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301766
한자 烽燧
영어음역 bongsu
영어의미역 beacon fires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강원도 강릉시
시대 고려/고려 후기
집필자 김경추

[정의]

강원도 강릉시 지역에서 봉(熢)과 수(燧)로 변경의 급한 보고를 중앙에 전했던 고대의 통신 방법.

[개설]

봉수는 군사적인 목적을 띤 통신망이고, 행정 기능 중심인 역제와는 달리 양반 관료들에게 사적으로 이용되지 못하고 변경 지방이나 국경 지방으로부터 일방적으로 중앙에 연락하는 통신 방식으로서 그 특수성과 한계성을 지니고 있었다. 중국의 통신 및 교통 제도 가운데 남송의 파포제, 척후포제는 후세의 원·명·청뿐만 아니라 한국 및 주변 여러 나라에 전하여져 전체적 중앙 집권 국가 발전과 부국강병에 큰 영향을 주었다.

[연원]

우리나라의 봉수제는 이미 삼국 시대부터 존재했음을 문헌을 통해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그러나 삼국 시대의 봉수에 관한 기록은 단지 봉화와 관련된 용어를 통해서 확인 할 수 있고, 기록상으로는 고려 중기 이후이다. 이미 역제가 확립된 고려 성종~현종의 중앙 집권 과정에서 나타난 것처럼 봉수 제도도 이때 확립되었고, 의종 때는 봉수식(烽燧式) 규정의 정비가 이루어졌으며 여말 왜구의 침입이 빈번해지면서 한때 원군의 침입으로 없어진 봉수제가 다시 편성·강화되었다. 이는 조선 전기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세종 때 북방 개척과 함께 당나라 제도를 참고하여 봉수제를 확립하고 『경국대전』상의 규정으로 확정하였다. 그러나 여러 가지 원인으로 불거화(不擧火)와 중도폐절(中途廢絶)이 일어나 봉수가 그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자 선조 때 대비책으로 명나라에서 배운 파발제로 대치되었다. 그후 17세기 숙종 때 복구 변통론이 일어나 파발제와 봉수제가 조선 말까지 병행 존속되다가 1894년 갑오개혁 때 근대적 우편 제도의 도입으로 폐지되었다.

[변천]

강원도 봉수대의 총 개수와 명칭은 시대에 따라 조금씩 변동을 보이다가 19세기에 들어와 강원도 해안 지역의 간봉 봉수대는 전부 폐지되었다. 이는 외적의 침입이 잦지 않아 봉수정 설치에 소홀히 한 결과이고, 과거의 봉수정도 남으로는 경상도 영해에서 안동을 거쳐 제 2거(炬) 직봉으로 연결되던지, 북으로 안변부의 제 1거(炬)직봉에 연결되어 중앙에 연락되었다. 강원도 해안 지역 이외의 군현, 즉 지금의 영서 지역에는 단 한 개의 봉수대가 존재하지 않았고, 연락 노선도 직접 영동로와 같은 역로 방향의 것을 택하지 않고 남북으로 우회하여 전달했던 것도 군사상 중요 지역에서 제외되었음을 말해 준다.

이상 강원도 봉수대의 숫자가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상에는 48개소,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도 변동없이 세종 때의 봉수대 숫자인 48개소였으나 영조 때의 여지도서 상에는 31개소로 줄어들었다. 『대동지지』 상에서는 강원도 해안의 간봉은 모두 폐지되고 양주 아차산 봉수에서 포천, 영평, 그리고 강원도의 철원, 평강, 회양을 거쳐 함경도 안변부로 연결되는 제 1거(炬) 봉수로상의 봉수대만 존속되어 11개소의 봉수대만 남아 있었으며 『증보문헌비고』상에서도 철령 봉수의 관할 군현이 안변부로 이속된 것을 제외하고 동일한 개수가 남게 되었다. 그 외에 부분적으로 봉수대의 명칭 변경이 있는 것 외에는 큰 변동을 찾을 수 없다.

[형태]

봉수(烽燧) 중에서 홰는 대개 싸리나무 속에 관솔을 넣어서 만들고, 수는 섶나무를 태워 그 위에 이리똥이나 쇠똥, 말똥, 토끼똥 등을 태웠다.

변경 지역에서의 외적의 침입 상황을 신속히 중앙이나 가까운 본진(本鎭), 본읍(本邑)에 알려 대피나 군사적 대응을 준비케 하기 위한 군사적 기능을 하는 봉수는 그것의 절대적 입지나 봉수대와 봉수대 간의 상응 연락 노선인 봉수정(봉수로선)이 자연지리적인 조건과의 관계 속에서 어떠한 노선을 택하고 있는지를 구명하는 것은 봉수 체제 연구에서 역사적 의의만큼 이상이나 지리적으로 의미가 있다.

봉수대의 위치는 전망이 좋은 높은 산꼭대기에 있어서 오르내리며 후망(候望)의 요지가 되는 산정에 설치하는 것이 원칙이나 중국 제도를 참작하여 산꼭대기의 정상보다는 산허리에 설치하여 산을 오르내리는 데 가급적 힘이 덜 들고, 교대에 있어서도 시간이 단축되도록 하였다. 『증보문헌비고』에도 각 봉수대의 입지에 관한 내용이 몇 군데 언급되고 있다. 즉 봉수대가 서로 막혀 망볼 수 없으므로, 앞산의 봉우리는 그 형세가 가장 높고, 사면에 막힌 곳이 없으며, 그 위로는 우물도 있으므로 강화부 고을 뒤 봉수를 앞산으로 옮기자는 건의와, 북로 봉대가 바닷가에 많이 있어서 겹쳐진 봉우리와 운무(雲霧)에 가려서 봉화가 날마다 도달하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었다. 기타 산의 아지랑이와 바다의 안개가 갤 때가 없어서 봉수에 지장이 있음을 말하고 있다. 연변 봉수 중 서해안 쪽의 봉수대는 해안의 경비와 초소의 기능을 강화하기 위하여 최대한 바다와 가깝고, 해안의 감시가 용이한 위치에 봉수대가 설치되어 있다. 특히 복잡한 해안선을 갖고 있는 지형 조건에서는 육지에서 바다 멀리 길게 뻗어나가 섬과 다름없는 반도의 끝 산봉우리를 택하여 봉수대를 축조하였다. 순천 돌산도에서 시작하여 남해 서부와 서해안을 따라 서울에 이르는 제 5거(炬) 봉수 시설에서도 봉수대 입지 선정시 통망(通望) 상태를 우선하여 육지에서 그리 멀지 않은 인근의 도서 지역에 봉수대를 설치하기도 했으나 악천후시의 불편함을 줄이기 위해 가능한 대로 육지로 옮겨 설치하는 경향을 보이기도 하였다. 조선 시대 봉수정을 『대동여지도』상에서 식별하여 봉수대의 입지적 특색을 밝힌 연구에서 봉수대는 고산준령을 피하고, 해안 지역이나 낮은 산지를 택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즉 한국 지형의 평균 고도가 480m인데 비해 봉수대 지역의 평균 고도는 305m에 불과하다. 낮은 산지를 택하는 이유는 이미 언급한 것과 같이 봉군의 근무 조건도 고려한 점이 있으나, 우천시 봉군이 도보로 직접 전달하기가 쉽게 하기 위해서이다. 또한 봉수대가 해안 지역 특히 서해안 지역에 집중되어 있고, 함경도·강원도[간봉] 해안 지역은 외적의 침입이 잦지 않아 봉수정설치를 소홀히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강원도 봉수대의 입지는 해안 지역과 내륙 지역으로 나누어 그 특성을 살펴 볼 수 있다. 해안 지역은 간봉에 해당되나 내륙 지역은 제 1거에 해당되는 직봉이다. 해안 지역의 봉수대 입지는 서해안 제 5거 봉수로상의 봉수대 입지처럼 동해를 통해 침입하는 외적 및 해적(여진·반란군·왜구)을 막거나 침입 사실을 전달하기 위해 설치했기 때문에 봉수대의 위치는 바다를 향해 돌출된 지역 중 비교적 높아 후망과 상통하기에 좋은 반도부의 끝 부분 즉 곶(串)이나 그렇지 않으면 해안변의 비교적 높은 봉우리가 적당하다. 이러한 사실은 『대동여지도』와 1/50,000지형도[북한·남한·일제 강점기], 그리고 1989년 한국 보이스카우트 연맹에서 조사한 각도의 봉수대의 위치 등을 상호 비교하여 얻은 결과이다. 이들 해안 지역 봉수대의 해발 고도는 대략 100m 이내의 높이가 대부분이며 평균 고도는 82.6m로서 비교적 주위보다 높은 저산성 봉우리에 해당된다. 이런 곳을 따라 현재는 군부대의 초소나 등대 및 마이크로 웨이브 송수신 시설이 자리 잡고 있다.

내륙지역의 봉수대 입지는 해안 지역에 비해 월등히 높이가 높다. 개략적으로 200~900m 이내의 해발 고도를 보이나 평균 고도는 634.9m로 고산준령은 아니다. 조선 시대 역원제에서 역로망의 입지와 유사하게 서울에서 안변을 향해 동북-서남 방향의 노선으로 연결된다. 과거 역로가 포천-영평-금화-금성-회양-안변의 역들을 경유한데 비해, 봉수로선은 포천-영평-철원-평강-회양-안변의 노선을 따른다. 철원-평강의 추가령을 지나 신고산에서 역로, 봉수로, 철로가 만나는 지금의 경원선의 철로 노선과 3가지 노선이 거의 유사한 방향의 노선을 취하고 있다. 한편 봉수노선 가운데 강원도 내지(內地) 봉수 중 철원부 소이산(所伊山) 또는 적골산(適骨山) 중군봉 봉수는 제 1거의 직봉과 동해안으로 이어지는 지선 즉 간봉이 합쳐지는 요충지이다. 여기서 갈라지는 간봉은 평강-금성-회양을 거쳐 동으로 방향을 틀어 추지령을 넘어 통천의 해안 지역 봉수와 연결된다. 강원도 지역의 봉수를 해안 지역과 내륙지역으로 나누어 그 높이를 지형도상에서 찾아 정리하면 표-2와 같고 이들의 위치를 대동여상에서 역로와 같이 표시하면 『대동여지도』의 지도와 같다.

[현황]

현재에는 각지에 남아 있는 봉수대가 무속 신앙의 굿당으로, 등산로로, 또는 군부대의 입지 및 마이크로 웨이브 시설 등으로 원형이 파괴되고 있는 실정이어서 이에 대한 연구가 시급하다.

[의의와 평가]

봉수 제도는 조선조 500여 년 동안 국가의 신 교통·통신망으로서 그 기능을 발휘하면서 인체에 비하면 신경망 조직에 해당한, 그 당시로서는 가장 빠르고 효과적인 연락망이었다. 지금은 과학 기술의 발달로 지구촌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지만, 국토 공간상에서 통신 제도 및 통신망이 어떻게 변천해 왔는지를 파악하는 것은 우리에게 호국 의식을 심화시켜 주며 국토애를 증진시켜 주는 좋은 교육적 자료가 된다.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