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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302446
한자 楊士彦
영어음역 Yang Saeon
이칭/별칭 봉래(蓬萊),완구(完邱),창해(滄海),해객(海客)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강원도 강릉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박도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활동 시기/일시 1571년연표보기
성격 문신|서예가
아버지 양희수(楊希洙)
어머니 송환정(宋環貞)의 딸
양사준(楊士俊)
아우 양사기(楊士奇)
아내 박씨(朴氏)|이시춘(李時春)의 딸
성별
생년 1517년(중종 12)연표보기
몰년 1584년(선조 17)연표보기
본관 청주(淸州)
대표관직 부사(府使)

[정의]

조선 중기의 문신·서예가.

[가계]

본관은 청주. 자는 응빙(應聘), 호는 봉래(蓬萊)·완구(完邱)·창해(滄海)·해객(海客). 주부인 양희수(楊希洙)의 아들이다. 조선 중기에 문명을 떨쳤던 양사준(楊士俊)이 형, 양사기(楊士奇)가 아우이다.

[생애]

1546년(명종 1)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대동승(大同丞)을 거쳐 삼등현감(三登縣監)·평창군수(平昌郡守)·강릉부사(江陵府使)·함흥부윤(咸興府尹) 등 8고을의 수령을 지냈다. 안변군수(安邊郡守)로 있을 때에는 북변의 병란이 일어날 것에 대비하여 마초를 비축하였는 등 선정을 펼쳐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 그러나 지릉(智陵)의 화재에 대한 책임을 지고 해서(海西) 지방으로 귀양갔다가 2년 뒤 돌아오는 길에 병사하였다.

[활동사항]

1571년(선조 4)에 강릉부사가 되었는데, 그때 마침 큰 흉년이 들자 주민들을 구휼하였다. 또한 날마다 강릉 유생들과 경사(經史)의 어려움을 논의하고 시문을 가르치는 데 힘을 쏟았다. 강릉향교를 넓혀 하나같이 경성(京城)의 제도를 받아들여 시행하니 고을 사람들이 선정비를 세웠다.

[작품]

시문에 능해 이름을 떨쳤다. 가사에 어떤 여인의 아름다움을 읊은 「미인별곡(美人別曲)」과 을묘왜란 때 남정군에 종군하고 읊은 「남정가(南征歌)」가 있다. 시조에 「태산이 높다 하되」가 있으며 문집으로 『봉래집(蓬萊集)』이 있다.

서화에도 능하였다. 회화작품으로는 『양봉래매난국죽화첩(楊蓬萊梅蘭菊竹畵帖)』이 있다. 또한 해서와 초서로도 이름이 높아 조선전기 이래 안평대군(安平大君)·김구(金絿)·한호(韓濩)와 함께 4대 서예가로 불렸다. 회양군수로 있을 때는 금강산에 자주 가서 경치를 감상하였는데, 금강산 만폭동(萬瀑洞)의 바위에 ‘봉래풍악원화동천(蓬萊楓岳元化洞天)’이라는 글씨를 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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