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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303475
한자 村落
영어음역 chollak
영어의미역 village|rural settlement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강원도 강릉시
집필자 김경추정암

[정의]

강릉 주민이 거주하는 일정 규모의 집단.

[개설]

인간이 생활하기 위하여 지표공간을 점거해서 거주하는 집단을 취락(聚落)이라고 한다. 취락의 규모가 큰 것을 도시(urban settlement)라 하고, 작은 것을 촌락(rural settlement)이라고 한다. 도시와 촌락을 나누는 인구의 기준도 국가마다 다르다. 국제적 기준은 2,000명이다. 한국은 이 수치의 10배가 되는 20,000명이다.

이것을 기준으로 그 이상의 인구를 가지며 도시형태를 갖추고 있는 지역에 읍제(邑制)를, 그렇지 않은 곳에 면제(面制)를 적용하고 있다. 따라서 촌락은 행정구역상 면단위 이하의 지역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인구와 같은 절대적인 기준 이외에 주민들의 생업기반, 지역의 경관구조, 공동체의 존재여부도 촌락과 도시를 구분할 수 있는 지표가 된다. 이러한 지표들의 절대적인 기준은 없으며, 모두 상대적인 것이다.

[분류]

촌락은 지리적 위치, 주민의 취업상태, 가옥의 소밀정도, 평면구조의 기하학적 형태, 성립과 발달의 적응과정을 지표로 세분할 수 있다.

첫째 지리적 위치에 따라 야촌·해촌·산촌으로 분류할 수 있다. 한국의 촌락은 평야에 위치하는 야촌(野村)이 압도적이지만 강릉 지역의 해안에는 해촌도 많이 나타나고 있다.

둘째 주민이 종사하는 생업기반에 따라 농촌·어촌·광산촌·임업촌·관광촌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 한국의 촌락은 농촌이 보편적이지만 강릉 지역의 해안에는 어촌도 나타나고 있으며, 근년에는 농촌과 어촌에서 관광업을 겸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셋째 평면구조의 기하학적 형태에 따라 불규칙한 것과 규칙적인 것으로 분류할 수 있다. 한국의 촌락은 대부분이 전자에 해당하지만 강릉 지역의 금광평 일대에는 역사가 짧은 개척촌락이 존재하고 있다.

넷째 가옥의 밀집과 소밀 정도에 따라 집촌과 산촌(散村)으로 나눌 수 있다. 한국의 촌락은 대부분 전자에 해당한다. 후자는 산지나 과수원 지역에서 자주 보인다.

다섯째 성립과정을 토대로 자연으로 발생한 것과 계획적으로 조성한 것으로 구분할 수 있다. 전자가 한국에서는 보편적이다.

[성격]

1. 농촌

강릉 지역의 농촌은 서쪽의 태백산지 분수령으로부터 동해를 향하여 뻗어 내린 많은 산각의 산록부를 따라 분포한다. 특히 북사면보다는 남사면 산록에 비교적 규모가 큰 마을들이 입지하고 있다. 사천면 석교리의 경우를 보자.

이곳은 사천내(沙川川)의 북안을 따라 북동방향으로 달리는 선상(線上) 구릉의 남사면에 해당한다. 이 구릉은 심하게 개석되어 있어서 개석부위는 골을 이루어 논으로 개간되었고, 이들 골과 골 사이의 야산 말단부에는 농가들이 집촌을 형성한다. 그리고 사천내 양안에는 자갈이 없고 거의 모래로 구성되어 있어서 대부분 논으로 개간되었고 야산 주위에만 밭들이 조성되어 있다. 따라서 논 면적이 농경지의 70% 정도를 점유한다.

이곳의 농촌경관은 동쪽으로 달리는 야산의 남록에 마을들이 입지하고, 그 마을 후면과 좌우를 감싸안은 듯한 송림이 매우 인상적이다. 이것으로 미루어보아 마을들은 송림을 벌채·제거하면서 성장해온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들 송림은 방풍림의 기능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마을 전면에 전개된 답작지, 그 앞의 제방과 하천으로 구성된 하나의 경관단위는 강릉 지역의 농촌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1970년대 이후 진행된 이촌향도 현상에 따라서 이곳의 농촌에도 청·장년층은 떠나고 노년층이 농업을 영위해가고 있다.

2. 어촌

동해안의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강릉 지역에도 반도나 만입부의 발달이 빈약하다. 그리하여 어촌들은 바다 쪽으로 향한 작은 돌출부에 의지해서 발달하였다. 주문진의 경우를 보자.

이곳은 등대가 위치한 작은 돌출부에 의지해서 남쪽으로 방파제를 축조하고, 그 안에 어선 정박소를 조성하여 물양장 북서부에 어촌이 형성되었다. 평지가 협소한 지형적 제약 때문에 가옥들은 밀집해서 분포하고, 아주 불규칙한 형태의 집촌을 형성하고 있다. 어업을 주기능으로 삼고 있으므로 바다로부터 선착장 및 물양장과 조선소 및 수리소, 수산물 상가, 냉장시설과 상가 및 가옥들이 순차적으로 입지하고 있다. 따라서 취락은 해안선을 따라 긴 형태를 보인다.

오징어가 전체 어획량의 반 이상을 차지하여 여름철 야간어업이 가장 활기를 띠며 전국에서 유동인구가 모여든다. 그리고 2011년 11월 현재 662척 4,129.05톤(동력선 646척/4,119.64톤, 무동력 16척/9.41톤)을 차지하는데, 어업에 종사하는 1,326가구 5,304명이다.

3. 산촌(山村)

태백산지 능선부에 근접한 강릉 지역에는 왕산면 대기리에 전형적인 산촌이 발달되었다. 이곳은 고도 약 700m에 이르고, 소규모의 분지를 형성한다. 사례지역은 닭목재 고개 바로 남쪽에 위치한 대기2리이다. 분지 내부는 매우 평탄하여 경지를 조성하는데 유리하다. 고도가 높아서 여름철의 냉량한 기후를 이용하여 고랭지 농업을 하기에 적합하다.

이 지역은 전통적으로 쌀·감자·옥수수·콩·조·약초 등을 재배하는 빈곤한 산촌이었으나, 1970년대 영동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논은 밭으로 전환되고, 감자·당근·배추·양배추·약초 등을 재배하여 평야지대의 농촌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부유한 곳으로 탈바꿈하였다. 특히 감자의 경우 같은 토지에서 2년에 한 번씩 의무적으로 재배하는 윤작농법이 도입되어 씨감자를 공급하는 채종포가 마련되기에 이르렀다. 최근에는 서리와 짧은 일조시간에 대응하기 위하여 비닐하우스를 조성해서 피망·토마토·셀러리·오이 등을 재배하여 높은 소득을 올리고 있다.

농가당 경지면적은 평균 약 2만 평으로 연간 순수익 2~3,000만원을 얻는다. 농업은 기업화되어 트랙터 등의 농기구가 보급되었다. 가옥들은 자기 소유의 농경지에 견인입지하여 산촌경관(散村景觀)을 형성하였는데, 그 형태는 영동 지방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겹집의 유형에 속한다.

4. 동족촌

강릉 지역의 동족촌 형성과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국사회의 변화과정을 간단하게나마 거시적으로 검토하는 일이 필요하다. 그 이유는 동족촌의 발달과정이 이 지역에 국한된 특수현상이 아니라 보편성을 띤 것이었기 때문이다.

여말에 도입된 성리학적 사회규범과 가족규범은 조선왕조 후기, 대체로 17세기에 이르러 불교적 규범을 대체하면서 정착하였다. 즉 종법(宗法)의 시행과 더불어 남(男)·녀(女)·장(長)·차(次)의 구별이라는 적장자(嫡長子) 우대의 규범은 상대적으로 가족관계에서 수직적 관계의 강화를 초래하였다. 그리하여 제사(祭祀)·호주(戶主)·재산(財産) 등의 상속에서 적장자가 우선권을 갖는 상황이 전개됨에 따라 양자제가 채택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상황의 전환은 족보의 개재내용의 변천에도 반영되었다. 그리고 18세기에는 대동행렬자(大同行列字)의 사용과 동족구성원의 수적 증가 및 거주지 이동과 관련하여 파보(波譜)의 간행이 유행하면서 족보가 널리 보급되기 시작하였다. 이와 같은 족보의 보급은 16세기 말 이후의 혼란기를 거치면서 군역을 비롯한 국역상의 불이익을 모면하기 위한 동족원간의 유대관계의 필요성에서 연유한 것으로, 그때까지 변화되어 온 가족제도의 새로운 양상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한편 조선전기 이래의 농업기술의 향상에 힘입어 집약농업의 상징인 수전농업이 농업의 주축을 이루는 국면이 대체로 17세기경부터 전개되자, 단위면적당 더 많은 노동시간을 요하게 되어 동족원간의 농업노동상의 협동이 불가피해졌다. 또한 동족촌 발달의 물질적 기반이 토지에 있었으므로 보다 많은 토지를 획득하여 동족의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관료사회로의 진출이 필수적이었던 만큼 관료진출자를 양성하기 위해서 학계(學契)가 조직되기도 하였다. 이 밖에도 선조에 대한 봉사(奉仕)와 선산(先山)의 관리기능 등이 중요시되어 이와 관련된 문중조직이 결성됨으로서 동족적 응집현상이 더욱 현저해졌다. 따라서 촌락공동체적 생활이 영위되는 새로운 사회조직의 구현으로서의 우리나라 동족촌은 17세기 이래 본격적으로 발달하기 시작한 것으로 사료된다.

이와 같은 동족원 상호간의 일상적 생활에서의 협조, 유대관계가 이루어지는 지역적 범위는 대체로 자연부락이나 조선후기부터 편제되어 온 행정적 리(里)에 해당된다. 이러한 동족촌은 1930년대에 100호를 초과하는 비교적 큰 규모의 경우 주로 영남과 호남 지방에, 특히 진주·안동·대구·나주 지역에 집중적으로 분포하였다. 이는 조선후기 중앙정부의 감시가 덜 미치는 격리된 지역에서 토지집적의 가능성이 더 컸었던 점에 기인한 것 같다.

강릉 지역에도 김(金)·최(崔)·박(朴)·함(咸)·곽(郭)씨 등 토성집단이 일찍이 형성되어 왔다. 그 중 김씨와 최씨가 대표적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 두 성씨는 이 지역에서 여러 측면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해왔으므로 모두 검토해야 하겠으나 지면의 한계 때문에 강릉김씨를 사례로 간단히 언급하고자 한다.

강릉김씨는 통일신라기에 명주군왕이었던 김주원(金周元)으로부터 비롯된다. 세대를 거듭하면서 여러 파로 나뉘어져 왔으나 여기서는 부정공파(副正公派)의 종손인 김동석(金東錫)이 거주하는 성산면 금산리의 경우를 살펴본다.

강릉김씨금산리 최초 정착이 통일신라기라고 해서 이 시기를 바로 이 동족촌의 형성시기로 간주할 수 없다. 그 이유는 앞서 살핀 바와 같다. 시조인 명주군왕과 관련된 장소는 금산리 장안동, 그리고 25세인 설(說)과 관련된 곳은 장안동 서쪽의 산록이라고 하는데, 25세부터 이곳에서 세거해온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므로 대체로 17세기부터 18세기에 걸쳐 여기서도 동족촌이 이루어진 것으로 봄이 타당하다.

이 마을은 정봉(鼎峰)[158m]의 남쪽사면과 남대천에 의해 형성된 충적지의 접촉부인 산록에 위치한다. 가옥들이 작은 곡지나 산록에 입지한 것은 우선 봄철의 심한 서풍과 집중호우시의 홍수피해를 피하기 위한 것으로 보여진다. 마을 앞에는 충적지가 남대천의 북안을 따라 발달되어 있기 때문에 대부분 논으로 개간되었고, 전체적으로 밭 면적은 논 면적에 비하여 협소하다.

문중 소유지는 금산리에 가장 많았지만, 위촌리·운산리·산북리·신석리 등에도 분산되어 있었다. 그러나 해방 후 농지개혁이 시행되면서 크게 축소되었다고 한다. 이 동족촌에서는 동족원 상호간 지주·소작제가 행해졌고, 긴밀한 유대관계를 상징하듯 20세기 중기까지도 연중 모내기와 추수시에 각각 한 번씩은 종가를 위해 노동력을 제공해왔다고 한다. 1930년대 이 마을의 전체 약 100가구 중 동족가구수는 80% 정도를 차지하였고, 1970년까지는 50% 정도, 그리고 최근에는 약 200가구 중 30가구 정도로 감소되어 왔다고 한다.

이 마을의 상징적 경관요소는 종가와 그 안의 사당, 임경당 건물이 있다. 그러나 산소들은 종가에 근접하지 않고 문중산이 있는 내곡동 심복사지 부근, 오봉리·관음리·위촌리 등에 분산되어 있다. 그리고 시조인 명주군왕릉보광리 신왕동에 있는데, 이는 음택풍수 및 문중산의 위치와 관련이 있는 듯하다.

그리고 대표적인 시제는 음력 3월 29일, 9월 15일, 9월 25일에 행해지며, 벌초는 음력 8월 1일에 이루어진다. 또한 시조의 시제는 삼왕동 능소에서 음력 4월 20일에 거행되는데, 강릉김씨 대종회에서는 모금을 하여 강릉 시내에 매월당 회관을 건립함으로써 동족원 상호간의 유대를 계속 유지해나가려고 한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1.12.21 2011 한자 최종 검토 대동행렬자(大同行列字)의 사용과, 파보(波譜)의 간행이 ->대동항렬자(大同行列字)의 사용과, 파보(派譜)의 간행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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