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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지구 포병 전공비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301852
한자 江陵地區砲兵戰功碑
영어음역 Gangneung Jigu Pobyeong Jeongongbi
영어의미역 Memorial Monument for Gangneung Artillerymen
이칭/별칭 사천 삼용사비,제18포병전적비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유적/비
지역 강원도 강릉시 사천면 덕실리 산 22번지지도보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흥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기념비
양식 기념비
건립시기/연도 1991년 12월 11일연표보기
관련인물 한국전쟁시 제18포병대대 중사 최서종|하사 한명화|일병 심우택
높이 10.8m
비두재질 화강석
비좌높이 1단 30㎝|2단 40㎝|3단 150㎝
비좌재질 화강석
높이 8.6m
비신재질 화강석
비문찬자 이진삼[육군 참모총장 대장]|이형근[역대 8사단장 회장]
비문서자 박창암 장군|노정 박상찬
소재지 주소 강원도 강릉시 사천면 덕실리 산 22번지
소유자 강릉시

[정의]

한국전쟁 당시 강릉지구 전투에 참전한 18포병 대대와 삼용사의 전공을 기리는 전쟁기념비.

[개설]

강릉시 사천면 미노리 사천초등학교 일대는 한국전쟁의 격전지였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6월 26일 38선 인근에 강릉 8사단 병력을 투입하였으나 6월 27일에는 현남까지 밀려 내려왔다.

강릉 8사단 제18대대는 105밀리 포 5문을 사천면 노동하리 지역에 배치하였다. 석교2리 뒷산에 관측소를 설치하고 당시 장경석 대대장을 중심으로 사력을 다하여 주문진 북방을 향해 지원 사격을 가하였으나 아군은 주문진 이남까지 밀려 내려왔다. 18대대 장병들은 다시 105밀리 포를 사천초등학교로 이동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가래골 뒷산의 관측소와 연곡천을 사이에 두고 국군과 북한군이 대치되어 사력을 다한 전투를 개시하였다. 18대대는 사천초등학교 운동장과 덕실리 앞에서 맹렬한 지원 사격을 계속 가하였다. 그러는 동안 북한군은 육지를 포기하고 경포, 강문 쪽으로 돌아 상륙하여 삽시간에 사천 쪽으로 밀어닥쳤다. 국군은 계속 패하는 상황에서 바다 쪽을 헤아릴 틈이 없었던 것이다. 북한군이 사천면 이남으로 넘어왔으니 18대대 장병들은 더 이상 움직일 수가 없었다.

밤이 되기를 기다려 18대대 장병들은 사천초등학교 뒷산에 올라가 육박전을 하였으나 그들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전멸되다시피 패배를 당하였으니 여기저기 나뒹굴어 피아간의 시체가 말할 수 없이 많아 동리 주민들은 며칠 동안 시체를 점검하고 팻말을 부착하고 매장하였으나 당시 수백 구의 시체 중에서 몇 구의 시체는 찾는 사람이 없었다. 그 당시 18대대에는 월남한 장병들이 많았기 때문에 여기저기 팻말도 없이 무명용사로 남게 된 것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사천의 유지들이 회의를 열고 사천초등학교 뒷동산 임간 교실 위쪽에 이름 모를 국군의 시신 3구가 묻혔던 자리에 ‘용사의 묘’를 기념하도록 하고 당시 전쟁사에 기록해 줄 것을 전사편찬위원회에 특별히 청하였다. ‘자라는 어린 새싹들에게 멸공 교육의 귀감(표본)이 되게 하자.’는 의미에서 당시 뜻있는 인사들의 주선으로 무명용사 비석을 건립하고 매년 추모식을 갖게 되었다. 이것이 한국전쟁 격전지의 무명용사 묘이다.

때마침 사천초등학교가 전국 새마을 시범학교로 알려져서 전국의 교장시찰단에게 공개되자 무명용사의 묘는 이곳을 찾는 교육 관계자들의 심금을 울리게 되었다. 그 뒤 18대대 전우회에서는 이 사실을 알고 “우리가 이곳을 찾아서 다시 복원하여 비문을 건립하고 과거를 되살려 다시는 이런 비극이 없게 하여야 할 것이다.”라고 하며 장렬하게 싸우던 당시의 기억을 되살려 무명용사의 이름을 찾아냈다. 그들이 바로 중사 최서종과 하사 한명화, 일병 심우택이다. 중사 최서종은 지휘통신 선임하사로 적진으로 유선 철수 중 전사하였다. 하사 한명화는 관측하사로 미노리 능선에서 관측 임무 수행 중 전사하였다. 일병 심우택은 운전병으로 백병전 상황에서 포차로 진지 이탈 중 전사하였다.

[명칭유래]

무명이었던 3용사의 이름이 밝혀지고 ‘사천삼용사비’로 사천초등학교 뒷산에 지역민에 의해 처음 건립되었다가 새로이 건립추진위원회가 구성되고 기념비 건립을 추진하면서 1991년 ‘강릉지구 포병 전공비’로 건립되었다.

[건립경위]

강릉지구 포병 전공비가 세워진 곳의 맞은편에는 김동명 시비가 있는 곳이다. 11년 간 추진 끝에 당시 권영일 명주군수를 건립추진위원장으로 하여 부지 총 800평에 국방부 지원금 1,000만 원과 각계 성금 2,150만 원, 기타 4,930만 원 등 총 공사비 8080만 원으로 건립되었다. 토목공사는 육군 제8675부대, 주탑 공사는 전북산업대 안창호 교수가 설계, 부조 및 확인을 맡았으며, 화강석 및 상징물 부착은 서울시립대 천승호 교수가 설계 및 시공을 맡았다. 전적비 주변에는 무궁화동산, 주차장 시설이 갖추어졌다.

강릉시 사천면 덕실리 사천초등학교 뒷산 한국전쟁 격전지에 주민에 의해 처음 ‘삼용사비’가 세워졌다가 1980년 6월 6일 다시 비석을 세우고 추모식을 갖게 되었으며, 1981년에는 또다시 18대대가 복원하여 오가는 이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였다. 그러다가 37대 대대장 서충일 중령 부임 후 전공비건립추진위원회가 1990년 설치되었고, 1990년 당시 명주군으로부터 부지를 기증받아 1991년 9월 3일부터 12월 7일의 기간에 건립되었다. 시공부대는 제8군단 제136공병 대대였으며 석재 시공은 동아개발이 맡았으며 1991년 12월 11일 준공되었다.

[형태]

강릉지구 포병 전공비는 전체적으로 세 개의 기둥으로 만들어졌는데 이는 삼용사의 얼을 상징한다. 전공비 주위는 육각형으로 안정감과 평화 그리고 자유를 상징한다. 육각형인 세 개의 기둥은 18포병 대대를 의미한다.

[현황]

소재지는 강원도 강릉시 사천면 덕실리 산22이며 실제 관리자는 사천면사무소이다. 건립 연도는 1991년 12월 11이며 건립 취지는 ‘18포병 대대의 빛나는 전공으로 말미암아 기동부대가 무사히 대관령으로 철수, 전열을 가다듬어 전후 작전은 물론 낙동강 방어선 구축에 기여하였으며, 지역 주민의 성공적인 철수 작전인 민·관·군 합동 작전에도 기여하였다. 특히 이 작전에서 국군용사 세 사람의 희생정신은 빛나는 것이었다. 1980년 사천초등학교 뒷산의 무명용사의 묘가 당시 전사한 3용사가 잠든 곳으로 밝혀졌다.’라고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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