원은 1562년(명종 16)에 전 부사 함헌(咸軒)도경 최운우(崔雲愚)를 비롯한 향원(鄕員)의 향론(鄕論)과 강릉부사 홍춘년(洪春年)과 도백(道伯) 윤인서(尹仁恕) 등의 협조를 얻어 건립되었다. 오봉서원은 공자의 진영을 봉안하고 있으며, 공자의 진영은 1556년(명종 11)에 함헌이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갔을 때, 오도자(吳道子)의 수화(手畵)인 공자 진영을 가지고 와서 이곳에 봉안하였다. 당시의 건물은 성묘(聖廟) 3칸, 전랑(前廊)과 신문(神門)이 5칸, 좌우재랑(左右齋廊)이 6칸, 강당이 10칸, 서책고(書冊庫)가 2칸, 대문이 2칸의 규모였다. 오봉서원은 사액서원은 아니었지만, 공자의 진영을 봉안한 강원 지방의 유일한 서원이었으므로 1681년(숙종 7)에 위전(位田) 3결과 모속인(募屬人) 20명을 하사받았다.

1782년(정조 6) 주자의 영정을 봉안하였고 1831년(순조 32)에는 우암 송시열의 영정을 봉안하였다. 1882년(고종 19)에는 함헌의 성모공(聖慕功)을 추모하여 별원(別院)을 짓고 봉사하였다. 1806년(순조 6)에는 이만수(李晩秀)가 찬하고 조윤대(曺允大)가 글을 쓴 오봉서원기적비(五峯書院紀蹟碑)가 세워졌고, 1856년(철종 7)에는 조두순(趙斗淳)이 찬하고 이종우(李鍾愚)가 글을 쓴 오봉서원묘정비(五峯書院廟庭碑)가 세워졌다.

1868년(고종 5)에 전국의 사액서원을 제외한 서원철폐령으로 오봉서원도 철폐되었으며, 서원철폐령으로 공자의 영정은 강릉향교에 옮기고 주자의 영정은 경기도 연천의 임장서원(臨漳書院)에 돌려보냈다. 그리고 송시열의 영정은 청주의 후손에게 보냈다. 아울러 오봉서원의 서책, 전지(田地), 노비 등 재산은 강릉향교에 이속되었다.

1902년 고종의 충현(忠賢)은 봉사함이 마땅하다는 뜻에 따라 이 지방의 사림들에 의해 오봉서원의 옛터에 단을 설치하고 계추(季秋) 상정일(上丁日)에 다례를 봉행하였다. 1914년에 집성사(集成祠)를 중건했으며, 1916년에는 석단과 문장(門墻)을 다시 짓고 묘정비(廟庭碑)를 중건하였다. 1928년에는 집성사 우측에 칠봉사(七峰祠)를 중건하고 우측 담장 밖에 강당도 건립하였다. 1973년 7월 31일 강원도유형문화재 제45호로 지정되었다.

2. 송담서원

송담서원(松潭書院)율곡 이이를 배향하는 서원으로 석천묘(石川廟)에서 시작되었다. 석천묘는 1592년(선조 24)에 사인(士人) 김경시(金景時)의 발의로 서원 건립을 위한 공론이 모아졌으나 임진왜란으로 성사되지 못하였으며, 1617년(광해군 9)에 다시 논의되었으나 난정(亂政)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후 석천묘의 건립은 처음으로 발의된 지 20여 년이 지난 1624년(인조 2)에 전공조참의(前工曹參議) 김몽호(金夢虎)이상필(李尙馝) 등 30여 명의 향론이 다시 모아져서 추진되었다. 강원감사 윤안성(尹安性)과 강릉부사 강주(姜紬)의 협조를 얻어 6년간의 공정으로 1630년에 완공되었다. 이 해에 유생 최언침(崔彦琛) 등이 사액을 신청하였으나 승낙을 받지 못하였다.

석천묘의 건립 당시 위치는 구정면 학산리 왕현이었다. 1652년(효종 3)에 강원감사 김익희(金益熙)와 강릉부사 이만영(李晩榮)의 협조를 얻어 현재의 위치인 구정면 언별리[구: 부 남쪽 20리의 안인동]로 이건되면서 그 명칭이 ‘송담서원’으로 개칭되었으며, 동년 8월에 이안제(移安祭)를 지냈다. 그러나 서원이 이건한 사유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으며, 다만 묘정비에서 서원 건물이 퇴락하여 새로운 서원지를 찾아 이건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1659년(효종 10) 12월에 사액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렸고, 다음 해인 1660년에 사액서원이 되었다. 이 때 국가로부터 위토 3결과 모속인 22명이 하사되었다.

1726년(영조 2)에 정호(鄭澔)가 찬하고 민진원(閔鎭遠)이 서한 묘정비가 건립되었다. 이 당시의 서원 건물은 묘우가 6칸, 월랑이 7칸, 동서재가 각각 3칸, 강당이 10칸, 광제루(光霽樓)가 3칸, 서책고가 3칸이었고 서원 생도는 30명이었다. 1804년(순조 4) 8월 대화재로 각 재당과 낭(廊) 등 수십여 칸이 전소되고 사우만 남았었다. 그후 박철희(朴哲希)가 많은 유생들과 협의하여 경원장(京院長) 김달순(金達淳)의 재가를 얻어 강당, 장경각, 광제루 등을 건립하였다.

1871년(고종 8) 5월 13일 서원철폐령으로 철폐되었으며, 철폐되면서 서원이 소유하고 있던 재산 즉 전지·노비·서책 등은 강릉향교로 이관되었다. 이후 도사(都事) 권학수(權學洙)가 신의계(臣義契)를 조직하여 다례를 지내다가 1905년(고종 40)에 구지(舊地)에 묘우 1칸을 세우고 송담재(松潭齋)로 현판을 걸어 중춘(仲春) 중정일(中丁日)에 다례를 거행하였다.

현재 서원의 규모는 1971년에 건립된 묘우 6칸, 1976년에 건립된 동재 6칸, 1978년에 건립된 서재 6칸이다. 1973년 7월 31일 지방유형문화재 제44호로 지정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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