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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302498
한자 歷史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강원도 강릉시
집필자 임호민

[정의]

선사 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강원도 강릉시의 역사.

[구석기 시대]

강릉 지역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시기는 선사 유적지를 통해 그 일부를 확인할 수 있다. 선사 유적지는 강릉시 연곡면 영진리·송림리, 사천면 가둔리·판교리, 강동면 안인리·하시동리, 강릉시 토성지와 지변동·교동·안현동, 옥계면 금진리 등 대부분 바닷가 호수변이나 하천 유역의 낮은 구릉 지대에서 발견되었다. 1992년 강릉 지역에서도 홍제동 일대에서 구석기 유적지가 조사, 보고되기 시작하였으며, 2000년대 들어오면서 구석기 유적지가 상당히 많이 발굴되었다.

2001년 강릉시 내곡동에서 주먹 도끼가 발견되었으며, 옥계면 도직리천남리, 초당동, 하시동리, 담산동, 옥계면 남양 3리 칠재, 옥계면 현내리, 주수리 등지에서 구석기 유적이 확인되었다. 특히 강릉시 옥계면 주수리 구석기 유적지에서는 암갈색 점토층에서 주로 석기가 출토되었는데, 비교적 소형의 석영제 몸돌과 격지가 주로 발굴되었다.

또 2014년 초 가톨릭 관동 대학교 내 아이스하키 Ⅱ경기장 건설 부지에 대한 발굴 조사에서도 다량의 구석기 유물들이 조사되었으며, 일부의 경우 석기 제작과 관련된 것으로 추정되는 유물 산포지가 조사되기도 하였다.

[신석기 시대]

강릉 지역에서 조사 보고된 신석기 시대 유적지에서는 중기 단계의 토기 편들이 다량 채집되고 있는데 동남부 지방과 중부 지방의 토기와 유사성이 있는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2000년대 들어 시굴 및 발굴 보고된 신석기 유적지로는 강릉시 강동면 정동진리 50-89번지, 담산동 군부대 사업 부지 내 유적, 두산동, 안현동 등이다. 특히 강릉 초당동 유적에서는 신석기 시대 중기 토기 편들이 다수 출토되었는데, 초당동 토기 편들은 양양 지경리 토기에 비해 더 퇴화된 양상을 보이고 있다.

또한 강릉 지변동 유적에서는 주거지는 발견되지 않았으나 토층이 6개로 구분되었으며, 그중 4층과 6층에서 신석기 시대 토기 편과 석기들이 포함된 문화층이 확인되었다. 이로써 중서부 지역 침선문계(沈線文系)[진흙에 선을 긋는 형태, 빗살무늬 계통] 토기로 시작되는 강릉 지역 신석기 문화는 태선(太線)[굵은 선] 침선문계로 볼 수 있는 삼각형 집선문(集線文), 능형 집선문(菱形 集線文)[마름모꼴 문양], 제형 집선문[사각선 문양]과 같은 강원 동남부 지역의 토기 문양 요소를 수용하는 과정으로 전환되었다.

[초기 국가 시대]

강릉 지역의 초기 국가 시대 문화는 청동기 시대 이래 초기 철기 시대를 거쳐 오면서 전승되어 온 민무늬 토기 문화를 기반으로 하고 있으며, 정착형 농경 문화가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철기 문화가 한반도 전역에서 나타나게 됨으로 농경 문화와 정착 생활은 더 확고해지기 시작하는 한편, 소국(小國)들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청동기 시대의 유적은 강릉시 포남동경포호수 북쪽의 안현동·난곡동·저동 일대의 야산 지대에서 고인돌 떼와 집자리가 발견되었으며, 연곡면방내리·송림리사천면 미노리·산대월리에서도 고인돌과 집자리가 발굴되었으며 주변의 지표에서 토기 편과 석기 편들이 다수 채집되었다.

초기 철기 시대의 유적으로는 강릉시 강동면 안인리강문동의 유적이 발굴 조사되었다. 1991년 안인리 철기 시대 유적에서 모두 33기의 초기 철기 시대 주거지 유적이 발굴, 조사되어 농업 생산의 증대에 따라 주거 생활이 장기화되고 가부장적 대가족 제도의 사회상이 전개되었던 사실을 추정할 수 있다. 이들 유적지에서 조사된 유구와 유물을 통해 이 지역에 족장 사회 집단의 연합체인 군장 사회 집단이 출현하는 시기는 초기 철기 시대로 추정하고 있다. 이 무렵 강릉 지역에 예국(濊國)이 있었다는 기록은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조선 시대의 여러 지리지를 통해 알 수 있으나 예국이 어떠한 성격의 정치·사회 집단이었는지 자세하게 알려진 바는 없다. 그러나 고고학적 성과에 다르면, 중도식(中島式) 토기 집단들은 대동강 유역에 낙랑군이 설치된 이후 낙랑군 동부도위를 통하여 낙랑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독자적인 세력으로 존속하였으며, 신라의 강원 영동지역으로의 진출 과정 이전까지 일정한 정치적 세력으로 존속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중도식 토기 문화는 한반도 철기 문화의 중심 지대인 중부 지방 철기 문화를 형성한 것으로 강릉 지역에서도 동시에 나타나는 철기 문화의 양상이다.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에 영흥만 일원에 위치하였던 것으로 기록에 전하는 동예(東濊) 사회는 강릉 지역과 무관하지 않다. 강릉 지역에는 지금도 예국성(濊國城) 터가 남아 있는데, 강릉시 옥천동 지역과 포남동이 경계를 이루는 지역으로 금학동성남동의 일원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며, 초기 철기 시대 예국(濊國)의 소군장(小君長)인 후(侯)가 거처하는 성읍으로 보기도 한다. 2014년 이 일대가 경강선(원주~강릉) 복선 전철 구간에 포함되어 발굴 조사가 진행되고 있어 발굴 결과에 따라서 많은 역사적 사실들이 새롭게 밝혀질 것으로 기대된다.

[삼국 시대]

고구려가 강성할 때 강릉 지역 대부분은 고구려의 영향권 하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소백산맥 이남의 내륙 지방과 동해안을 따라 영덕만 일대까지 고구려의 영향력이 미칠 때는 더욱 그러하였다. 이에 강릉은 313년(고구려 미천왕 14) 고구려에 흡수되어 하서랑(河西良) 또는 하슬라(何瑟羅)라고 불려졌다.

삼국이 고대 국가로 발전해 가는 과정에서 신라가 성장하면서 하슬라성 일대는 남진하는 고구려와 북진하는 신라 간의 충돌이 자주 발생한 곳이었는데, 고구려 장수왕 이후 점차 신라의 영향권으로 편입되기 사작하였다. 『삼국사기』「신라본기」 기록에 의하면, 397년(내물 마립간 42) 하슬라에 가뭄으로 인해 흉년이 들고 기근이 심하여 신라 왕이 죄수를 놓아 주고 세금을 면제해 주었다는 기록이 이를 증명한다.

6세기 중반 이후 신라가 한강 유역으로 진출하면서 이러한 현상은 더 가속화되었는데, 512년(지증왕 13) 강릉에는 하슬라주가 설치되었고, 책임자로는 이찬 이사부(異斯夫)가 군주로 임명되었다. 이때만 하여도 신라는 강원 동북 지역으로 더 진출하고자 하였으며, 이에 강릉을 군사 중심지인 거점 지역으로 활용하였던 것이다. 639년(성덕 여왕 6) 신라의 강원 동해안 지역의 군사적 충돌 지역이 강릉 이북 지역으로 더 올라갔으므로 강릉은 군사적 성격보다는 행정적 성격이 강한 하서소경으로 개편되었으며, 668년(태종 무열왕 5) 소경(小京)은 철폐되었고, 하서주(河西州)로 되었다가 757년(경덕왕 16)에 한자식 지명 사용에 따라 명주(溟州)라 불렀다.

신라 하대 강릉 지역은 호족이 강하게 형성되었던 지역이었다. 특히 김주원(金周元)이 왕위 계승 경쟁에서 밀려 이곳으로 낙향하면서부터 그 여파는 더욱 확산되었다. 김주원은 신라 37대 선덕왕(宣德王)이 죽은 뒤 왕위 계승 과정에서 김경신(金敬信)과 경쟁하다가 정치적 패배로 강릉으로 낙향한 다음 원성왕(元聖王)으로부터 명주군왕(溟州郡王)에 봉해졌다. 그리고 명주를 비롯하여 양양·삼척·평해·울진 등을 식읍(食邑)으로 받아 강릉 지역에서 독자적인 지방 세력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또 신라 하대 진골 귀족 상호간에 정권 쟁탈전이 전개되면서 각 지역에서 농민 봉기가 일어났는데, 이 과정에서 궁예(弓裔)는 원주의 양길(梁吉) 등의 세력을 규합하여 강릉으로 진출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강릉 지역은 궁예의 세력권으로 편성되었다. 궁예의 군사적 지지 기반은 신라에서 임명한 지명주군주사(知溟州郡州事) 왕순식(王順式)과 토착 세력으로 군사적 실력자인 왕예(王乂)가 중심이었으며, 이들 세력 중 일부는 궁예가 축출된 후 왕건에게 일시적으로 저항하였으나 최종적으로는 왕건의 호족 통합 정책 과정에서 고려에 귀속되었다.

[고려 시대]

936년(태조 19) 명주는 동원경(東原京)이라 개칭되었고, 관아 및 객사 역할을 하였던 임영관(臨瀛館)이 설치되었다. 940년 후삼국을 통일한 지 4년 후, 주·부·군·현의 명칭이 개정되면서 다시 명주로 부르게 되었다. 이후 983년(성종 2) 명주는 하서부(下西府)라 했다가 987년에는 명주 도독부(溟州都督府), 993년에는 다시 명주목(溟州牧)이 되었으며, 996년에는 다시 주가 되어 단련사(團練使)가 설치되었다. 995년에 화주와 명주를 합쳐서 삭방도(朔方道)라 하고, 춘주(春州)를 포함시켰다.

1178년(명종 8) 삭방도를 연해명주도(沿海溟州道)라 개칭하면서 춘주를 분리하여 춘주도(春州道)로 편제하여, 강원도를 2개의 행정 단위로 나누었다. 1261년(원종 원년) 몽고 침입 때 국왕을 보필한 공신 김홍취(金洪就)의 고향이라 하여 경흥도호부(慶興都護府)로 읍격을 승격시켰다. 그 뒤 1263년(원종 4)에는 연해명주도가 강릉도로 불리다가 1298년(충렬왕 24)에 강릉부로 되었다가 공민왕이 즉위하면서 왜적의 침입이 빈번해지자 강릉부김유(金庾)를 강릉도병마사에 임명하였다.

1356년(공민왕 5) 강릉삭방부로 개칭되었으며, 1364년에는 각 도에서 자제를 선발하여 8위(八衛)에 보충시켜 상번하게 하였는데, 강릉도의 자제들은 해당 도에 주둔케 하여 동북면을 방위하도록 하였다. 양계의 군사 지역에서 일반 행정도로 편제된 후에도 강릉 지역은 변경으로서 그 군사적 역할이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내용이다.

1388년(우왕 14)에는 강릉도에서 삭방도를 분리하고 교주도(交州道)와 합쳐서 교주강릉도로 편제하였으며, 같은 해 이곳에 전밀직상의(前密直商議) 김사형(金士衡)이 도관찰출척사(都觀察黜陟使)로 임명됨으로써 편제의 개편이 있었음을 보여 준다. 이후 1389년(공양왕 원년) 강릉대도호부로 승격하여 조선조에 이르렀다.

[조선 시대]

강원도라는 명칭은 1413년(태종 13) 전국을 8도 체제로 개편하면서 처음 사용되었다.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도 대도호부가 계속되다가 강릉도와 교주도가 통합될 때 강릉의 ‘강(江)’자와 원주의 ‘원(原)’자를 취하여 ‘강원도(江原道)’라는 도명을 정하게 되었다. 다만 강상죄 및 역모죄와 관련하여 몇 차례 읍격이 강등된 사례도 있다. 1667년(현종 8)에 박옥지(朴玉只)가 자기 부친을 생매장하는 강상죄가 발생한 데 따른 조치로 강릉은 현으로 강등되었고, 도명도 원양도(原襄道)로 바뀌었다.

1675년(숙종 1) 다시 강릉대도호부로 승격되었다. 1782년(정조 6) 대역부도(大逆不道)의 역명 사건이 일어나 강릉은 다시 현으로 강등되었고, 도명도 원춘도(原春道)로 바뀌게 되었으며, 1791년(정조 15) 강원도로 복구되고 강릉은 대도호부로 회복되었다.

조선 시대 전시기 동안 강릉의 행정 구역은 대개 현재의 강릉 지역과 평창군의 방림·대화·진부·도암·봉평·용평, 정선군 임계, 홍천군 내면, 동해시 망상을 포함하는 광역 구역이었다. 읍치는 현재의 강릉시 명주동 지역에 읍성과 함께 관아가 있었고, 읍성 밖 동쪽에 향교가 있었다. 강릉은 대도호부로 승격된 이래 세조 때에는 진(鎭)이 설치되어 2부[삼척·양양] 4군[평해·간성·고성·통천] 2현[울진·흡곡] 2영현[우계·연곡]을 관할하였다.

조선 시대 지방 통치는 군현 체제였다. 이러한 체제는 후기로 오면서 면리제(面里制)로 변화하였다. 조선 후기 강릉부 면리의 규모를 영조 때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를 통해 살펴보면 21개 면에 86개 리의 규모였다.

1524년(중종 19) 3월 19일 “강릉(江陵)의 대산(臺山) 등에 산불이 일어나 번져서 민가 244호를 태웠고, 경포대의 관사(官舍)도 죄다 태웠는데 주방(廚房)만이 타지 않았다”라고 전한다. 이 기록은 『중종실록(中宗實錄)』에 전하는데, 경포대는 관에서 관리하였던 것으로 보이고, 또 이곳을 찾는 관원과 내방객들을 위해 주방을 갖춘 관사를 별도로 두고 있었다. 이후에도 여러 번 개창 또는 개조 그리고 중수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18~19세기 강릉 지방 향유들 사이에서 발생한 칠봉 함헌(咸軒)[1508~?]을 제향한 칠봉사(七峰祠) 재건에 따른 시비, 오봉 서원(五峰 書院)의 우암 추배(追配) 시비, 하남 영당의 서원화 추진에 따른 하남재 시비 등은 사족들 간의 갈등과 반목을 초래하였다. 이러한 갈등을 봉합하는 차원에서 삼사의 서원화를 추진하였던 향유들은 향사 시설을 부 중심부와 가까운 곳에 건립 또는 이건함으로써 18세기 향촌 문제와 유사한 현상들이 후속해서 발생하였던 삼사의 서원화 추진에 따른 갈등을 봉합하고 향유들의 결집을 도모하고자 하였다.

[근대]

1. 행정 기관

1895년(고종 32) 관제 개혁에 따라 강릉대도호부가 강릉관찰부로 변경되었으며, 강릉관찰부에는 강릉·울진·평해·삼척·고성·통천·흡곡·양양 등 9개 군이 포함되었다. 1896년(고종 33)에 전국을 다시 23부 13도로 개정하면서 강릉관찰부는 강원도 소속 강릉군으로 다시 변경되었다.

1905년 통감 정치가 시작되고 지방 통제를 위하여 이사청(理事廳)을 설치하여 지방 행정의 지도 감독권을 행사하였는데 강릉의 경우 원산 이사청 관할이었다. 1906년 9월 지방 관제를 개정할 때 임계면·도암면을 정선군에, 진부면·봉평면·대화면을 평창군으로 이관하였다. 1910년 11월 16일에는 오대산 사고(五臺山 史庫)에 대한 사무를 강릉 군수가 관할하게 되었다.

2. 행정 구역

1913년 면 행정 구역 병폐합으로 북1리면, 북2리면, 남1리면을 군내면으로 병합하고, 강릉 경찰서는 강원도 경무부 춘천 헌병대 산하 경찰서로 강릉군 북1리면에 위치하여 남1리면, 남2리면, 덕방면, 북1리면, 북2리면을 관할하고 산성우리, 주문진, 구산리, 석교리에 순사 주재소를 두었다. 1914년 군내면이 강릉면으로 개칭되었으며, 1916년 북1리면, 북2리면, 남1리면을 합쳐서 강릉면이라고 하였다. 1920년 11월 1일 성남면·덕방면·자가곡면 일부가 병합되어 성덕면으로 개편되었고 하남면의 일부가 정동면에 편입되었다.

1931년 강릉면이 읍으로 승격되었고, 1938년 9월 1일 정동면이 경포면으로 개칭되었다. 1940년 11월 1일 신리면이 주문진읍으로, 1942년 10월 1일 망상면이 묵호읍으로 승격되었다. 1940년 12월 10일 강릉읍 행정 지구 면적 21.58㎢ 중에 일부인 성남동·교동·옥천동·포남동·홍제동·용강동·송정동·남문동·성내동 면적 6.54㎢에 한하여 시가지 계획 구성을 책정하고 시가지 계획가로는 대로 5개 노선, 중로 22개 노선을 지정하였으며, 토지 구획 정리 구역으로 약 4.67㎢를 결정하였다.

3. 사법 기관

1908년 1월 1일 재판소 설치법에 의해 경성 지방 재판소 강릉구 재판소가 설치되면서 형사 사건과 일반 민사 사건의 초심을 관장하였고, 강원도 관찰사가 유형(流刑) 이하의 형사 사건 초심을 직접 재판하고 민사 사건에 있어서도 관하 수령의 재판에 대한 복심을 행함으로써 재판 기관이 지방 행정 기관과 합설되어 있었고, 판사도 지방관으로 충당되었다. 그리고 경성 지방 재판소 강릉구 재판소에 검사국이 설치되었다. 관할 구역은 강릉군, 양양군, 간성군이었다.

1909년 11월 1일 통감부 재판소 설치법에 의거해 경성 지방 재판소 춘천 지부 강릉구 재판소로 변경되었고, 검사국은 경성 지방 재판소 춘천 지부 강릉구 재판소 검사 분국으로 개칭되었으며, 1910년 6월 4일에는 함흥 지방 법원 강릉 지청으로 변경되었고, 검사 분국도 함흥 지방 법원 강릉 지원 검사 분국으로 바뀌었다. 1914년 함흥 지방 법원 강릉 지청의 관할 구역은 강릉군, 양양군이었다. 1915년 12월 함흥 지방 법원 강릉 지청의 관할구역은 다시 강릉군, 양양군, 삼척군, 울진군으로 조정되었다.

4. 도시 기반 시설

1898년 1월 15일 강릉시 성내동 28번지에 농공상부령 제24호로 강릉 우편국이 개설되었다. 1906년 1월 26일 주문진읍 주문리에도 우편국이 개설되었다. 1908년 9월 5일 강릉을 비롯한 영동 지역 일대의 의병 소탕을 위해 강릉-양양 간 경비 전화를 개통하였다. 1919년 4월 5일 자혜 의원을 강원도립 강릉 병원으로 개칭하였다.

1929년 12월 10일 강릉 읍내에 전기가 공급되기 시작하였다. 1937년 4월 강릉읍 상수도 공사가 착공되었는데, 시설 용량은 1000㎥/일이었다. 1941년 12월 강릉 이동 방송 중계소가 강릉읍 교동 철도 관사 65호 자리에 개소되어 호출 부호 JBRK, 주파수 600㎑, 공중선 전력 30W로 제1방송을 처음 송출하였다.

5. 사건·사고

1938년 8월 11일 대홍수로 강릉읍, 연곡면 등지의 제방이 유실되고 전답이 매몰되었으며, 가옥은 322호가 유실되고 516호가 붕괴되었으며, 156명이 사망하고 100명이 실종되었다. 가축은 186두가 손실되었다. 강릉, 연곡, 성산, 옥계 지역에 유독 피해가 많이 발생하였다.

1942년 4월 12일 강릉읍 일대 상업 지역인 금학동, 성남동의 약 2만 9370㎡에 강풍과 함께 대화재가 발생하여 336호가 소실되었으며, 이로 인해 같은 해 5월 29일 조선 총독부는 총독부 고시 제819호에 의해 강릉 시가지 계획, 토지 구획 정리 지구를 추가 결정하였는데, 추가 지구는 강릉읍 성남동, 성내동, 금학동 일부이고 추가 면적은 6만 9000㎡였다.

6. 의병 활동

1907년 8월 13일 일본군이 강릉 진위대를 강제 해산시킴에 따라 일부는 의병에 적극 가담하였다. 이에 통감부는 1907년 8월 13일 강릉 지역 의병을 진압하기 위해 원산 주둔 일본 보병 50연대 1중대를 군함에 실어 강릉에 급파하였고, 1907년 11월 19일 윤기영(尹起榮)의 의병 약 220명이 강릉군 연곡면에서 일군과 교전하였는데, 그 전투에서 의병장 윤기영은 전사하였다.

1907년 11월 28일 의병 300여 명이 강릉 해안에서 일본군 25명과 교전하였으며, 의병 700~800여 명은 강릉 서북방 고지에서 일본군 정찰대와 교전하였다. 같은 날 의병장 민긍호(閔肯鎬)[?~1908. 2. 29]가 인솔한 의병 1,000여 명도 강릉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였다.

1908년 1월 7일 강릉군 옥계면 산계리에서도 의병 500여 명이 일본군과 접전한 후 정선 지역으로 퇴각하였다. 1908년 2월 11일에는 의병 11명이 임계 지역에서 일본군 강릉 수비대와 교전하였으나 모두 전사하였다. 1908년 5월 26일 의병 최돈호(崔燉浩) 등 80여 명이 강릉군 남방 28㎞ 지점인 옥계면 천남리 부근에서 다시 강릉 경찰서 및 수비대와 교전하여 의병 19명이 전사하였다.

7. 항일 운동

한편 일제 강점기 강릉 사람들의 항일 운동의 면면은 다음과 같다. 1919년 4월 1일, 2일, 5일 강릉 일대에서는 만세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어 다수의 인물이 체포되었다. 1923년 3월 2일 강릉 미감리 교회에서 조선 물산 장려(朝鮮 物産 獎勵) 선전 활동을 실시하였다. 1925년 2월 27일에는 강릉 성산 공립 보통학교 학생 50여 명이 일경에 의한 학생 구타 사건에 항의하여 동맹 휴학하였다.

1926년 1월 강릉 형평 분사(江陵 衡平 分社) 임시 총회를 개최하고 형평사원 모집, 형평 운동 선전, 야학 강습소 설치 등을 결의하였고, 이때 동아 일보 강릉 지국, 조선 일보 강릉 지국, 시대 일보 강릉 지국이 후원하였다. 또 1926년 4월 26일 강릉 을축 신우회(乙丑 新友會), 인우회(印友會)가 공동으로 메이데이(May Day) 기념행사를 준비하였으나 강릉 경찰서로부터 집회 금지 통고를 받았는데, 그 까닭은 순종 황제 승하를 추도한다는 이유로 집회를 개최하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1927년 11월 3일 신간회(新幹會) 강릉 지회가 설립[회원 90명, 회장 박기동(朴起東)] 되었으며, 같은 해 12월 3일 신간회 강릉 지회 설립 대회를 개최하고 예산 편성 건, 정기 대회 개최 건, 소작료 문제 등 6개 항을 결의하였다. 이듬해 1월 2일 강릉군 청년 동맹, 신간회 강릉 지회 등 6개 단체가 공동으로 강릉 사회단체 연합 신년 간친회(懇親會)를 개최하였다.

1928년 6월 3일 근우회(槿友會) 강릉 지회 설립 준비 위원회를 개최하고 준비 위원으로 김남숙(金南淑) 외 4명을 선정하였으며, 7월 26일 근우회 강릉 지회가 창립[회원 32명, 위원장 최소자(崔肅子)] 되었다. 같은 해 7월 9일 조선 청년 동맹 강릉면 지부가 창립[회원 35명, 위원장 최맹규(崔孟圭)] 되었으며, 7월 14일 강릉 청년 동맹 집행 위원회를 개최하고 재외 유학생 환영회 개최 건, 강원도 청년 연맹 대회 개최 촉진 건, 각지 학교 동맹 휴학 건 등 14개 항을 결의하였다.

1929년 2월 27일 강릉 청년 동맹 정윤시(鄭允時), 신간회 강릉 지회 이상각(李祥珏) 등 4명이 원산 총파업 격려문을 발송하였다는 이유로 강릉 경찰서에 체포되었으며, 이로 인해 같은 해 4월 15일 신간회 강릉 지회강릉 청년 동맹강릉 경찰서로부터 수색을 당하였다. 1930년 2월 2일 강원(江元) 목공 조합장 강덕상(姜德祥), 박승만(朴承萬), 김하철(金河哲) 등이 강릉에서 광주 학생 사건에 대한 격문을 살포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었다.

8. 교육 기관

1919년 6월 주문진 공립 보통학교 설립, 1920년 강릉 중앙 감리 교회에서 중앙 유치원 개원, 1920년 9월 옥계 공립 보통학교 설립, 1922년 4월 1일 강릉군 사천 공립 보통학교 설립[학생 100명], 1923년 금학동 포교당에 사립 금천 유치원을 개원하였다. 1924년 8월 15일 최형혁(崔衡奕)이 강릉군에 병산 야학(柄山 夜學)을 설립하기도 하였다.

1927년 1월 5일 황봉주(黃鳳柱) 등이 강릉군 정동면 죽헌리에 죽헌 노동 야학(竹軒 勞動 夜學)을 개설하였고, 1927년 1월 14일에는 신창서(申昌瑞)가 강릉군에 옥천 강습소(玉川 講習所)[학생 51명]를 설립하였다. 1927년 10월 5일 최돈광(崔燉侊)이 강릉군 초당에서 초당 노동 야학을 개설[학생 45명, 교장 최돈광], 1927년 10월 10일 백신영(白信永)이 강릉에서 성결교 야학(聖潔敎 夜學)을 설립[학생 25명, 교장 차진학(車鎭學)]하였다.

1928년 4월 강릉시 박월동 유지들인 최인철·최돈호·최진태·권중호 등이 발의하여 박월 개량 서숙(博月 改良 書塾)을 설립하였고, 1931년 박월 학습 강습소로 개칭하였다. 1928년 7월 1일 강릉 공립 농업 학교가 설립[학생 55명]되었다. 1938년 3월 19일 5년제 강릉 공립 상업 학교 설립 인가를 받고, 동년 4월 1일 일본인 교장 강부정치(江副政治)가 부임하였다. 4월 초순 신입생 선발에 착수하였다. 교사(校舍)는 강릉 향교 명륜당을 사용하였으며, 이해 7월 현재의 학교가 위치한 신축 교사로 이전하였다. 1940년 4월 24일 강릉 공립 고등 여학교의 입학식이 강릉 향교에서 거행되었다.

9. 사회주의 운동

1922년 9월 30일 강릉군에서 심상준(沈相駿), 정호태(鄭鎬泰) 등이 강릉 노동조합을 조직하였다. 11월 3일 강릉 노동조합 창립총회를 강릉 구락부(江陵 俱樂部)에서 개최하고, 기본금 적립 방안 등에 대한 토의를 실시하였다. 1923년 8월 18일 조선 소작인 상조회(朝鮮 小作人 相助會) 강릉 지회 창립총회가 개최되었다. 1927년 10월 15일에는 강릉군 농회에서 지주 대회를 개최하고 소작농 구제 방법, 소작 증수, 지주 대 소작인 관계 개선 등 4개 항을 결의하였다.

1930년 4월 강익선(姜益善)이 강릉에서 좌익 운동을 목적으로 농촌 야학을 개시하였으며, 5월 1일 강릉 농업 학교 권오담·권혁남·강덕선·김태선 등이 독서회를 조직하였다. 5월에 강익선이 강릉군 내 성산 공립 보통학교생 동맹 휴학을 주도하였으며, 7월 11일에는 강릉 공립 농업 학교생이 학생의 퇴학 처분에 항의하기 위하여 동맹 휴학하였다. 9월 5일에는 강릉 공립 농업 학교 2학년생들이 교장 및 교무 주임 배척을 학교 당국과 강원도청에 진정하고 동맹 휴학을 단행하였다. 8월 7일에는 강릉 공립 농업 학교 3학년생 전원이 등교를 거부하였다. 같은 해 5월 7일 강원 청년회 제2회 집행 위원회에서는 강릉 청년 연맹 회관에서 회의를 개최하고 세포 단체 조직 건 등 9개 항을 결의하였다.

1931년 1월 4일 강릉군 강릉읍 나무 장사 농민 300여 명이 시장세 인하를 요구하는 시위를 전개하였다. 2월 레닌 정치 학교 졸업생인 권오훈(勸五勳)이 강릉에서 사회 과학 연구회를 조직하여 사회주의 운동을 전개하였다. 11월에는 강덕선(姜德善)이 강릉에서 C.Y를 조직하였으며, 조규필이 강익선의 집에서 정명화(鄭明和) 등과 함께 레닌 정치 학교 2기 졸업생인 권오훈 등 6명과 회합하고 강릉 공산 청년 동맹 준비 위원회를 조직하였다. 12월에는 조선 공산당 재건 동맹 강릉 그룹[권오훈, 강익선(姜益善)] 주도하에 나무 장사 세금 징수 반대 운동을 전개하였다.

1932년 1월 강릉 적색 농민 조합(江陵 赤色 農民 組合)이 강릉군 구정면 신탄[연료] 수수료 반대 운동을 전개하면서 농민 300여 명이 군청을 습격하였다. 1932년 4월 10일 강익선·권오훈·정인화·홍광준 등이 강릉 공산당을 결성하였다. 6월 국제 공산당 계열인 조선 공산당 재건 동맹 강릉 그룹이 정동면 유천리의 농민 야학교에서 연극 공연 중 발각되어 다수가 체포되었으며, 10월 야학 사건으로 구속된 강익선 외 2명에 대한 공판에서 징역 1년이 구형되었다.

1935년 3월 25일 최종만(崔鍾萬), 이봉길(李奉吉) 등이 학생 독서회 조직 혐의로 강릉 경찰서에 체포되었다. 1936년 4월 13일 함흥 지방 법원은 조선 공산당 강릉 공작 위원회 재건설 사건 관련자 최종성(崔鍾聲) 등 9명에게 징역 1년 6개월에서 4년을 선고하였다.

[현대]

1. 행정 구역

1) 변천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후 강릉의 행정 편제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1945년 11월 양양군 현남면과 현북면, 서면 일부를 강릉군에 편입하였다가 1954년 10월 「수복 지구 임시 행정 조치법」 시행에 따라 현북면과 서면을 양양군에 편입하였다. 당시 강릉군은 강릉읍, 주문진읍, 묵호읍, 성산면, 왕산면, 구정면, 성덕면, 강동면, 옥계면, 경포면, 사천면, 연곡면, 현남면의 3개 읍, 10개 면, 196개 리가 있었다.

1955년 9월 1일 강릉읍과 경포면, 성덕면이 병합되어 강릉시로 승격하였다. 당시의 강릉시 행정구역은 38개 동 489개 반이었다. 이와 동시에 강릉군이 명주군으로 개칭·분리되었다. 1963년 현남면이 양양군으로, 왕산면의 남곡리와 구절리가 정선군에 편입되었으며, 1980년 4월 묵호읍이 동해시에 편입되었고, 이후부터는 자치 단체 조례에 의해 자치 단체 범주 내의 읍·면·동 간의 구역 조정만 이루어졌다.

1983년 2월 명주군 구정면 언별리강동면으로, 구정면 산북리가 성산면으로, 연곡면 방내리 일부가 주문진읍으로 각각 편입되었다. 10월에는 강릉시 남문동성남동을 통합하여 중앙동으로 개칭하고, 교동교 1동교 2동으로 분동하였다. 1989년 1월 명주군 강동면 운산리를 월호평동에 편입하고 운산동으로 개칭하였다.

강릉 시가지의 간선 도로망이 갖추어지는 것은 1970년대이고 오늘날과 같은 시가지가 형성되는 것은 1980년대에 이르러서였다. 1990년대에 이르면 강릉은 전통적 모습은 거의 사라지게 되었으며 현재적 시가지로 바뀌었다. 이 시기에는 시가지 중심부에 위치했던 공공시설들이 외곽 지역으로 이전하면 시가지 확대가 이루어졌다.

1992년 강릉시와 명주군의 행정 구역은 강릉시가 19개 행정동 238통, 1,207개 반, 114개 자연 마을로 구성되었고, 명주군은 1개 읍, 7개 면, 65개 법정리와 139개 행정리, 803개 반, 441개의 자연 마을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와 같은 행정 체계가 1995년 1월 1일 「도농 복합 형태의 시 설치 등에 관한 법률」에 의거 강릉시와 명주군이 통합하여 새로운 강릉시로 발족하였다. 통합 강릉시 출범 이래 강릉은 남대천 정비 사업, 과학 단지 조성 사업, 신주거 타운인 솔올 지구[일명 교동 택지] 건설, 시가지를 중심으로 원활한 교통 체계와 도시 기반 시설의 확충 사업, 농어촌 주거 환경 개선 사업, 도심지 문화 관광지화를 위한 사업 등을 추진하였다.

1995년 도농 통합 강릉시가 출범하면서 같은 해 3월 2일 강릉시 포남동이 1동과 2동으로 분리되었으며, 1997년 2월 1일 옥천동 일부를 성남동에, 포남동 일부를 옥천동초당동에, 옥천동·입암동·초당동·송정동 일부를 포남동에, 입암동·병산동·학동 일부를 월호평동에, 견소동 일부를 병산동에 각각 편입시키는 행정 구역 조정이 단행되었다.

1998년 10월 1일 강릉시 중앙동임당동중앙동으로, 장현동·노암동·월호평동강남동으로, 입암동두산동성덕동으로, 유천동·죽헌동·운정동·저동경포동으로 통합하였다. 2001년 강릉시 명주동에 있던 강릉시청을 철거하고 강릉시 홍제동 1001번지에 18층 청사로 이전하였다. 2006년 12월 17일 강릉시 월호평동 일부를 학동에 편입시켰으며, 2007년 12월 26일 금학동 일부와 임당동 일부를 옥천동에 편입시켰다.

2009년 1월 4일 강릉시 성산면 금산리 일부[강릉 영동 대학]를 홍제동에, 같은 해 12월 23일 사천면 방동리 일부를 대전동에, 대전동 일부를 사천면 방동리로 편입시키는 행정 구역 조정이 이루어져 현재에 이르고 있다.

2) 현황

총면적은 1995년 강릉시와 명주군의 통합으로 2013년 말 현재 1,040.4㎢로 강원도 1만 6873.5㎢의 약 6.2%를 차지하고 있으며, 인구 밀도는 1㎢당 208.4명[2013년 말 기준]이며 강원도 평균 인구 밀도 91.4명보다 2.3배 정도 높으며, 강원도 내 타 시군과 비교하면, 속초시[786.8명], 동해시[528명], 원주시[372.3명], 춘천시[245.8명]에 이어 5번째로 인구 밀도가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강릉시는 전체 면적 중 임야가 80.6%, 밭이 5.0%, 논이 5.1%로 구성되어 있어 산지를 제외한 이용 가능 지역은 상당히 적어 도시 성장의 제약이 되고 있다. 행정 구역은 2013년 말 현재 1읍, 7면, 13행정동[39법정동], 146행정리[65법정리], 327통 2,658반과 자연 마을 533개로 구성되어 있다. 2014년 12월 말 기준 강릉시의 인구는 9만 3007가구에 21만 5807명이다.

2. 생활·경제·문화 기반 구축 사업

2002년 태풍 루사와 이듬해 태풍 매미로 인해 막대한 경제적, 인적 피해를 입은 강릉시는 자연재해 방재를 위한 기본 계획을 수립하여 시행하였는데, 오죽헌 일대 저류지 조성, 남대천 생태 하천 복원, 도심 지역의 하수관거 교체 사업 등을 통해 시민들의 안정적인 생활 기반 구축 사업을 추진하였다. 그리고 옥계 일대에 일반 산업 단지를 조성하여 포스코 마그네슘 제련 공장을 유치하여 신소재 산업 활성화를 통한 강릉시 경제 기반 구축을 추진하였으며, 이러한 사업 지역은 동해안 자유 경제 구역에 포함되어 앞으로 많은 변화가 예상된다.

친환경 녹색 도시 건설에도 많은 예산과 정성이 투입되었는데, 경포호수 복원과 생태 환경 개선 사업이 추진되었으며, 녹색 체험 센터 건설을 통해 녹색 도시로서의 위상도 강화시켰다. 또 도심지 역사 문화 자원 복원 사업 추진 성과도 완성되어 구 강릉시청을 이전한 곳에 대한 전면 발굴 조사를 통해 조선 시대 강릉 관아 시설을 복원함으로써 전통문화 도시라는 이미지를 크게 향상시켰다. 특히 2005년 강릉 단오제가 유네스코 무형 문화유산으로 등재되면서 단오 문화 창조 도시 조성 사업을 진행하고 있어, 향후 강릉시는 전통문화 도시, 친환경 녹색 도시, 신소재 산업의 메카 도시 등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들을 점차 다져가고 있다.

3. 2018 동계 올림픽 동반 개최지로서의 강릉

2018년 동계 올림픽 개최지로 평창과 함께 선정되면서, 강릉시는 도시 문화 기반 시설 확충 및 안정적인 삶의 기반 확충을 위해 도시 재생 전략 계획을 수립하여 수행 중에 있다. 한편 2018년 동계 올림픽 유치로 인해 경강선(원주~강릉) 복선 전철 사업이 2014년부터 추진되고 있으므로, 향후 구 도심권을 남북으로 가로질러 있던 철도가 도심권에서 지하화(地下化)로 인해 새로운 도시 모습의 탄생이 예상되고 있다. 그리고 유천 지구 택지 조성과 아울러 2018년 동계 올림픽 미디어 센터 등 중요 기반 시설의 건립, 빙상 관련 종목 경기장 건설[피겨스케이팅, 쇼트 및 컬링 경기장, 남녀 아이스하키 경기장, 스피드 스케이트 경기장] 등이 강릉시 올림픽 특구 지역 내에서 건설 중에 있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7.08.16 일부 서술 수정 강릉-원주 간 복선 전철 → 경강선(원주~강릉) 복선 전철
2011.12.18 2011 한자 최종 검토 박옥기(朴玉只)가 ->박옥지(朴玉只)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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