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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302499
한자 驛院
영어음역 Yeogwon
영어의미역 Station Guesthouse
이칭/별칭 우역(郵驛),역관(驛館),역참(驛站)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강원도 강릉시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김경추

[정의]

역로(驛路)에 세워 통신, 숙박, 교통 기능을 담당하던 곳.

[역의 유래 및 변천]

역은 역관(驛館),역참(驛站),우역(郵驛)등 다양하게 불리며 중국의 역전제도(驛傳制度)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우리나라가 본격적인 역원제도가 실시된 것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이다. 조선시대 역의 명칭은 참(站 ),관(館), 합배(合排)등으로 불렸는데 세조 3년에 역승을 혁파하고 찰방으로 대치하다가 1535년(중종 30)에 다시 역승을 폐지하고 찰방제로 바뀌었다. 조선시대의 역로는 “역도-속역체제”로 조직되었다. 역도란 도로의 상태와 중요도 및 산천의 거리에 따라 여러 개 역을 묶어 역승 또는 찰방의 감독 아래 순찰하면서 관리하는 관할역을 말한다. 세종 때의 역도는 전국을 44역도 538속역(『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으로 조직하고, 세조 때 완성된 『경국대전』의 역도 체제는 역승·찰방 병존 체제로 전국을 41개 역도에 537개 속역으로 분속시켰다.

[역의 기능 및 구조]

조선시대에 교통, 통신 수단으로서 역참, 조운, 봉수제도가 있었는데 그중 육운 계통을 형성한 도로망이 역참으로 그것은 사회경제상의 의의를 지니는 산업도로로서의 기능보다는 군사·행정상의 기능을 가진 것이다. 역은 통신기능, 숙박기능, 교통기능을 수행함으로서 중앙집권적 통치 체제를 공고히 유지하는데 궁극적인 동맥의 구실을 한다. 역의 기능 중 가장 중요시되는 것의 하나가 전명(傳命) 기능, 즉 중앙과 지방 또는 각 군현 간의 정령(政令)을 전달하는 기능이다. 역의 두 번째 기능은 관물이나 사신의 복물(卜物) 그리고 진상, 공부 등을 운송하는 전송 기능이다. 세 번째 기능은 사객영송과 입마(立馬)의 기능, 즉 조공사신과 국내의 사신이 지방의 군현을 순행·고찰하는 것을 영송·지대하는 일이다.

고려시대의 역은 전명 계통에 의해 역역(驛役)이, 소속 읍에 의해서는 역전의 지급에 따르는 조부(租賦)가 수취되는 2원적 지배하에 있었다. 또한 역은 2-3명의 역장이 역의 관리와 운영을 자체적으로 담당하였다. 조선시대의 역은 찰방 본역과 속역으로 나눌 수 있으며 본역은 관아를 비롯한 각종 부대시설이 있고, 역리도 6방 체제를 갖추고 있는데 비하여, 속역의 경우는 역리로서의 임무를 관장하는 역장과 부장이 있고 관사가 없는 속역도 있었다. 역촌은 역의 운영, 역마의 관리, 그리고 역전의 경작 등을 위해 국가의 계획하에 설치된 관설취락이었다. 역촌의 규모는 대체로 본역의 경우 면 정도 규모로 그 내부에 7-8개 동이 포함되고, 속역의 경우는 1-2개 동리로 구성되는 소규모였다.

[강원도 역로 조직 및 찰방관할권의 변천]

고려시대의 역로조직은 변방 지역에 대한 교통·통신 관계를 신속하게 대처하기 위한 군사적인 측면의 고려가 강하게 반영된 것으로 지적된다. 전국 525개 역 중 147개 역이 개경 중심으로 서북, 동북, 강원도 연안에 분포되어 있는 것이 그것을 반증한다. 성종 이후 6과 체제에서 전국을 22역도로 조직하고 역승이 속역 525개 역을 관할하였다. 이중 강원도에 해당하는 역도는 5개이다.

고려시대의 22역도 체제가 조선시대로 이어지면서 세종 때 4군 6진 등 동·서북면 지방을 개척함에 따라 역을 신설·개편하여 전국을 44역도 538속역을 찰방·역승이 관할하는 체제가 되었다. 조선조 초에는 역승과 찰방이 병존하였으나 세조 때 찰방으로 대치되었다가 중종 이후 완전히 개편되어 찰방 체제로 변하였다. 조선조는 병조의 속기구인 승여사(乘輿司)가 중앙의 역제를 관장하는 기구였고, 지방에 있어서는 역승과 찰방을 파견하여 역을 관리하였다. 조선조 세조 때 골격이 완성된 『경국대전』에 의하면 전국을 41개 역도에 537개 속역으로 그 체제를 갖추고 조선조 후기까지 거의 변동 없이 역로 조직은 운영되었다.

고려의 5도 양계제 때에는 강원도에 5개의 역도가 만들어 졌다. 그 중심 도시는 안변, 춘천, 원주, 강릉, 회양 등이다. 또한 조선시대의 강원도 찰방역으로는 회양, 춘천, 원주, 강릉, 삼척, 양양 등으로 행정·군사상 중요한 지방 거점 도시들이고 교통의 결절점이었다. 즉 여말선초 시 시행된 계수관제 하에서도 강원도에는 강릉, 원주, 회양, 삼척, 춘천, 간성, 철원이 계수관으로서 선임고을이었고, 진관제하에서 주진과 거진이 자리 잡은 곳도 원주, 강릉, 회양, 삼척으로 주요도로의 교차점이었다. 이들 도시는 행정구역상 조선시대 군현제 하에서 도호부 이상의 지방 중심 도읍으로서 이들을 중심으로 2-3개 군현이 단위를 이루는 도읍협동권이 형성되었다.

[강원도 역로 및 역의 입지]

조선시대 역로의 입지는 『경국대전』, 『속대전』, 『증보문헌비고』를 종합적으로 고려했을 때 강원도의 경우는 서울에서 함경북도 서수라를 연결하는 관북로인 제2로 중 일부가 해당된다. 강원도는 김화-금성-회양-철령 등이 경유지의 역들이다. 이중 경기도 연천에서 강원도 평강과 이천이 연결되고, 강원도 신안역에서 추지령으로 그리고 그곳에서 다시 동해안의 흡곡과 고성이 연결된다. 또한 강원도 대부분 지역은 서울에서 원주-대관령-강릉-울진-평해까지 연결되는 관동로로서 불리는 제3로를 중심으로 많은 지선들이 모여 하나의 체계가 완성된다. 평구역에서 갈라진 후 경기도 가평에서 춘천을 거쳐 양구까지, 또한 가평에서 지금의 화천까지 연결된다. 경기도 양평에서 분기된 도로는 홍천-인제-간성까지 이르고, 양평에서 횡성까지 이르는 지선도 여기에 포함된다. 제3로 중 중심 도시인 원주에서 주천을 거쳐 영월, 평창까지, 또한 방림에서 정선에 이르는 지선들이 수지상과 유사한 역로 체계를 이룬다.

조선시대 역로는 고려시대의 것을 보완하면서 개편되었기 때문에 역로의 입지는 고려시대의 입지적 조건과 대동소이하며, 단지 관할구역이 제도적으로 바뀌었을 뿐 역로의 입지 및 방향은 변함이 없다. 근대적 교통로가 개설된 일제시대 이후의 육상 교통망인 철도망과 도로망을 상호 비교하면 그것들의 노선의 입지와 방향이 고려시대 이후에 형성된 역로와 거의 일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강원도의 경우 교통로 개설의 조건이 사회·경제적 조건이나 정치·군사적 조건보다 일찍부터 산간 침식분지나 하곡을 연결하는 지형적 조건이 절대적으로 작용했음을 알 수 있다.

『대동여지도』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나타나 있는 강릉 근처의 역들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대창역(大昌驛): 부 동쪽 5리에 있다. 안인역(安仁驛): 부 남쪽 20리에 있다. 목계역(木界驛) : 부 서남쪽 50리에 있다. 고단역(高端驛) : 부 서쪽 60리에 있다.

원(院)이란 공적인 임무를 띠고 파견되는 관리나 상인, 기타 여행자들에게 숙식을 제공하기 위해 요로에 원우(院宇)가 설치되어 있었다. 원은 공공적인 시설로서 전국 대·중·소로에 설치되어 그 기능을 담당했는데 대체로 30리마다 설치되었다.

원의 설치는 조선 초기에 원을 보완·정비하는 방법으로 인근 주민중에서 덕망있는 사람에게 원의 책임을 맡도록 하였다. 원주(院主)의 설치가 그것이다. 원주에게는 원주전(院主田)을, 대로에 위치한 원에는 1결 35부, 중로 90부, 소로는 45부씩 지급하여 원 운영에 경제적 비용을 충당하도록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원우조(院宇條)의 기록에 의하면 전국에 약 1,210개의 원이 있었다. 이 가운데 강원도의 원은 성종 때 59개소, 중종 때 64개소였으나 차츰 줄어들어 19세기 말, 20세기 초에는 20여 개로 줄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기록되어 있는 강릉대도호부의 원은 홍제원(弘濟院), 제민원(濟民院), 대령원(大嶺院), 독산원(禿山院), 인락원(人樂院), 인부원(人富院), 자인원(慈仁院), 장연원(長淵院), 무응구리원(無應仇里院), 장수원(長壽院), 대제원(大濟院), 송현원(松峴院) 등이고 지금의 강릉시 소재 원으로는 제민원과 홍제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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