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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306255
한자 親政日御製賡進帖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문헌/전적
지역 강원도 강릉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최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저술 시기/일시 1764년연표보기 - 『친정일어제갱진첩』 제작
소장처 청풍당 - 강원도 강릉시 죽헌동지도보기
성격 갱진첩
규격 34.7㎝[세로]|21.1㎝[가로]

[정의]

1764년 영조가 참석한 대정이 끝난 후 지은 갱진시를 모은 첩(帖).

[저자]

[편찬/간행 경위]

갱진시(賡進詩)는 임금이 한 편의 시를 짓고 난 뒤 신하들이 차운(次韻), 화운(和韻)하여 지은 시를 말한다. 『친정일어제갱진첩(親政日御製賡進帖)』은 1764년(영조 40) 12월 25일에 영조가 참석한 대정(大政)이 끝난 후 영조의 어제시를 비롯하여 이조 판서와 병조 판서 등 21명의 신하들이 지은 갱진시를 모은 첩(帖)이다. 『친정일어제갱진첩』은 영조의 명에 의해 1764년 첩장본으로 제작하여 한 부는 궐내에 보관하고, 이듬해인 1765년 참석자 전원에게 각각 한 부씩 반사(頒賜)되었다.

[형태/서지]

내지는 8장, 표지는 비단으로 장정한 첩장본(帖裝本)이다. 세로 34.7㎝, 가로 21.1㎝ 크기이다. 오죽헌 권처균(權處均)의 후손인 권계학(權啓學)이 하사받아 청풍당에 소장하였다.

[구성/내용]

『친정일어제갱진첩』의 첫 장에는 영조의 어제시가 있고 다음 장에 이조 판서 신회(申晦), 병조 판서 구윤명(具允明), 도승지 김선행(金善行)을 비롯하여 이조와 병조의 참판, 참의, 정랑, 좌랑 등 모두 21명의 갱진시가 수록되었다. 당시 병조 좌랑으로 참석하였던 권계학은 하사받은 『친정일어제갱진첩』의 이면에 그날의 일을 자세히 기록하였는데,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성상께서 양심합에 임어하셔서 친히 대정(大政)을 열었다. 신은 마침 집필로 외람되게 앞자리에 참석하였는데, 대정은 낮에서부터 밤까지 이어졌다. 이조에서 아뢰기를 마치면 병조에서 뒤이어 아뢰어서 모두 마쳤을 때는 이미 경고(更鼓)[밤에 시각을 알리려고 치던 북]가 울리고 뜰에는 화톳불이 환하였다. 여러 신하가 물러나려 할 때 임금께서 자리에 앉으라 하고 친히 어제를 지어 내리며 즉석에서 화답하는 시를 지으라고 명하셨다. 여러 신하가 차례로 지어 올렸는데, 승선(承宣)이 높이 들어 읽으면 성상께선 비스듬히 베개에 기대어 들으셨다. 이어 양 전랑(銓郞)[이조의 정랑과 좌랑을 달리 이르던 말]도 모두 물러가지 말라 명하시고 이내 음식을 하사하였다.[하략]" 이때 영조가 지은 어제시는 사언 사구(四言四句)에 운자(韻字)는 '월(月)'과 '팔(八)' 이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요표친정(料表親政)[뜻밖에 친정을 하였으니]

갑신납월(甲申臘月)[갑신년 섣달이노라]

전첩기유(前牒其有)[예전의 기록에도 있었던가]

모의망팔(耗矣望八)[망팔의 나이에 기력을 쓴 이가]

[의의와 평가]

조선 시대의 국왕과 신하들은 나라의 경사나 특별한 행사를 기념하는 연회에서 흔히 시문을 수창(酬唱)하였다. 현재 남아 있는 시편들은 대부분 조선 후기의 영조와 정조 연간에 이루어진 시첩이 다수이다. 그러나 갱진첩 자체가 모임이 있었던 사람에게만 소량으로 제작하여 반사하였던 점에서 매우 희귀한 자료이다. 게다가 이 『친정일어제갱진첩』 자료에는 갱진첩을 받았던 권계학이 당시의 일을 자세히 기록으로 남겨 놓아 저간의 사정을 살필 수 있어 더욱 의미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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