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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300634
한자 公所
영어음역 gongso
영어의미역 Catholic Church
분야 종교/기독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강원도 강릉시
집필자 김남현

[정의]

강원도 강릉 지역에 있는 본당보다 작은 천주교회 단위.

[개설]

신부가 상주하지 않기 때문에 미사가 집전되지 못하고 대신에 공소회장을 중심으로 첨례를 보거나 공소예절이 행해지며, 정기적인 신부의 방문을 통해서 성사가 집행된다.

[금광리 공소]

금광리 공소 현판에는 1887년 창립으로 적혀 있어 19세기 말에 벌써 신자들이 이주하였음을 알 수 있다. 금광리 공소 신자들이 1921년 가을 판공 때 최문식 양양본당 주임신부에게 보좌신부인 이철연 신부를 금광리로 파견해 주도록 요청하였다. 당시 신자 수가 149명이고 공소 강당과 신부가 머무를 수 있는 사제관도 갖추어 놓고 있었기에 1921년 12월 2일 이 신부는 금광리 공소로 부임하였다.

가. 금광리 공소의 설립목적 및 경위

영동 지역 공소는 기존의 주요 역로와 간선도로를 따라 형성되었다. 이는 박해를 피하여 이동하였고 또한 교우끼리 정보 교환을 하는데 유리했을 뿐만 아니라 이들의 생계수단인 옹기를 굽기 위해 필요한 양질의 흙, 물, 땔감 등이 풍부한 곳이 영동 지방이었다. 1866년 이후부터 형성되기 시작한 영동 교우촌의 신자들은 1870년대 초까지 박해가 계속되면서 신자 신분을 감추고 생활하였다. 차츰 박해가 종식되면서 영동 지역 교우촌은 신자들이 모여들어 더욱 확대되었다. 대관령에서 강릉 시내로 들어오지 않는다면, 삼정평을 지나 금광리는 농사와 옹기굽는 일이 수월한 지역이었기에 1921년 금광리 공소에 149명의 신자가 있었다.

나. 금광리 공소의 변천

1921년 12월 2일 이철연 신부 부임 후 호세(戶稅)와 포교계(布敎屆) 제출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으나 남녀 교리학교를 각각 1개씩 설립하고 이어 남자 소학교도 설립하였다. 그러나 금광리가 너무 외진 곳에 위치하였기에, 본당 중심지를 양양 쪽으로 옮기려고 1923년 11월 23일 주문진으로 이전하여 본당을 세웠다.

다. 금광리 공소의 현황

남자 신자 17명, 여자 신자 33명로 총 50명이다.

[안인 공소]

1969년 4월경 강릉에서 8㎞ 떨어진 해안과 인접한 안인진 201-2번지 외 4필지 1,500평의 대지에 벽돌 슬라브조 160.68m²의 건물이 신축되었다.

가. 설립목적 및 경위

설립 동기와 과정은 기록이 없어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해안과 인접한 지역적 특수성으로 매년 12,000여 명의 피서객이 이곳 해수욕장 2곳을 찾고 있어 지역 사목활동은 물론 외지에서 찾아오는 피서객을 위한 미사 참례와 하계피정 장소로 제공되고 있다.

나. 변천

옥천동 본당 관할 하에 있었으나 축성식 이후 노암동 본당 관할로 이관되었다.

다. 활동사항

공소 관리는 영동화력발전소 사원 아파트에 거주하는 신자를 중심으로 평신도 사목활동과 매월 1회 정기적인 미사봉헌과 시설물 보수 정비를 하고 있다.

라. 현황

남자 신자 33명, 여자 신자 65명으로 총 98명의 신자가 있다.

마. 의의와 평가

정동진 해돋이가 전국적으로 유명해짐에 따라 동해안으로 찾아오는 유동 인구와 관광객 수요가 날로 증가 추세에 있어 계절적으로 지역 특성에 맞는 사목활동과 시설을 갖춘다면 공소로서의 기능은 더욱 확대될 것이다.

[행정 공소]

가. 설립경위

1928년 3월 김문교[요한]가 양평군 용문에서 조병태 일가가 강릉군 구정면 금광리에서 이주하여 옹기촌을 열면서 이들의 전교로 행정리 일대에 신자촌이 형성되었다. 1958년 김창석[아오스딩]과 김종호[바오로]가 주축이 되어 모든 신자가 절미운동 등을 통해 직접 벽돌을 찍어서 38평의 강당을 건립하였다. 1958년 10월 8일 주문진 본당 최창규 신부와 구주교에 의해 축성되었다.

나. 변천

한국전쟁 직후 신자 수는 150~200명으로 공소를 가득 메울 정도였고 김창석 회장과 김종호 부회장의 헌신적인 열성과 노력으로 교육에 힘썼다. 1960년대까지 고(故) 김종석[토마] 신부와 이정행 신부와 여러 명의 수도자를 배출한 사실에서 왕성한 활동을 보여 주었다. 김창석, 김종호 형제들은 삼산까지 전교의 손길을 뻗쳐 차기환[바오로]을 입교시켰고 1959년 목조 18평의 삼산 공소를 건립하였다. 1970년대에 들어와 옹기점이 사양화되면서 대부분의 신자들은 인근 도시나 서울 등지로 이주하여 쇠퇴기를 맞이하였다.

다. 현황

교통이 원활하여 현재는 신자들이 주문진 본당으로 와서 미사에 참석하고 있다.

라. 조직

행정 공소 회장 명단은 제1대 김문교[요한], 제2대 김창석[아오스딩], 제3대 김종호[바오로], 제4대 김창석[아오스딩], 제5대 김봉곤[벨라도], 제6대 조대득[바오로]이다.

[삼산 공소]

천주교 주문진 본당 산하 연곡면 삼산에 있는 작은 교회.

가. 설립목적

신도 수가 적어 신부가 상주하지 않기 때문에 미사가 집전되지 못하고 대신 공소회장을 중심으로 첨례를 보거나 공소예절이 행하여진다. 정기적인 신부의 방문을 통해 성사가 집행된다.

나. 설립경위

1956년 12월 29일부터 행정 공소 교우들에 의해 전교가 시작되어, 1957년 4월 20일 부활주일에 26명의 첫 영세자가 났다. 1959년 7월 27일 최창규 신부에 의해 목조 18평의 경당이 축성되었다.

다. 변천

공소 건물이 없을 당시 묘제[묘치]초등학교 건물을 빌려 미사를 드렸다. 한번은 초등학교 교장의 허락없이 미사를 드린 일이 발생하여 서로 낯을 붉힌 일이 있은 후, 최신부에 의해 경당을 축성하게 되었다. 삼산의 야산을 구입하여 건축에 필요한 목재를 신자들이 직접 운송하였고, 당시 행정 공소 회장이던 김창석이 감독을 맡았다. 초기에 영세자는 40명 정도였고 예비자가 100여 명 정도였다. 주일이나 대축일 미사를 드리기 위해 새벽 2시에 일어나 주문진성당으로 가기 위해 장덕리골의 길을 따라 6~7시간을 걸어가곤 했다.

라. 현황

15가구에 40명의 신자가 있다.

마. 조직

구역장으로 김봉도[프란체스코]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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