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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304123
한자 孝子南漢復之閭
영어음역 Hyoja Nam Hanbok Jiryeo
영어의미역 Monument to the Filial Piety of Nam Hanbok
분야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비
지역 강원도 강릉시 강동면 상시동리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임호민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정려
건립시기/연도 1891년(고종 28)연표보기
관련인물 남한복(南漢復)
비문찬자 정운(鄭澐)
소재지 주소 강원도 강릉시 강동면 상시동리

[정의]

남한복(南漢復)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세운 정려비.

[개설]

남한복은 어린 시절에 아버지를 여의고 차츰 나이가 들면서 아버지를 잃은 통한의 서러움에 복받치곤 하였다. 남한복은 다른 사람들에게 “남들은 모두 아버지를 알지만 나는 모른다. 남들은 모두 아버지를 부를 줄 알지만 나는 모른다.”라고 하면서 자신을 천지간(天地間)의 죄인이라 생각하였다. 이때부터 남한복은 비바람과 눈보라가 몰아쳐도 매월 삭망에 성묘를 하였다. 남한복의 이러한 효행에 향리는 물론이고 행인들마저 감동하였다.

남한복이 환갑을 맞던 해, 아버지의 기일에 아침 일찍 성묘하고 묘소에서 머리를 풀고 신발을 벗고 새삼 상주가 되었다. 가족과 이웃 사람들이 귀가하기를 청했으나 평생의 한을 푸는 길이라 하여 끝내 듣지 않았다. 이에 남한복의 효성에 감동한 가족과 이웃들이 상복을 만들고 여막을 지어 주었다. 남한복은 그후 3년 동안 시묘(侍墓)를 하여 추상(追喪)을 마쳤다.

[건립경위]

남한복의 효성이 나라에 알려져 1891년(고종 28)에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증직되고 효자정려(孝子旌閭)를 받았다.

[금석문]

정려각의 기문은 남한복의 손자인 남학훈(南學薰)과 삼종(三從)인 남시훈(南時薰)의 요청으로 통정대부전사간원정언(通政大夫前司諫院正言) 정운(鄭澐)이 찬(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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