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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302867
한자 義兵
영어음역 uibyeong
영어의미역 righteous army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강원도 강릉시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최호

[정의]

나라가 위급에 처했을 때 나라를 구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조직된 민군(民軍).

[개설]

한말 영국 기자인 매캔지(Frederic Arthur Mckenzie)의 「Korea’s Fright For Freedom」에서는 의병을 ‘Righteous Army(정의의 군대)’라고 하였다. 독립운동가인 박은식(朴殷植) 선생은 의병을 “義兵者 民軍也 國家有急 直以義起 不待朝令徵之發 以從軍敵愾者也(의병자 민군야 국가유급 직이의기 불대조령징지발 이종군적개자야:의병이란 민군이다. 국가가 위급할 때 즉시 의로써 일어나 조정의 명령이나 징발을 기다리지 않고서 종군하여 적과 싸우는 사람들이다.)”라고 간결하게 정의하였다.

일본은 1894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하자 그 여세를 몰아 본격적으로 조선침략을 시작했다. 이러한 가운데 일제가 침략을 하면서 저지른 일련의 조치에 대한 재야유생들이 반발을 하면서 일어난 것이 한말 의병이다. 한말의 의병은 을미의병(乙未義兵), 을사의병(乙巳義兵), 정미의병(丁未義兵)의 세 단계로 나누어 진행된다.

강릉 지방에서도 청일전쟁 이후 일제침략이 본격화되자, 민족의 생존과 민족문화의 보존이라는 절박한 상황 속에서 의병이 일어나게 되었는데, 직접 참여한 것은 을미의병과 정미의병이다.

[활동사항]

1. 을미의병(乙未義兵)

강릉의 의병활동은 의병장 민용호(閔龍鎬)가 이끈 관동구군도창의소(關東九郡都倡義所)를 중심으로 펼쳐지게 되는데 민용호가 강릉을 의병의 근거지로 삼기 위해 의병을 이끌고 들어오기 전에 이미 강릉에서도 의병활동은 있었다.

갑오동학농민운동 때 강릉은 반동학군의 본거지로서 영월, 정선, 평창 등지에서 진격해온 동학도를 물리친 경험이 있었으며, 권익현(權益顯), 심홍택(沈鴻澤) 등의 토착유생이 중심이 된 의진(義陣)이 편성돼 있었다. 이들은 문벌이나 신분제도가 타파되는 것을 막고 학문의 수구성과 유교적 전통의 질서를 지키면서 나라 보위를 위하여 친일 세력과 분연(奮然)히 맞서 싸웠다.

민용호의 의병부대는 1896년 1월 30일(음 12. 16) 강릉성 밖의 홍제평[현 홍제동]에서 강릉부의 토착의진에 글을 보내 ‘부중의진(府中義陣)’을 인정하였다. 이어 토착의병과 민용호 의병은 경무서(警務署)와 순검청(巡檢廳)을 부수고 단발령을 강요하는 등 친일 개화정책의 핵심인물로 지목돼 온 고준식(高俊植) 경무관보를 잡아 처단하였다. 여기에서 강릉에서의 의병활동이 갑오농민운동을 반대하고 위정척사를 주장하는 강릉 유림(儒林)의 성향을 반영한 실행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위정척사를 주장하다 의병활동에 뛰어든 강릉 출신의 전 현감인 황청일(黃淸一)과 강릉포군영장(江陵砲軍領將)인 김도근의 사례에서도 알 수 있다.

한편 관인(官人) 중 최범식(崔範植)·이운하(李澐夏)·최인섭(崔仁燮) 등은 의진의 참모로 받아들이고 토착세력 중 도사(都事)인 이승학(李承學), 유학(幼學)인 김노원(金魯元)·심홍택(沈鴻澤)·정규섭(丁圭燮), 감찰(監察)인 이승찬(李承燦), 영사(寧史)인 최돈익(崔燉翼)·김양선(金養善)·임익상(林翼相), 오위장(五衛將)인 김헌중(金憲仲)·김인수(金仁洙), 장사(將事)인 전치운(全致雲), 한량(閑良)인 강동오(姜東五) 등을 의진에 편성시켜 본격적인 강릉의병으로서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민용호의 관동의진은 어느 한 지역에서 의병활동을 벌이는 것이 아니라 관동에서 준비한 병력으로 관북방면으로 들어가 그곳 의병들과 합세하고 나아가 서북지방의 의병과 연합해 서울로 진공하려는 계획이었다.

이에 따라 민용호가 이끄는 관동의진은 군사(軍師)인 박동의(朴東儀)의 주장에 따라 1896년 3월 4일(음 1.21) 아침에 총병력 2,380명이 출정을 하였으니, 의병전쟁사상 최초의 전국연합의진이었다. 그러나 관동의진은 원산 공격에 실패하고 강릉으로 회군하여 전열을 수습하여 원산 공격의 재기를 노릴 수밖에 없었다. 재기를 노리던 중 새로 부임한 관찰사 서정규(徐廷圭), 참서관 조관현(趙觀顯), 중대장 김홍권(金鴻權), 맹일호(孟一虎), 이석범(李錫範) 등이 관군을 이끌고 오색령과 양양을 거쳐 연곡으로 기습 공격해오자 대공산성에서 공방전을 벌인 끝에 19명을 사로잡는 등 피해를 입혔으나 역부족으로 임계로 퇴각했다.

이처럼 4월 중순 이후 중대장 김홍권이 이끄는 관군이 강릉 지방에 파견되어 의병진압에 나서고 일본군도 민용호 부대를 끈질기게 추적하는 데다, 탄환, 화약, 양곡 등이 부족해지고 전쟁에 시달린 백성이 불만을 터뜨리는 등 의병활동이 어렵게 되었다. 이에 관동창의소(關東倡義所) 포유문(布諭文)을 영동 지역의 사림(士林) 및 일반 백성에게 보내어 모두 힘써 의병활동에 협조하여 주기를 당부하였다.

그러던 중 5월 14일 양양에서 관군의 공격을 받아 중대장 김홍권 등 80여 명을 쳐죽이는 성과를 거두었으나, 장마로 인해 강릉으로 후퇴했으며, 곧이어 벌어진 연곡전투에서 중군장 최중봉이 전사하는 큰 피해를 입었다. 그후 백두산 근처에 도착하였고, 9월 들어 의진을 해산했다.

을미사변 이후 강릉을 중심으로 한 의병활동은 유생들이 척사론(斥邪論)이나 상소문을 통해 유교의 도를 지키기 위한 현실대응책으로 실현되었다. 위정척사론은 18세기 말 이후 천주교가 유입되어 점차 만연되고 서양 열강의 선박 즉 이양선의 침입이 잦아지는 19세기 중엽에 이르면서 더욱 고양되었다. 서양세력의 침략과 그 첨병으로서의 천주교 보급은 유교적인 사회질서를 근본적으로 위협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이를 철저히 배척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이것이 효과가 없다고 판단되자 의병을 일으켜 직접적으로 항쟁을 선택한 것이다.

2. 정미의병(丁未義兵)

1907년 6월 헤이그 제2회 만국평화회의 밀사사건을 계기로 일제의 한국 식민지화가 가속화됐다. 이해 7월 고종이 퇴위하고 정미7조약(丁未七條約)이 맺어졌으며 결국 한국의 마지막 보루인 군대(軍隊) 해산령이 내려지게 되었다.

이때 군대해산을 거부해 일어난 의병이 정미의병으로, 해산 군인이 참여함으로써 의병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되었다. 뿐만 아니라 의병전술이 향상되거나 무기가 확충되고 의병구성원도 다양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강릉에서는 을미의병에 힘썼던 권인규(權仁圭)의 아들인 권종해(權鍾海)가 가장 활발한 활동을 했으며, 이러한 사실이 인정되어 1977년 건국포장이 추서됐다. 사실 권인규는 강릉 초당 출신으로 아들 권종해와 손자 권기수(權基洙) 3대가 강릉에서 의병활동에 참여하여 의병운동사상가 집안으로 불리고 있었다. 소은(巢隱) 권인규는 당시 강릉 일대에서 유명한 유학자로서 강릉 유림의 지도자였다.

권종해고종이 양위한 후에 “이제는 결사항전할 따름이다.”라고 결심을 굳히고, 1907년 군대가 해산되자 원주(原州) 병영(兵營)으로 가서 특무정교(特務正校)인 민긍호(閔肯鎬)와 의무도통(義務都統)인 이재희 및 지휘관 김덕제(金悳濟) 등과 구국운동의 전개에 대해 모의하였다. 여기서 무기 1800자루를 얻어 의병소모장(義兵召募將)이 되어 관동 일대에서 소모활동을 하며 많은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또 당시 강릉군 신리면의 김해석(金海石)도 강릉과 양양을 중심으로 의병을 소모하여 80여 명을 거느리고 고성, 회양 등에서 활동했다. 이밖에도 연곡면신인로(辛仁老)는 김용상(金龍商)의 휘하로 들어가 인제·횡성에서, 우상옥(禹相玉)은 정봉준(鄭奉俊)의 종사관으로 충청북도에서, 신리면의 정광칠(鄭光七)은 농민으로서 양양에서 김성오(金成五)의 휘하에서 활동했다. 특히 정선 출신의 최돈호(崔燉鎬)는 강릉군 구정면 용수동에서 의병 150여 명을 모아 봉기해 1907년 11월 28일 민긍호, 한갑복 등과 600여 명의 의병으로 강릉읍을 습격하기도 했다.

강릉을 비롯한 강원도의 의병활동은 1908년 후반기에서 1909년으로 넘어가면서 점차 쇠퇴하고 경상도와 전라도, 경기도의 의병활동이 커져가고 있었다.

[의의와 평가]

강릉의 의병은 위정척사(衛正斥邪: 바른 것을 지키고 사악한 것을 물리치자) 정신을 사상적 기반으로 성립하였다. 위정척사는 화이론적(華夷論的) 사상이지만, 한말에는 우리의 기존 도덕과 윤리를 바탕으로 민족문화를 수호하려는 운동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위정척사 정신은 강릉 유생들에게 구국정신으로 무장되어 대일항전(對日抗戰)을 했고 나아가 조국에 대한 충성심과 반공정신으로 승화되었다. 이렇게 의병정신을 통한 애국애족의 씨앗은 더욱 드높아져 강릉 활빈당(活貧黨) 활동, 강릉의 만세운동, 강릉농업학교독서회[항일학생운동] 등 민중운동의 원동력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1.12.20 2011 한자 최종 검토 의진(義陳)이 편성돼 있었다 ->의진(義陣)이 편성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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