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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평마을-인물과 문화유적-인물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3T06015
한자 荷坪-人物-文化遺蹟-人物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강원도 강릉시 사천면
집필자 임호민

[인물]

하평마을이 배출한 역사적인 인물들을 정리해본다.

먼저 이설당(梨雪堂) 김광진(金光軫)[1495~?]이 있다. 그는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자는 자임(子任)이며 본관은 강릉 사천이다. 아버지는 김세훈(金世勳)이고, 형은 동지중추사 김광철(金光轍)이다.

1526년(중종 21) 생원으로서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1537년 시강관이 되어 궁중의 법률을 엄격하게 할 것을 건의하였다. 이후 집의를 거쳐 전한이 되었으며, 같은 해 직제학을 거쳐 이듬해 진주목사가 되었으나, 그 소임을 감당하지 못한다 하여 체직되었다. 1540년 다시 진주목사로 나가 민폐를 제거하고 위엄과 은혜를 베풀어 아전들과 백성들이 모두 두려워하고 칭찬하는 치적을 쌓았다. 이로 말미암아 포상을 받고 당상관이 되었다. 1541년에는 제포첨사(齊浦僉使)가 되었으나 군령을 어겼다 하여 파직시키고자 하였는데, 왕이 허락하지 않자 사헌부에서는 파직만으로는 죄가 가볍기 때문에 고신(告身)마저 빼앗아야 한다고 적극적으로 주장하여 결국은 파직되었다.

1547년(인종 1) 차사원(差使員)으로 파견되어 특별한 공을 세워 가선대부에 승진하였고, 1547년 사은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이듬해 경상우도병마절도사가 되어 나갔다가 사양했으나, 군졸이 피폐하고 변방의 방비가 허술하기 때문에 군졸을 다스리고 방어에 대비하라는 왕의 명령을 받고 그 일에 힘썼다. 1549년 청홍도관찰사(淸洪道觀察使)로 나갔으며, 이듬해 역적 이치(李致)의 노비, 전답, 재물을 추쇄한 문서를 즉시 수송하지 않았다 하여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1551년(명종 6) 전주부윤이 되었고, 1553년 함경도관찰사로 나아갔다. 1554년 군사를 다스리는데 치적을 쌓아 곧 한성부좌윤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육진(六鎭)의 농사가 제대로 되지 않아 폐단이 많음을 들어 다시 함경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 1555년 함경도지방의 호인(胡人)의 토벌과 군사들을 다스리는 데 힘을 다하여 이듬해 병조참판이 되었다. 1557년 첨지중추부사에 이어 경상도관찰사로 나갔다가 사양하였으나, 풍년이 들지 못하고 왜구가 침입하여 군사들이 곤핍하여 지방수령들을 순찰할 때라 하여 왕의 허락을 받지 못하였다. 1564년 호조참판이 되었다. 주로 지방관직에 있으면서 많은 치적을 쌓아 명성이 높았다.

애일당(愛日堂) 김광철(金光轍)[1493~1550]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자는 자유(子由), 호는 애일당이며 아버지는 김세훈(金世勳)이다. 1513년 (중종 8) 생원으로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29년 밀양현감으로 있을 때 형벌을 남용했다 하여 탄핵을 받았다. 1530년 군자감천정이 되고 이듬해 장령이 되었다. 1532년 사송(司訟)이 바르지 못하고 지체되는 일이 많음을 지적하여 바르게 고칠 것을 주장하고 곧 집의가 되었다. 1533년 장례원판결사로 동지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뒤, 1537년 병조 참지가 되었다. 곧 참리사에 천거되었으나 이 직책은 호조에 해당하는 관직이라 하여 임명되지 못하고 예조참판이 되었다. 같은 해 충청도관찰사가 되었으나 인물됨이 용렬하고 공론을 잘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간원의 탄핵을 받았다. 1542년 안동부사로 흉년을 구하려고 노력하였으며 검소함을 강조하여 백성들을 잘살게 하였으므로 이 공으로 포상을 받고 자급(自給)을 올려 받아 가의대부가 되었다. 이듬해 한성부우윤이 되고 1545년(인종 1) 종부시제조가 되었다. 예조참판으로 『중종실록』과 『인종실록』의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이후 전라도관찰사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양하니 왕이 불러 흉년과 백성들의 기근을 구제하는 데 마음을 다해줄 것을 특별히 요구하였고, 이를 받들어 1548년 전라도관찰사로 나아가 고부군수 김응두와 태인현감 심잠이 요역을 가볍게 하고 부세(賦稅)를 적게 거두는 등, 그 지방 백성들의 부담을 적게 하는데 힘써 선정을 남긴 관리들을 왕에게 보고하여 이들을 상주하게 하였다.

삼가당(三可堂) 박수량(朴遂良)[1475~1546]의 자는 군거(君擧)이고 호를 삼가당(三可堂)이라 하였다.

박수량은 1475년에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부모에게 효도하고 동기간에 우애심이 두터웠다. 또 총명하고 학문과 도의에 통달했으나 입신양명하는 세상일에는 전혀 마음을 두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과거에 붙은 친구가 그를 찾아왔다. 오랜만에 찾아온 친구이기도 하지만 그 친구가 지난번의 과거에 합격하였기 때문에 더욱 반갑게 맞이하였다. 두 친구는 두터운 우정을 나눈 후 헤어졌다.

친구가 돌아간 뒤 선생의 어머니께서는 아들 수량 선생에게 혼잣말처럼 “저런 훌륭한 아들을 둔 부모님은 얼마나 좋아하시겠느냐” 하셨다. 과거에 합격한 아들 친구의 당당한 모습이 몹시 부러웠던 것이다. 이러한 어머니의 소원을 짐작한 선생은 비록 자신은 과거나 명예에 뜻은 없더라도 어머님을 즐겁게 하는 효도의 길로 과거시험을 치르기를 결심하였다. 선생이 생원시험에 합격한 나이가 30세의 늦은 나이였던 것도 이러한 연유에서다. 그러나 벼슬시험인 대과에는 끝내 응시하지 않았다.

그의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의 이야기이다. 그때는 마침 연산군이 단상제(短喪制)를 엄하게 시행하게 하던 때이다. 단상제는 부모가 돌아가시면 삼년 동안 예법에 따라 상주노릇을 하는 것이 당시의 관습이었는데 연산군은 삼년상을 하는 것은 많은 폐가 된다 하여 1년 동안만 상주노릇을 하게 한 제도이다. 그러나 그는 어머니의 상례를 옛 법대로 3년상으로 치르게 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나라의 법을 어기면 큰 벌을 받을까봐 몹시 걱정들을 하였다. 더구나 연산군은 조선조 제일의 폭군이었으니 두려워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단순한 삼년상으로 장사지내는 것이 아니라 묘소 옆에 움막을 짓고 그곳에서 3년 동안 생활을 하셨다고 하니 참으로 큰 효심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 후, 이 일이 나라에 알려져 중종 임금에게서 효자의 표창을 받았다. 더구나 선생의 경우처럼 살아있는 동안에 받는 효자표창은 매우 드문 일로 생시정려(生時旌閭)라 하여 더욱 영광스럽게 여기는 표창이다. 이때가 1508년, 연산군이 쫓겨난 지 3년째 해의 일이다.

이때부터 다시 8년의 세월이 흘러간 1516년, 가을의 일이다. 당시 학자로서 또 정치지도자로서 명망이 높던 충암(沖菴) 김정(金淨)[1486~1520]이 금강산을 구경하고 오던 길에 강릉에 들르게 되었다. 김정은 이곳에서 박수량의 이야기를 듣고 그의 집을 찾게 된 것이다. 두 분은 첫 인사가 끝나자 오랜 친구처럼 아주 친숙하게 며칠을 함께 지냈고, 마침내 떠나는 날이 되었다. 두 분은 며칠 동안의 두터운 사귐 때문에 더욱 아쉬운 석별의 정을 나누어야 했을 것이다. 이때, 충암 김정 선생이 금강산에서 가지고 온 철쭉나무 지팡이를 선생에게 선사하면서

‘만개의 구슬돌로 쌓은 벼랑 뒤에서 오랜 세월 눈서리 맞으며 자란 가지를 내가 가지고 와 당신에게 드리오니 오래도록 우정으로 간직하소서’라는 시도 함께 주었다. 이 시와 지팡이 선물에 대답하는 뜻으로 선생은 다음과 같은 시를 주었다. ‘이 지팡이는 곧으면 먼저 베어질까봐 우정 몸을 구부려 비틀비틀 자랐지만 원래의 꼿꼿한 성품은 버리지 못하니 어찌 도끼질을 면할 수 있겠느냐?’

박수량김정 선생에게 준 이 시의 속뜻은 매우 깊다. 즉, 김정 선생은 지조가 너무도 곧고 옳다고 믿는 일엔 물불을 가리지 않는 성품 때문에 장차 화를 입을지도 모르니 조심하라는 뜻을 전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성품은 어쩔 수 없는 것인지 김정은 기묘사화에 걸쳐 사형을 당하고 말았다.

이런 일이 있은 지 2년 후에 선생은 김정 등 조정 관리들의 추천으로 현량과(학식과 덕망이 높은 선비를 특별히 뽑아 벼슬을 주는 제도)에 올랐다. 그리하여 처음으로 도사(都事)의 벼슬을 받아 충청도 감영에서 근무하다 다시 용궁(경상북도 예천)현감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곳에 가보니 토지문제로 형제 사이에 생긴 재판문제가 오랜 시일동안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그 동안 전임수령들이 심판한 여러 기록을 살펴보니 꼭 꼬집어 한쪽만이 옳다는 판결을 내리기는 매우 어려운 사건이었다. 선생은 이러한 문제는 당사자간의 이해와 의리에 의하여 해결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푸짐하게 음식을 준비하고 형제를 불러 한자리에 앉게 하고 술잔을 권하면서 “형제간의 귀중한 의리를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서로 원수가 되어 다투는 너희들을 보니 민망스럽기 그지없구나. 그 동안 너희들의 시비를 가리려 해보았지만 내 덕이 모자라 옳고 그름을 가리지 못하였으니 정말 민망스럽구나. 이러한 자가 어찌 고을의 주인으로 백성을 온전하게 보살필 수 있겠느냐? 오늘 이 자리는 너희들이 고을원인 나를 전별하기 위해 만든 자리로 알아라.” 하면서 술잔을 돌리게 하였다. 그렇게 형제간의 우애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거듭 타이르면서 “땅이란 있다가도 없을 수 있고, 없다가도 얻을 수 있는 것이지만 형제란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이다. 형제는 똑같은 부모로부터 받은 몸이니 좌우 손발과 같은 사이이다. 어찌 하찮은 재산문제로 한쪽 팔을 잘라 버리려 하는가? 서로 사랑하며 우애 있게 지내는 것이 사람다운 큰 도리일세.” 하며 눈물을 흘렸다. 선생의 말씀에 크게 감동한 형제는 마침내 재판 문서를 그 자리에서 찢어버리고 서로의 잘못을 뉘우치며 얼싸안고 울었다 한다. 이 광경을 지켜보면서 선생은 두 형제에게 “허물이 없는 사람은 없는 법일세, 허물을 고칠 줄 아는 것이 착한 일 가운데서도 가장 귀한 것일세.” 하고 술잔을 들어 권하니 형제는 더욱 탄복하여 더욱 굳은 우애를 맹세하였다 한다.

이해 겨울,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선생은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온다. 그런데 용궁에 부임할 때 선생이 타고 간 암소가 그곳에서 새끼를 낳았었다. 주인을 태우고 갈 행장을 차리고 나선 어미소 옆에는 송아지도 따라 나섰다. 이것을 본 박수량 선생은 하인에게 송아지는 용궁의 것이니 떼어 놓으라 하였다. 이 말을 들은 관민들은 한결 같이 어미소를 따라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선생은 내가 올 때 가지고 온 것은 큰 소뿐이었으니 갈 때에도 큰 소만 가지고 가는 것이 당연하다하여 끝내 그곳에 두고 왔다 한다. 이때 선생의 행낭 속에는 아무것도 든 것이 없었다고 한다. 박수량의 청렴결백함이 이러하였으니 많은 사람의 존경을 받고도 남음이 있다 하겠다.

사휴당(四休堂) 박공달(朴公達)의 자는 대관(大觀)이고 호는 사지(四止), 또 사휴당(四休堂)이라 하였다. 1470년에 태어났는데 어려서부터 언행이 공손하고 효행이 깊어 어른들의 칭찬을 받으며 자랐다. 아무리 추운 날이라도 움츠리거나 몸가짐을 흩트리는 일이 없었으며 아무리 더운 날에도 함부로 옷을 벗지 않았다.

박공달은 학문을 몹시 좋아하여 스물여섯 살에 생원이 되었으나 벼슬에는 뜻이 없어 오직 공부하면서 몸과 마음을 갈고 닦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았다. 그러나 우연한 일로 해서 생각지도 않았던 벼슬에 오르게 되었으니 세상일이란 알 수 없다. 그 내력은 이러하다.

박공달이 마흔여섯 되던 해의 일이다. 당시에 대학자로 또 훌륭한 관리로서 임금의 사랑과 선비의 존경을 받고 있던 김정(金淨)이라는 분이 금강산을 거쳐 강릉에 온 일이 있었다. 옛날의 관리나 선비들은 한 고을에 들르면 보통 그 고을의 행세하는 사람이나 글 잘하는 선비들과 어울려 지내면서 친분도 가꾸고 학문도 이야기하는 것이 관습으로 되어 있었다.

김정은 박공달 선생과 선생의 조카벌 되는 박수량 선생을 알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만난 세 분은 때로는 술자리로 흥을 돋우고 때로는 학문을 토론하며 시간가는 줄을 몰랐다. 김정은 10살에 그 어려운 사서삼경에 능통하였다는 수재이고 또 패기 있는 젊은 관리로서 두 분 선비의 학문과 인격에 크게 감명을 받았다. 김정은 서울에 올라가서 임금에게 두 분 선비의 사람됨을 극구 칭찬하여 관리로 임명해 줄 것을 요청했다.

당시 관리가 되는 길은 두 가지가 있었다. 시험(대과)에 합격하는 일이 정상적인 길이고, 시험을 보지 않아도 효행이 지극한 사람이나 학문과 덕이 높은 사람에게 특별히 벼슬을 주는 일이 있었다. 이렇게 효행으로 관리를 뽑는 시험을 "효렴과(孝廉科)", 논문과 인격을 시험하여 뽑는 관리는 "현량과(賢良科)"라 하였다. 김정의 추천으로 박공달 선생은 1518년 현량과에 올라 홍문관 저작과 병조좌랑의 벼슬을 하였다. 그러나 다음해에 기묘사화라는 큰 변란이 있어 선생은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 강릉으로 돌아왔다.

이때 같은 인연으로 현량과에 뽑혀 벼슬길에 올랐던 박수량 선생도 역시 고향에 돌아왔다. 고향에 돌아온 두 분은 잠시 헤어져 지냈던 정분의 아쉬운 시간들을 회상하며 더욱 가깝게 지냈다. 두 분은 개울을 사이에 두고 살면서 개울 남쪽 바닷가에 정자를 짓고, 많은 시간을 이곳에서 함께 지냈다. 두 분이 모이면 학문을 토론하며 바른 정치와 도의 사회의 발전을 생각하고, 때로는 술잔을 나누며 호연지기와 도도한 시흥을 즐기며 해가는 줄 몰랐다 한다.

그렇게 지내던 두 분 가운데 박수량이 먼저 돌아가셨다. 이때 박공달은 77세이고, 박수량은 72세였다. 박공달 선생은 슬픈 마음은 유별하였을 것이다. 어려서부터 한마을 큰집, 작은집 사이에서 태어나 일 년 열두 달 손을 잡고 자란 두 분이다. 학문과 도의를 닦는 데도 뜻을 같이한 두 분은 비록 원했던 것은 아니지만 벼슬길에도 함께 오르고 또 그만두는 일도 같이 하였다. 어찌 보면 나이 차이 다섯 살을 빼고는 한 몸 한 마음같이 생활을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두 분의 우정을 말하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지금도 전해지고 있다.

개울을 사이에 두고 산 두 분은 비가 많이 오면 강물이 불어 건널 수가 없게 된다. 이럴 때면 두 분은 강의 이쪽과 저쪽에 자리를 깔고 서로 건너다보며 술잔을 나누는 척하며 술을 마셨다 한다. 그러던 사이의 한 분이 돌아가신 후의 일이다. 박공달 선생은 예나 다름없이 두 분이 노시던 정자(쌍한정)에 나와 생활하면서 술상은 꼭 두 사람분이 준비되어 있었다. 박공달 선생은 두 잔에 술을 붓고는 마치 마주앉은 사람에게 말하듯 “자 삼가공, 어서 잔을 드세나!” 하며 자기 잔을 높이 들어 술을 마셨다고 한다. 삼가박수량 선생의 호이다. 꾸민 말이기는 하겠지만 이때 수량 선생의 몫으로 가득 부은 술잔은 어느 사이인가 저절로 술이 비어졌다고 한다.

박공달은 자기의 호(號)인 ‘사지(四止)’의 뜻을 이렇게 해석하고 있다. ‘일지’는 화려한 정자는 못 가져도 큰 소나무를 정자삼아 그늘에 앉으니 좋고, ‘이지’는 비록 고대광실 좋은 집은 못되어도 사립문 있는 집이 있으니 좋고, ‘삼지’는 채소랑 먹을 것을 마당가에 심어 향긋한 나물죽도 먹을 만하니 좋고, ‘사지’는 어린 자식의 자라는 일을 보는 것이 제일 큰 즐거움이다. ‘사지(四止)’와 ‘사휴(四休)’는 같은 뜻으로 욕심 없이 자연과 더불어 신선같이 곱게 살려는 박공달의 인격을 짐작할 만하다.

교산(蛟山) 허균(許筠)[1569~1618]은 선조 때 당대의 명문이며 도학지사라 이르던 삼척부사, 경상관찰사 등을 역임한 초당 허엽의 셋째 아들로 사천진리 애일당에서 태어났다. 자는 단보(端甫) 호는 교산(蛟山)이고 여류시인 허난설헌의 남동생이다.

12세에 아버지를 여읜 허균은 마을 선생에게서 글을 배워 21세에 생원, 26세에 문과, 29세에 문과중시에 장원급제한 영재였다. 문장은 일세에 뛰어나고 영민한 두뇌와 기발한 수완을 갖추었기에 동료들은 물론 그를 따르는 사람이 많았다. 허균은 철이 들면서 관리들의 횡포와 사회적 부조리를 못마땅하게 생각하게 되었고, 서얼 출신 학자인 손곡(蓀谷) 이달(李達)[1539~1618]의 영향을 받아 서민층과 가까이 하면서 사회개혁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 여러 차례 중국을 왕래하면서 천주교 서적을 탐독하여 이를 국내에 보급하였고, 국방에도 관심을 가져 왜구와 북쪽 오랑캐를 막기 위한 군병양성을 주장했으며, 사회적으로 암적 존재였던 적서차별(嫡庶差別)의 철폐 등 사회개혁의 기치를 들고 나섰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이념을 관철시켜 나라를 튼튼히 하고, 보람 있는 국민생활을 이룩해 보겠다고 발버둥쳤지만 뜻을 이루지 못한 채 그를 따르던 동지 4명과 함께 역적이란 누명을 쓰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말았다. 실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의 이상과 주장이 받아들여졌어도 우리의 근대화는 하루라도 앞당겨졌을 것이다.

그의 행적에는 여러 가지 일화가 많다. 37세 때에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이 우리나라에 왔는데 허균은 그를 맞이하는 접원사로 임명되었다. 명나라는 우리에 비하여 강대국이었으므로 명나라 사신 주지번은 자못 의기양양했다. 그러나 문장에 능하고 주변이 좋으며 명석한 두뇌를 가진 허균인지라 명나라 사신의 콧대를 보기 좋게 꺾어 놓았다. 더욱이 최치원(崔致遠) 등의 시 830편을 4권으로 엮은 시집을 허균으로부터 받은 명나라 사신 일행은 우리나라의 문학 수준에 새삼 탐복했다 한다. 39세에 삼척부사(三陟府使, 지금의 군수), 형조참의(刑曹參義) 등을 역임했고, 44세에 예조참의, 46세에 호조참의를 거쳐 말년에 형조판서, 좌참찬에까지 이르렀다.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3.04.09 [인물] 수정 <변경 전> 1513년 (중종 8년) 생원으로/1545년(인종 1년),허균(許筠)[1563~1618]은/형조참의(形曹參義) 등을 <변경 후> 1513년 (중종 8) 생원으로/1545년(인종 1)/ 허균(許筠)[1569~1618]은/형조참의(刑曹參義) 등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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