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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굴산문 이전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301807
한자 闍崛山門
영어음역 Sagulsanmun
영어의미역 Sagulsan Seon School
분야 종교/불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강원도 강릉시
집필자 김흥삼

[정의]

통일신라 말기 고려 초기 구산선문(九山禪門) 중 하나.

[역사와 유래]

신라 하대 불교계의 가장 중요한 변화는 선종의 유행이다. 선종은 불교 경전(經典)에 의하여 학파를 구별하는 교종(敎宗)과는 달리 불립문자(不立文字)라 하여 문자에 의거하지 않고 선(禪)을 통하여 불성(佛性)을 깨달을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선종은 개인주의적인 경향을 띠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경향은 중앙집권적인 지배체제에 반대하여 일어나는 호족에게 독립할 수 있는 사상적 근거를 제공하였다.

선종(禪宗)은 7세기에 처음 전래되었으나 호응을 얻지 못하였다. 그 후 헌덕왕(憲德王)도의(道義)가 가지산문(迦智山門)[寶林寺]을 연 후 점차 널리 퍼지기 시작하였다. 이어 홍척(洪陟)의 실상산문(實相山門)[實相寺], 혜철(惠哲)의 동리산문(桐裏山門)[泰安寺], 현욱(玄昱)의 봉림산문(鳳林山門)[鳳林寺], 도윤(道允)의 사자산문(師子山門)[興寧寺], 범일(梵日)사굴산문(闍崛山門)[掘山寺], 무염(無染)의 성주산문(聖主山門)[聖主寺], 도헌(道憲)의 희양산문(曦陽山門)[鳳巖寺], 이엄(利嚴)의 수미산문(須彌山門)[光照寺]이 개창되어 구산선문이 성립하였다.

이들 구산문 중 사굴산문을 연 범일[810~889]의 부계(父系)는 경주(慶州)에서 파견된 명주도독(溟州都督) 김술원(金述元)의 후예로 명주 지역에서 세력을 갖고 있었다. 모계(母系)는 세헌각간(世獻角干)의 후손으로 명주에서 여러 세대 거주한 세력가였다. 범일은 851년에 경주에서 정치적 고려에 의해 지방관으로 파견된 명주도독 김공(金公)의 초빙으로 굴산사(掘山寺)에 주지하게 되었다. 이는 김헌창(金憲昌)·범문(梵文)의 난과 관련 있던 김주원(金周元)의 세력을 약화시키려는 김공이 종교세력(宗敎勢力)과 결합한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범일은 중앙정부와 대립적인 경향을 보여 경문왕(景文王)·헌강왕(憲康王)·정강왕(定康王)의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왕의 통치력이 미치기 어려운 북쪽 변방에 거주하고 있었고, 명주 지역의 반신라적(反新羅的) 성향과 선종의 개인주의적 성향 때문이다. 더욱이 중국에서 황제(皇帝)에 의해 자행된 회창폐불(會昌廢佛)과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지방관들이 불교에 대해 옹호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을 도와주었던 경험 때문에 지방관들과는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반왕적(反王的)인 태도를 취하게 되었다.

범일이 열반(涅槃)에 든 후 개청(開淸)[835~930]이 굴산문을 지켰으나 여러 차례 초구(草寇)들의 침입을 받았다. 이때 경주에서 강릉으로 이주해 온 6두품 출신인 알찬(閼飡) 민규(閔規)의 희사(喜捨)로 굴산사에서 보현산사(普賢山寺)로 옮겼다. 또 그는 신라에서 지방관으로 파견된 지명주군주사(知溟州軍州事) 왕순식(王順式)을 후원세력으로 삼았고, 그의 부하로 명주 지방의 토착세력(土着勢力)이었던 왕예(王乂)관경(官景) 등 명주의 많은 중소호족과도 관계를 맺었다. 그리고 궁예(弓裔)가 명주를 점령하기 이전부터 왕순식과 교분이 있었으며 지리적 상황으로 인하여 개청과도 관련이 있었을 것이다. 또 개청경애왕(景哀王)의 초빙에 임한 것으로 보아 신라왕실과 관계를 맺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궁예 정권 몰락 후 오랫동안 독자세력을 유지해 온 왕순식왕건에게 귀부(歸附)를 해서 개청이 그와 관련을 맺었지만 후백제(後百濟)와의 전쟁 등으로 왕건(王建)이 무관심했기 때문에 소원한 관계가 유지되었다.

개청의 도반이었던 행적(行寂)[832~916]은 범일이 죽자 삭주(朔州) 건자암(建子庵)에서 개산(開山)을 하였으나, 궁예 세력에 의해 초래된 군사적 정치적 상황 때문에 신변의 안전을 위해 아직도 권위를 갖고 있었던 신라 왕실로 가야만 하였다. 이때 진성왕(眞聖王)과 인연을 맺었을 듯하며, 특히 효공왕(孝恭王)신덕왕(神德王)은 그를 국사로 임명하여 각각 왕궁과 실제사(實際寺)에 머물도록 하였다. 이에 응하여 줄곧 친신라적인 태도를 견지하여, 범일과는 성향을 달리 하였다. 아울러 행적은 신라 왕실과 관련된 김해의 호족 소율희(蘇律凞) 형제와 왕족인 명요부인(明瑤夫人)을 단월로 삼아 후원을 받았다. 김주원계와는 반대 입장을 취했던 원성왕(元聖王)의 후손으로 행적의 제자인 양경(讓景)도 소원하나마 왕실과 인연을 맺고 있었다.

[의의와 평가]

이와 같이 나말려초 굴산문은 김주원계 뿐만 아니라 왕순식 등 여러 호족과 신라 왕실·궁예·왕건 등 정치세력과 관련을 맺고 있었다. 특히 호족들은 굴산문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면서 대관령 성황신에게 제사(祭祀)를 지내거나 미타계 등의 신앙조직, 정토신앙 등을 통하여 계층간의 결속을 도모하여 지역공동체의 일체성을 강조하였을 것이다. 이와 같은 정치세력과 교류하던 굴산문은 민의 동향을 파악하여 나말려초라는 난맥상태(亂脈狀態) 속에서 분열과 갈등을 지양(止揚)하고 화합과 화해·조화를 추구하는 종교적(宗敎的) 융회(融會)를 통해 집단의식을 고무시키려고 하였을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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