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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농업학교 독서회사건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300119
한자 江陵農業學校讀書會事件
영어음역 Gangneung Nongeop Hakgyo Dokseohoe Sageon
영어의미역 Gangneung Agricultural School Reading Club Incident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강원도 강릉시 옥천동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박도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연도/일시 1929년 5월 1일연표보기 - 강릉:강릉농업학교 독서회 결성
종결연도/일시 1934년연표보기 - 강릉:강릉농업학교 독서회사건 종결
성격 사회운동
발생(시작)장소 권오훈(權五勳)의 집
발생(시작)장소 강원도 강릉시 옥천동
관련인물/단체 권오훈|권혁남|정윤시|최종필

[정의]

일제강점기 강릉농업학교 독서회 회원을 중심으로 전개된 항일학생운동.

[역사적 배경]

독서회는 1925년 이후 광주 지역에서 고조된 분산적이고 개인적인 항일투쟁을, 기조적 교양(基調的敎養)과 추진력에서 체계적·통제적으로 배양시켜 나갈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독서회중앙본부 밑에 각 학교에 단위 독서회를 조직하여 기반을 확대시켜 항일학생층을 폭넓게 수용하고 중앙에서 지도 통제함으로써, 막강한 항일투쟁을 전개할 수 있는 힘을 집결하였다.

[목적]

사회과학 계통의 서적과 반제국주의의 서적을 공동으로 구입하여 돌아가면서 읽고 모일 때마다 토론회를 열어 모임의 조직을 확대하고 항일민족전선을 강화하고자 한 강릉농업학교 독서회는 일제의 감시를 피하면서 항일적인 저항을 목적으로 활동을 전개하였다.

[발단]

강릉농업학교 독서회는 1929년 5월 1일, 당시 북경대학에서 수업하고 돌아온 권오훈(權五勳)옥천동 집에서 권혁남(權赫南) 등 9명과 신간회 강릉지회에서 활동하던 정윤시, 신간회 강릉지회의 간사이며 강릉청년연맹에서 활동하던 최종필 등이 모여 결성하였다.

강릉농업학교 독서회의 첫 번째 활동은 1929년 11월 광주 학생 항일운동이 발생한 후 그 영향이 전국적으로 파급되던 1930년 1월 하순에 중앙학생 항일투쟁본부로부터 접선된 배석린(裵錫麟)과 노화경(盧和敬)이 교내의 학생들 책상 위에 ‘격(檄)! 피압박민족(被壓迫民族) 조선청년학생(朝鮮靑年學生) 제군(諸君)에게’라는 격문(檄文)을 살포한 사건에서 시작된다. 이러한 격문 살포는 강릉농업학교에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1월 31일 밤에는 강릉시 전역에 광주 학생 항일운동의 발단을 기록한 2장의 긴 격문이 살포되었다.

강릉경찰서에서는 이 두 가지 격문 살포사건이 연관이 있다고 여겨 강릉시 전역에 경계망을 펼쳐 엄중한 수사를 벌였다. 그 결과 강릉시 격문 살포의 주모자로 강릉중앙감리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던 강원목공조합장 강덕상(姜德祥)과 공모자 박승만(朴承萬) 등이 체포되었고, 강릉농업학교 격문 살포와 항일 시위를 계획한 주모자로는 재학생 배석린과 노화경이 체포되어 강릉경찰서에 구금된 후 10여 일간 많은 고초를 겪고 풀려났다. 이 사건은 사전에 그 계획이 발각되어 행동화되지는 못했지만 강릉농업학교 학생들의 민족주의 사상을 크게 자극하여 항일 동맹휴학운동이 일어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경과]

강릉공립농업학교의 독서회가 재건된 것은 1932년에 와서이다. 당시 3학년에 재학 중이던 최건영(崔建永)과 심양섭(沈亮燮)이 중심이 되어 강릉공립농업학교에도 항일투사가 있음을 널리 알리고자 10여 명의 인원으로 독서회를 재건하였다. 당시 회원은 1학년에 염재근(廉在根)·박용태(朴容台), 2학년에 이동언(李東彦)·김형도(金炯道)·김혁래(金赫來)·김창회(金昌會)·박병천(朴炳天)·김천회(金天會)·권오걸(權五傑)·권혁인(權赫仁)·최호섭(崔鎬燮)·박연교(朴年敎), 3학년에 최건영(崔建永)·심양섭(沈亮燮)이 있었다. 이들은 3대 강령까지 정해 놓고 본격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강령은 “첫째, 사회과학 및 일반 서적을 윤독(輪讀)하여 사회견문을 넓힌다. 둘째, 일제 식민 교육정책을 반대한다. 셋째, 일본 제국을 타도하고 조선 독립을 쟁취하는 데 앞장을 선다.”이다.

이들은 매주 회합을 갖고 토론회를 열었는데, 3월 1일, 5월 1일, 6월 10일, 11월 3일 등 뜻 있는 날에는 애국전단을 곳곳에 붙이고 학생들의 민족적 자극을 촉진하였다. 특히 1932년 11월 3일 광주 학생 항일운동의 기념일에는 최건영의 하숙집에 모여 기념행사를 구실로 한 투쟁 방법을 생각한 끝에 11월 3일 전교생에게 호소문을 보내기로 하였다. 밤을 이용하여 ‘광주 학생의 애국정신을 본받아 우리들도 최후까지 싸워 승리를 쟁취하자’는 내용의 격문을 교내에 붙여 학생들의 민족의식을 일깨웠다.

이 독서회는 1933년 6월 20일부터 적극적인 반제활동(反帝活動)을 전개하는데, 이것이 바로 3차 동맹휴학운동이다. 그 사건의 발단은 일본인 교사의 조선인에 대한 민족적 무시와 경멸 때문이었다. 1·2차 동맹휴학 때와는 달리 학교의 체제가 어느 정도 정비된 이후에 발생한 3차 동맹휴학에서는 항일 민족의식이 가장 강하게 나타났다.

3차 동맹휴학의 결과 그 해 7월 초 김천회·박병천 등 13명의 회원이 퇴학 처분을 받았다. 그러나 이 독서회는 그 뒤에도 계속해서 농촌운동과 항일계몽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으나, 그 해 10월 권오훈이 관계하던 ‘강릉농민동맹’, ‘가두노동조합’ 등의 조직이 일제에 적발되면서 강릉농업학교 독서회 ‘반제국동맹’도 적발되었다. 결국 그해 11월 28일, 15명의 회원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고 독서회 활동은 중지되었다.

[결과]

1934년부터는 ‘토요회’가 다시 농업학교 내에 새로운 서클로 조직되어 독서회의 뒤를 이어받았으나, 권오훈 계통의 조선공산당 재건동맹 하부조직들이 2차로 일경에 체포되면서 토요회 회원 역시 수업 중에 체포되었다. 1930년부터 1933년까지 4년 동안 맥을 이어 오던 강릉농업학교의 항일 학생운동도 전국적인 반제동맹 가입자 색출 및 검거에 따라 15명에 달하는 독서회 회원들의 구속으로 해체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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