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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302868
한자 義湘
영어음역 Uisang
분야 종교/불교,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종교인
지역 강원도 강릉시
시대 고대/삼국 시대/신라
집필자 최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승려
아버지 한신(韓信)
성별
생년 625년(진평왕 47)연표보기
몰년 702년(성덕왕 1)연표보기
법명 의상(義湘)

[정의]

신라시대의 승려. 우리나라 화엄종의 개조(開祖).

[가계]

속성(俗姓)은 김씨(金氏), 아버지는 김한신(金韓信)이다.

[생애]

644년(선덕여왕 13), 19세 때 경주 황복사(皇福寺)에서 승려가 되었다. 661년(문무왕 1) 해로(海路)로 당나라에 가서 지엄(智儼)의 문하에서 화엄종을 연구하고 671년에 귀국했다. 676년(문무왕 16) 왕명에 따라 부석사(浮石寺)를 짓고 화엄종을 강론, 해동(海東) 화엄종의 창시자가 되었다.

중국으로 가기 위하여 원효(元曉)와 함께 요동(遼東)으로 갔으나, 고구려의 순라군에게 잡혀 정탐자로 오인 받고 수십 일 동안 잡혀 있다가 돌아왔다. 10년 뒤인 661년(문무왕 1) 귀국하는 당나라 사신의 배를 타고 중국으로 들어갔다.

처음 양주(揚州)에 머무를 때 주장(州將) 유지인(劉至仁)이 그를 관아에 머무르게 하고 성대히 대접하였다. 얼마 뒤 종남산 지상사(至相寺)의 지엄(智儼)을 찾아갔다. 지엄은 전날 밤 해동(海東)에 큰 나무 한 그루가 나서 가지와 잎이 번성하더니 중국까지 이르렀고, 그 위에 봉황의 집이 있어 올라가 보니 한 개의 마니보주(摩尼寶珠)의 밝은 빛이 멀리까지 비치는 꿈을 꾸었다고 하면서, 의상을 특별한 예(禮)로 맞았다.

그곳에서 『화엄경』의 미묘한 뜻을 은밀한 부분까지 분석하였다. 당나라에 머무르며 지엄으로부터 화엄을 공부한 것은 8년 동안의 일이며, 나이 38세로부터 44세에 이르는 중요한 시기에 해당한다.

[활동사항]

『삼국유사(三國遺事)』의 기록에 따르면 의상의 귀국 동기는 당나라 고종(高宗)의 신라 침략소식을 본국에 알리는 데 있었다고 하며, 『송고승전』에는 화엄대교(華嚴大敎)를 펴기 위한 것이었다고 하였다.

『삼국유사(三國遺事)』 낙산이대성조(洛山二大聖條)에 의하면, 의상은 당나라에서 귀국 직후 양양 낙산에 관음보살의 진신이 해변의 굴 안에 산다는 말을 듣고 재계(齋戒)하여 기도드린 지 14일 만에 관음보살을 친견하였다고 한다. 또한 좌상(座上)의 산꼭대기에 한 쌍의 대나무가 솟아날 것이니, 그 땅에 불전(佛殿)을 지으라는 관음보살의 교시에 따라 절을 지은 것이 곧 낙산사(洛山寺)이다.

신라로 돌아온 그 해에 낙산사의 관음굴(觀音窟)에서 관세음보살에게 기도를 드렸다. 이때의 발원문인 「백화도량발원문(白花道場發願文)」은 그의 관음신앙(觀音信仰)을 알게 하여주는 261자의 간결한 명문이다.

그 뒤 676년(문무왕 16) 부석사(浮石寺)를 세우기까지 전국의 산천을 두루 편력하였는데, 이는 화엄사상을 펼 터전을 마련하고자 함이었다. 그러나 귀국 후부터 제자들을 가르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674년 경주의 황복사에서 표훈(表訓)·진정(眞定) 등의 제자들에게 『화엄일승법계도』를 가르쳤다는 것으로 보아, 부석사가 이룩되기 전부터 훌륭한 제자들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의상 이전부터 이미 우리나라에 화엄사상이 전개되어 있었지만, 화엄사상이 크게 유포되기 시작한 것은 의상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의상이 화엄대교를 전하기 위하여 건립한 사찰은 부석사를 비롯하여 중악 팔공산 미리사(美里寺), 남악 지리산 화엄사(華嚴寺), 강주 가야산 해인사(海印寺), 웅주 가야현 보원사(普願寺), 계룡산, 갑사(甲寺), 삭주 화산사(華山寺), 금정산 범어사(梵魚寺), 비슬산 옥천사(玉泉寺), 전주 모악산 국신사(國神寺) 등 화엄십찰(華嚴十刹)이다.

이 밖에도 불영사(佛影寺)·삼막사(三幕寺)·초암사(草庵寺)·홍련암(紅蓮庵) 등을 창건한 것으로 전하여 온다. 이 모든 사찰들이 모두 의상에 의하여 창건되었다고 믿기에는 문제가 있으나, 의상과 그의 제자들에 의하여 건립되었음은 틀림없다.

또, 의상의 교화활동 중 가장 큰 업적은 많은 제자들의 양성이었다. 그에게는 3,000명의 제자가 있었고, 또 당시에 아성(亞聖)으로 불린 오진(悟眞)·지통(智通)·표훈·진정·진장(眞藏)·도융(道融)·양원(良圓)·상원(相源)·능인(能仁)·의적(義寂) 등 10명의 제자가 있었다. 이 밖에도 『송고승전』에 이름이 보이는 범체(梵體)나 도신(道身) 등이 의상의 훌륭한 제자들이었다. 이들은 항상 스승을 모시면서 화엄학을 수학하였다.

의상은 황복사에서 이들에게 『화엄일승법계도』를 가르쳤고, 부석사에서 40일간의 법회를 열고 일승십지(一乘十地)에 대하여 문답하였으며, 소백산 추동(錐洞)에서 『화엄경』을 90일간에 걸쳐 강의하였다. 제자들이 도움을 청하여 물어올 때에는 그들의 마음이 조용히 가라앉을 때를 기다려 의심나는 점을 풀어서 계발(啓發)해 주었다.

[학문과 사상]

지엄은 중국 화엄종의 제2조(第二祖)로서 화엄학의 기초를 다진 인물이며, 그가 의상에게 기울인 정성은 지극한 것이었다.

의상이 터득한 화엄사상은 넓고도 깊이 있는 것이었다. 이것은 그가 남긴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를 통하여서도 충분히 입증되고 있다. 또, 당나라에 머무르는 동안 남산율종(南山律宗)의 개조 도선율사(道宣律師)와도 교유하였다.

특히 당시의 동문 현수(賢首)와의 교유는 신라로 돌아온 뒤에도 끊이지 않고 계속되어, 현수는 의상에게 그의 저술과 서신을 보냈고, 의상은 현수에게 금(金)을 선물하였다. 현수는 의상보다 19세 연하였는데, 지엄이 죽은 뒤 중국 화엄종의 제3조가 된 인물이다.

지통의 『추동기(錐洞記)』, 도신의 『도신장(道身章)』 등은 의상의 강의를 기록한 문헌들이다. 『법계도』를 배울 때 ‘부동한 나의 몸이 곧 법신 자체의 뜻이다[不動吾身 卽是法身 自體之義]’라는 데 대한 해석을 듣고 표훈진정이 각각 『오관석(五觀釋)』·『삼문석(三門釋)』을 지었던 것으로 미루어 의상의 제자들이 매우 창의적으로 공부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의상이 제자들에게 화엄학을 가르치고 있을 때 이 소문은 전국에 퍼졌고 중국에까지 전해졌다. 문무왕은 이에 감사하여 장전(莊田)과 노복(奴僕)을 베풀어준 일이 있었다. 그러나 우리들의 법(佛法)은 지위의 높고 낮음을 평등히 보고, 신분의 귀하고 천함을 없이하여 한 가지로 합니다. 『열반경』에는 여덟 가지 부정한 재물에 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어찌 내가 장전과 노복을 소유하겠습니까? 빈도는 법계(法界)를 집으로 삼아 발우를 가지고 밭갈이를 하며 익기를 기다립니다. 법신(法身)의 혜명(慧命)이 이 몸을 빌려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 이야기는 중국에까지 전하여져 『송고승전』에 기록되어 있다. 또 『송고승전』에는 그의 인품에 대하여 “의상은 설한 바와 같이 행함을 귀하게 여겨 강의를 하는 일 외에는 수련을 부지런히 하였다. 세계와 국토를 장엄하여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꺼리는 일이 없었다. 또 언제나 의정(義淨)의 세예법(洗穢法: 더러움을 씻는 법)을 좇아 실행하여 어떤 종류의 수건도 쓰지 않았으며, 시간이 되어 그냥 마르도록 내버려두었다. 또, 의복과 병(甁)과 발우의 세 가지 외에는 아무것도 몸에 간직하지 않았다.”라고 하였다.

또, 문무왕이 어느 때 경주에 성곽을 쌓으려고 관리에게 명령한 일이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의상은 “왕의 정교(政敎)가 밝다면 비록 풀언덕 땅에 금을 그어서 성이라 하여도 백성이 감히 넘지 못하고 재앙을 씻어 복이 될 것이오나, 정교가 밝지 못하다면 비록 장성(長城)이 있더라도 재해를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라는 글을 올렸다. 이 글을 보고 문무왕은 역사(役事)를 중지하였다.

[저술]

『십문간법관(十門看法觀)』 1권, 『입법계품초기』 1권, 『소아미타의기(小阿彌陀義記)』 1권, 『화엄일승법계도』 1권, 『백화도량발원문』 1권 『일승발원문(一乘發願文)』 등이 있다. 이는 당시 많은 고승들의 저술과 비교할 때 그리 많은 분량은 못 되나, 『화엄일승법계도』만으로도 깊이 있는 사상을 엿보기에 충분하다.

이 저술들은 『송고승전』의 저자 찬녕(贊寧)이 지적한 대로 『화엄경』에 나타나는 법성(法性)의 바다를 천명한 것이며, 비로자나불의 한없이 깊은 의미를 밝히는 데 그 뜻이 있다.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1.12.20 2011 한자 최종 검토 676년(문무왕 16년) 왕명에, [不動吾身卽是法身自體之義] -> 676년(문무왕 16) 왕명에,[不動吾身 卽是法身 自體之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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