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금산리 얼음 창고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306259
한자 金山里-倉庫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유적/건물
지역 강원도 강릉시 성산면 금산리
시대 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임호민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원소재지 강원도 강릉시 성산면 금산리 지도보기
성격 빙고

[정의]

강원도 강릉시 성산면 금산리에 있던 얼음을 보관하기 위해 만든 조선 시대의 창고.

[개설]

조선 시대 강릉 관아에는 척번대(滌煩臺)가 있었는데, 객사 동북쪽에 있었으며, 얼음을 저장하는 창고였다. 이른바 이 척번대는 내빙고(內氷庫) 기능을 갖고 있었다면, 금산리 얼음 창고는 외빙고(外氷庫) 기능을 갖고 있었다고 추정된다.

강릉지방 읍지에 전하는 얼음과 관련된 기사 중 의료와 관련된 내용을 살펴보면, 1754년(영조 30) 강릉부사 이현중(李顯重)은 봉급을 덜어 선비들의 학문 중흥에 힘썼으며, 용지(龍池)를 파고 얼음 창고도 옮기기도 하였다. 또 강릉의 사족으로 효성이 지극하였던 심지란(沈之蘭)은 어버이의 병이 위중하자 낮에는 의원을 맞아 치료하였고, 밤에는 하늘에다 어버이의 병을 자신이 대신해서 앓게 해 달라고 빌었다. 어버이가 꿩고기를 먹고 싶어 하기에 하늘에다 절하고 조용히 빌었더니 문득 꿩 한 마리가 마당에 날아들어 옴으로 이를 잡아 드렸다. 또 무더운 여름철 어버이가 병으로 몸에 열이 심해지자 얼음이 먹고 싶다고 했다. 심지란이 우물을 향해 얼음을 얼려 달라고 하늘에 빌었더니 우물에 얼음이 얼었다. 그것을 쪼개다가 드렸더니 어버이의 병이 점차 회복되어 마침내 천수를 누렸다고 한다.

조강진(曺綱振)은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였는데, 무더운 여름철 어버이의 병이 위독하여 온갖 약을 다 썼으나 효과가 없었다. 그러자 아버지는 아들을 불러 손을 잡고 “이제 더 이상 약은 쓰지 말아라. 열이 매우 심하니 얼음을 좀 먹으면 차도가 있을 것 같구나.”라고 말하였다. 강진은 울면서 아내 최씨에게 “나는 깊은 산으로 얼음을 구하러 떠나니 그동안 아버지의 병을 잘 보살피시오.”라고 이르고 종을 데리고 산으로 들어갔다. 점점 더 깊은 산으로 들어가는데 갑자기 큰 호랑이가 나타나 앞을 인도하기에 따라가 보았더니 바위 구멍이 있는 곳에 얼음과 눈이 있어 그것을 작은 병에다 넣어 가지고 돌아와 아버지에게 드리자 병이 곧 나았다고 한다. 이처럼 얼음은 지극한 효성의 발로로 많이 등장하였던 소재이고, 질병의 치료에 널리 활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위치]

금산리 얼음 창고가 있던 자리는 현재 강원도 강릉시 성산면 금산리 상임당 근처로 추정된다.

[형태]

한양에는 세 개의 빙고가 존재했는데, 서빙고, 동빙고, 내빙고이다. 얼음을 보관하였던 까닭은 연회를 베풀 때, 국가 제의를 거행할 때 음식을 조리하는 과정에서 사용되었다. 그러나 더 큰 이유는 의료용으로 얼음이 많이 사용되었다. 이에 지방 관아에도 관에서 짓고 관리하던 빙고들이 있었으며, 조선 중기~후기부터는 개인들이 빙고를 만들어 활용하기도 하였다. 얼음 1정(丁)은 대체로 두께 12㎝ 이상, 둘레 180㎝ 이상 정도였다.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