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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문화의 실체인 계문화의 추이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300633
한자 共同體文化-實體-契文化-推移
영어의미역 Development of Mutual Aid Association That Forms the Core of Community Culture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강원도 강릉시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임호민

[정의]

공동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친족, 혈연, 지연, 학연, 촌락, 동문수학, 나이(동갑) 등을 매개로 결성되는 결사체.

[개설]

-‘계(契)’를 아십니까 - 강릉 지역의 전통적인 계문화

계라고 하면 ‘아줌마들’이 식당에서 벌이는 회식 자리를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다. 계모임, 계가 깨졌다, 패가망신… 이런 말부터 먼저 떠올리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목돈을 모으는 위험하고 원시적인 방식이 계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이런 사람들은, 계라는 것이 역사적으로 전통이 깊은 조직이라고 하면 놀랄지도 모른다. 더구나 전통적인 계는 여자들이 아닌 남자들, 그것도 사대부 집안의 남자들이 주로 주도했다는 사실은 더욱 생경하게 느껴질 것이다.

전통적이고 역사적인 의미에서의 ‘계’는 특수한 목적을 위해 사람들이 모인 결사체를 말한다. 그리고 그 목적과 구성인원에 따라 다양한 계가 역사 속에 존재해 왔다.

강릉에서도 예부터 친족이나 지역 주민간의 결속을 강화하는 여러 가지 형태의 결사체인 계(契)가 발달하였다.

1920년대 조선총독부에서 정리한 자료에 의하면 계는 사교계, 족계, 동계 등의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 그 기준에 따라 강릉 지역의 여러 가지 계를 간단히 정리해 보자.

강릉 지역의 사교계로는 지역적 연고와 동년배라는 기반 위에 설립된 죽장회, 지역적 연고와 동년배라는 기반 외에도 학문적 수학을 목적으로 결성된 금란반월회 등이 있다. 동계로는 강릉시 옥천동 김씨 동족촌락에 전해지는 대동계(大洞契), 강릉시 운정동 동민들이 중심이 되어 결성된 대동계 등이 있다. 족계로는 문중 단위의 문계 또는 문회가 있으며, 여러 성씨가 연합한 임영족회와 같은 족계도 강릉 지역에서 설립된 바 있다. 그리고 조선시대 강릉 지역 출신으로서 사마시에 합격한 사람들을 기준으로 해서 선현에 봉사하는 의미로 후손들이 결성한 계련당(桂蓮堂)의 모선계(慕先契)가 있으며, 지역 원로들의 공동체의식의 발로인 오성정계(五星亭契) 등도 있다. 이밖에, 같은 해에 태어난 사람들이 서로 친목을 도모하고 상호부조를 하기 위해 만드는 동갑계도 강릉 지역에서는 매우 성행한다. 학연을 중심으로 해서 결성되는 계도 상당히 성행하고 있다. 1920년대 후반에 조사된 강릉 지역의 사회단체 및 계 등에 대한 현황표를 보면 이런 상황을 대략 짐작할 수 있다.(1920년대 말 강릉 지역 각종 산업단체조합·계·회 개황 참고)

현대에 이르러서도 강릉에서는 공익 목적과 사적인 목적을 위한 다양한 결사 조직들이 유지되고 있다. 공익 목적의 모임으로는 지역 기관장의 모임인 수요회, 경포회, 마을 공동의 이익과 안녕을 위한 동계 등을 들 수 있다. 한편으로 사적인 목적의 결사체로는 족계, 동창계, 갑계, 상포계 등을 들 수 있으며, 최근에는 동일한 취미를 향유하는 사람들끼리 결성되는 동호회 성격의 모임도 많이 운영되고 있다.

그렇다면 독특한 공동체 문화와 시대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는 강릉 지역의 역사적인 계문화를 살펴보도록 하자. 먼저 지역 사회의 양반들이 형성한 사족계가 있다.

조선시대 향촌사회 재지사족들이 결성한 계가 사족계(士族契)다. 사족계는 사족 간의 결속을 도모하면서 자신들의 공통된 이해관계를 추구하는 결사체다. 강릉 지방에서는 조선 초에 이미 죽장회(竹杖會), 금란반월회(金蘭半月會) 등이 결성되었으며, 조선 후기에 이르면서 약국계(藥局契), 주춘계(住春契), 문생계(門生契), 모선계(慕先契), 취영계(聚瀛契) 등 많은 사족계가 결성되었다. 이밖에도 많은 사족계가 결성되었는데, 현재까지 발굴된 대부분의 사족계는 조선,전기보다는 후기에 조직된 것으로 판명되고 있다.

조선시대 사족계는 추구하는 목적과 관련하여 성문화된 규칙을 마련함으로써 합리적인 운영을 도모하였다. 계원들에게서 일정하게 재물을 거둬서 일정한 기금을 공유하였으며, 공유된 기금은 장리(長利)활동을 통해 증식하기도 했다. 연중 수차례의 집회를 열어 계원들 간의 결속과 친목을 도모하였으며, 집회를 통해 계칙의 운영과 개정을 논의하고 제정하면서 자신들의 이해를 관철하기 위한 갖가지 사업을 도모하였다.

사족계는 사족 즉 향촌 사회의 양반들이 구성원인 자의적인 조직이었으며, 근본적으로 신분적 질서를 요구함으로써 그 운영은 매우 폐쇄적이었다는 특성이 있다. 이런 특성은 사족계가 비록 성리학적 이념을 추구한다는 대의명분을 앞세우고 있다고 하더라도 일차적으로는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를 영속시키려는 욕구에서 기인한다. 사족계는 사족 자신들의 이해와 입지를 구축하는 기제로 작용하면서, 향촌 사회에서 보편적인 계조직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이런 사족계도 사회의 변화에 따라 그 성격이 달라져갔다. 향촌사회의 신분질서가 동요되고 이로 말미암아 향촌사회의 역학관계가 변모되면서 사족계의 조직과 운영은 점점 훨씬 폐쇄적이고 경직될 수밖에 없었고, 이로 말미암아 대부분의 사족계는 한시적으로 존립할 운명에 처했다.

다른 한편으로 사족계는 ‘상하합계(上下合契)’라는 형태를 취하면서 향촌사회의 변모된 역학구도에 조응하는 양상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비록 그랬다 해도 사족계가 자신들이 추구하였던 신분질서의 정립과 이해관계를 반영하는 성향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비록 ‘상하합계’ 형태가 향촌사회의 안정을 추구하려는 명분을 갖추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사족의 입지를 구축하기 위한 또 하나의 방편이었다. 하지만 이런 방편 덕분에 사족계는 조선말까지 존속할 수 있었을 것이다.

사족계와 달리 족계는 친족 사이에서 형성되는 계조직이다. 혈통이 같은 친족 사이에서 종문(宗門)이라는 일종의 족계를 조직하여, 공동으로 선조에게 제사를 지내고 친족에게 신분상의 변동이나 사건이 생겼다면 그 사건의 속성이나 대외적인 의의를 불문하고 정신적·물질적으로 상호부조하면서 이의 해결에 노력하는 것이다. 족계는 처음 형성된 후 자손 몇 십대에 이르는 현재에도 가족 제도의 좋은 풍습을 이어가면서 유지되고 있다. 강릉 지역에 전해지는 족계로는 각 문중 단위로 운영되는 문중계, 문회(門會), 종친계 등이 있으며, 친족관계에 있는 여러 성씨가 함께 결성하는 족계도 있다. 최근에는 강릉 지역에서 종친회를 구성하고 있는 여러 성씨가 연합하여 결성한 모임도 있다.

강릉 지방에서의 족계의 출현은 16세기 중반 이후로 추정된다. 16세기 중반 경에 결성되기 시작하여 17,8세기에 일반화되는 양상을 보인다. 족계는 부계혈연 집단을 배경으로 하는 것이며, 부계의 조선봉사(祖先奉祀)를 원초적인 목적으로 한다. 또 족계는 족보의 간행 등을 통해 족척 간 유대관계를 강화하는 형태를 띠고 있다.

족계의 한 사례를 들어 보이는 의미에서, 17세기에 결성된 임영족회를 소개해 본다. 임영족회는 강원관찰사 여우길(呂佑吉)[호는 춘호(春湖)]이 관동 지방을 순행하면서 강릉에 들렀을 때, 관찰사가 강릉 지방의 재지사족과 동원(同源)이라 하여 마련된 족회다. 강릉 지방의 재지사족들은 오랜 동안 세거하면서 각 성씨 간에 내·외족(內·外族)을 이루고 있었다. 임영족회가 성립된 계기는 여우길 관찰사와 집현전제학, 이조참판을 지낸 조은(釣隱) 최치운(崔致雲)의 장자인 최진현(崔進賢)이 모두 고령(高靈)박씨 박진언(朴眞言)의 외외손(外外孫)이 된다는 인연이었다. 특히 최씨 외에 일부 토성과 다른 성씨들이 임영족회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최치운 가계와 계속해서 통혼권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임영족회는 1615년(광해군 7) 이래로 1670년(현종 11), 1678년(숙종 4), 1679년(숙종 5), 1722(경종 2)으로 이어지면서 100여 년간에 걸쳐 실시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1670년(현종 11)의 경우는 강릉부사 여민제가 1669년(년) 9월 13일 부임한 이후 1670년(경술) 6월 7일에 부사 주재로 연회가 베풀어졌고, 동년 8월 21일에는 이에 대한 답례가 거행되었다. 그리고 동년 10월 5일에는 벌례회(罰禮會)가 개최되었다. 정경세(鄭經世)가 지은 서문에 따르면 1615년(광해군 7) 여우길이 강원 관찰사로 부임하여 각 지역을 순행하면서 강릉에 왔을 때 강릉 지역 사인 100여 명은 여우길과 동원(同源)이라 하여 관찰사를 뵙기를 갈망하였다. 하지만 공관에서 사사로이 만나는 것은 혼잡을 초래하는 일이기에 불가하다고 여겨 공관 밖에서 따로 관찰사와 54명이 만나 ‘선세돈목지풍(先世敦睦之風)’에 관해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모임을 만드는 것이 선현의 뜻을 이어받는 아름다운 일이라고 하여 이에 관찰사가 승낙하여 족회가 결성되었다 한다.

족회첩은 현종 11년(1670)모임 때 작성되었다. 이때의 모임은 강릉현감으로 부임한 여민제(呂閔齊)가 종조부 여우길이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하였을 때 당시 강릉부사 정경세가 작성한 족회 기록이 전하는 것을 확인하고 광해군 7년(1615) 참여한 최부를 비롯한 그들의 자손과 외손들을 청해서 이뤄졌다. 이들은 의운루(倚雲樓)에서 향음주례(鄕飮酒禮)와 시를 즐기며 모임을 가졌으며 이후 사족들이 초청한 답례 성격의 족회도 개최되었다

임영족회는 ‘돈목지풍’을 강조하는 족회를 통해 향촌사회에 기여하려는 명분이 있었다. 한편으로는 수령 또는 관찰사와 지역출신 출사자들과의 긴밀한 유대관계 속에서 족회가 개최되었다는 점을 볼 때 이 모임이 향촌 사회 운영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임란 직후인 광해군 7년(1615)부터 족회가 개최되고 있다는 점에서, 전쟁 후 강릉 지역 향촌사회를 추스르기 위해 사족과 지방관의 상호 협조관계와 친족의식이 필요했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사족계와 족계가 양반 사회에서 이뤄진 계라면, 대동계는 촌락을 단위로 형성되는 결사체다. “맹자가 이르기를 ‘향전(鄕田)에서 정(井)을 함께하는 여덟 가구의 사람들이 나가고 들어오면서 서로 우애를 기키고 망볼 때 서로 도우며, 질병이 있을 때에 서로 붙들어주고 잡아주면서 도우면 백성들이 친목(親睦)한다(鄕田同井 出入相友 守望相助 疾病相扶持 則百姓 親睦)’는 뜻은 사(社)를 세워서 의리를 근본으로 삼는 것이며, 백성들로 하여금 서로 친목하고 이후에 강신수계(講信修契)함은 대개 그 뜻의 영향이다”라 하였다.

이런 취지와 같이, 강릉 지방에서도 마을마다 각각 계를 조직하여 운영하였는데 이를 대동계라 한다. 대동계는 계약(契約)이 있어서 선배에게 강명(講明)하고 예법을 취함에 있어서 충신과 친목으로 한다. 풍속의 진작을 근본으로 삼아 백성을 공경하였으니, 그 화합함을 이웃 고을에서 아름답다고 칭송했다.

대동계는 마을공동체를 운영하기 위하여 마을마다 결성된다. 상계와 하계로 구분하여 결성되는데 상계는 재지사족들이 중심이 되어 결성되고, 하계는 하민들이 중심이 되어 결성된다. 계의 목적은 동민의 결속과 공동체적 질서를 도모하는 것이었다. 특히 조세 부담이 마을 단위인 공동납 형태로 운영되고 있던 조선 후기의 상황에서 이와 같은 동계의 역할은 매우 컸다.

16세기에 결성된 동계는 주로 사족 중심의 상계가 주도하였다. 반면 17세기에 이르러서는 상하합계 형태로 운영되었다. 이것은 토호의 무절제한 하민 수탈에 대항해 하민들의 저항의식의 성장에서 기인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하민들은 상하합계에 참여하면서 동계 재원을 공평하게 운영할 것을 강조하는 한편 공동납 형태로 운영되는 조세납부에 대해 납세액의 조정과 부담량에 대한 형평의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마을에서의 활동영역을 확대해나갔다.

1929년 강릉시 옥천동 강릉김씨 가문이 중심이 되어 운영되었던 대동계 서문을 보자.

“강릉 성동(城東)에는 세 개의 큰 가문이 살았는데 대개 안동권씨, 명주최씨, 강릉김씨이다. 3 성이 이곳에 세거한 후 자손들이 자못 번성하였는데, 왕일소(王逸少)의 난정첩(蘭亭帖)에 이르기를 거역지향산의 조직은 아름답지 아니함이 없다고 하였다. 다만 명승지를 유람하며 어찌 만약 이 계가 풍속을 돈독히 하여 예와 겸양을 일으키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만약 하계(下契)에 읍인(邑人), 역민(驛民)들이 왕왕 가입함으로써 첩 끝에 연령과 성명을 기록하고 뽕나무와 가래나무로 서로 도우며 애사와 경사 때 빠짐없이 도왔다. 매번 수계(修契) 시에는 강회(講會)를 열고 사람들로 하여금 술과 안주 등을 준비하여 마시거나 혹은 월대산에 오르거나 혹은 팔송정을 순유하는데 계를 마치고 돌아올 때에는 해학을 즐기며 이 계를 파한다. 그것이 계를 창시한 뜻이니 아름답고 성대하지 않는가?”

한편 조산리(助山里) 대동계는 19세기 초반 경에 시행되었는데 일명 고봉고청계(高峰告淸契)라고도 한다. 즉 고봉고청계란 고봉(高峰)에 치제(致祭)하는 풍속을 존속하기 위해 조직된 계이다. 19세기 초 행제 편제상 조산리는 운정(雲亭), 선교(船橋), 난곡(蘭谷), 혜재(蕙齋), 증봉(甑峰), 면천(勉川), 대전(大田), 두호미(豆呼味), 조산(助山) 등 9개의 자연촌락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고청계는 9개의 자연촌락을 중심으로 구성되었으며, 조산리 대동계라 부르기도 한다. 이 대동계는 고청제사를 봉행하기 위한 제 비용을 각 동 단위로 분담하였고, 수합된 계의 재원에 대한 식리(殖利) 또한 동 단위로 운영되었다. 이에 각 동마다 1명씩의 유사를 선정하여 이를 관리 운영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계수는 고청제사의 제반 사항을 주관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고청제사는 마을의 안녕을 신에게 기원하는 의미로 이해된다. 제사를 통해서 촌락 구성원간의 일체감과 공동체의식을 함양한다는데 의의가 있는 것이다.

이처럼 대동계는 마을 공동체 의식을 형성하는 중심이 되는 한편 사신(祀神) 활동을 통해서 마을 주민들의 안녕과 풍농을 기원하는 결사적 성격을 띠고 있다.

대동계가 지역의 일반적인 일을 다루었다면 조금 더 특수한 목적을 가진 계들도 존재했다. 약국계가 그런 결사다. 강릉 지역은 태백준령의 동쪽에 위치해 있어서 질병에 걸렸을 때 원활히 약을 쓰기 어려운 사정이었다. 따라서 지역의 뜻있는 인사들이 모여 계를 조직하고 치료를 원만히 수행하기 위해 약국계를 결성했다. 결성된 시기는 선조 36년(1603)이다. 약국계는 강릉을 관향으로 하는 세거 씨족과 조선 전기에 강릉으로 입향한 씨족들로 구성된, 재지사족의 자의적인 형태로 조직되고 있다. 약국계는 그 설립과정부터 관 및 향소와는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것은 약국계의 직임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계수는 향소의 직을 겸하고 계장은 계인과 향소가 동의하여 임명하였다.

약국계는 의생(醫生)의 양성과 약재의 확보를 중요하게 여겼으며, 약국계에서 설립한 약국에는 의서와 의구가 갖추어져 있다. 의생의 교육을 전담하는 의관, 주민에 대한 의료 활동을 담당하는 의생, 그리고 약간, 고직 등이 배치되었다. 약재의 수급은 잡역으로 충당하였다.

강릉 지역만의 특수한 계가 모선계다. 옛날 계련당에는 있던 모선계는 선조를 추모한다는 의리의 마음에서 기인한 것이다. 계련당에서 선조를 추모하기 위해 모선계를 만들었으며, 이후에도 선조를 추모하는 것을 당연한 이치로 삼았던 것이다.

홍무 연간에 대소과에 급제한 사람들이 계를 만들어서 계의 이름을 계련소라 불러서 표본으로 삼았다. 모선계는 국기를 고무시키고 학문을 진흥시키며 모여서 강론하며 이를 권장하여 배양하는 풍토 때문에 결성하였다고 이유를 밝히고 있다. 이후로 명사와 석유(碩儒)들이 어깨를 나란히 했으며 400~500여년이 흘러 모선계는 여러 번의 성폐를 거듭한 끝에 지금도 후손들에 의해 계가 유지되고 있다.

조선 개국 초에 강릉에 사마소가 설립되었고, 1810년경에 중수하여 지금의 계련당에 이르고 있다. 사마소는 계련당 제원(諸員)들이 수계(修契)를 할 때 지은 건물이다. 여러 대에 걸쳐 과거에 급제함을 절계(折桂)라 하고 진사를 일러 홍련(紅蓮)이라 하는 까닭에 지은 이름이다. 계련제인(桂蓮諸人)이 춘추(春秋)로 술과 과실을 준비하고 이곳에 모여 돈목지의(敦睦之誼)를 강론하고 이것으로 일향의 풍속으로 삼고 충후(忠厚)에 이르게 했다. 사림 후배들로 하여금 숭앙하고 모범으로 여기게 하여 재예를 익히게 하는 것이다.

특수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또 다른 계가 바로 주춘계(住春契)다. 이 모임은 1676년 가을, 향인 12명이 활 쏘는 모임으로 결성한 계다. 창계 당시 계수는 동지(同知) 박진해(朴震楷)로 나이는 79세였다. 그 밖의 참여인원으로는 78세 부장(部將) 고덕성(高德誠), 76세 동지(同知) 김세록(金世祿), 68세 동지(同知) 최완(崔浣), 67세 참봉(參奉) 최언선(崔彦瑄), 65세 통사랑(通仕郞) 최응진(崔應震), 64세 생원(生員) 김계(金䏿), 첨지(僉知) 최식(崔湜), 박종윤(朴宗胤), 63세 찰방(察訪) 최렴(崔濂), 61세 동지(同知) 최충현(崔忠賢), 60세 만호(萬戶) 박원빈(朴元彬) 등이었다.

동지(同知) 최완(崔浣)이 계명을 주춘이라 하고 계의 서문을 지었다. 서문에 의하면 이들은 나이가 80에서 90에 이르나 기력이 왕성하여, 모여 활쏘기를 즐기거나 술자리를 같이 하면서 모임을 결성했다고 한다. 계명은 봄이 사계절 중에서 시작의 의미가 있고 또 선함의 의미가 있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마지막으로 거론할 계는 그 설립 의미가 현대의 ‘기부문화’에 가깝다. 1744년 옥계면 산계리에 사는 김관자(金貫子) 등 18명이 주관하여 모임을 만들었는데 그것이 바로 금옥계(金玉契)다. 이들은 산간벽지에서 화전으로 어렵게 생계를 유지하던 주민들이 거듭되는 흉년과 고율의 세금으로 인하여 아주 빈곤한 지경에 다다르자 이 사정을 딱하게 여겨 기금을 희사하고 납세를 면해주고자 하는 취지에서 계를 만들었다. 이를 계기로 계를 조직하고 상부상조하였으며 근검절약의 미풍양속을 권장하면서 주민의 재생을 도모하였다. 이후 1796년 마을 사람들은 이들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종선비각(種善碑閣)을 건립하고 매년 4월 8일에 추모제를 거행하고 있다.

이상에서 강릉 지역의 역사적인 계조직을 몇 가지 살펴보았다. 친목을 목적으로 한 계도 있지만 계조직에 숨은 명분과 목적이 있는 경우가 더 많았다. 계가 지금처럼 ‘돈’을 중심에 둔 조직으로 자리 잡기 이전 우리 역사에는 이처럼 풍부하고 다양한 계조직이 있었다. 오늘날의 동호회와 비슷한 계조직이 있었고, 수많은 정치성 사조직과도 비슷한 계조직이 있었다. 우리가 계라고 알고 있는 것이 계의 전부는 아니었던 것이다.

-특색 있는 계칙-

1. 강릉시 옥천동대동계칙

一. 좌목의 기록순서는 계첩의 예에 따고 동리(洞里)는 거주지, 이름은 연령순에 따라 기록하며 이것을 준행하며 함부로 바꾸지 말 것

一. 각 마을에서 새로 가입하고자 하면 1냥을 내며, 입계가 승인되면 5전을 더 낸다.

一. 유사는 1년마다 교체하는데 남·북촌 사람으로 교체하며, 대동계에서 3명을 선발하며 두 사람으로 하여금 유사를 행하도록 하고 계원 중에서 60세 이상자는 거론하지 않는다.

一. 매달 강신(講信)은 20일로 정하여 실시하고 모두 모여 즐기며 불참하는 일이 없도록 한다.

一. 춘추에 두 번 토성 및 월대산, 팔송정에서 만약 소나무를 훼손하거나 잡목을 채취하는 행위가 적발되면 죄를 물어 징벌한다.

一. 계원이 작고하면 상포 1필, 부지(敷紙) 1속, 죽(粥) 대신 조(租) 5두를 허급한다.

一. 계원 중에 만약 이사를 가면 본전을 출급한다.

2. 모선계규약

제일조 본계의 명칭은 모선계라 함

제이조 본계의 계원은 사마소의 사손으로 함

제삼조 본계의 집합장소는 강릉사마소내로 함

제4조 본계의 목적은 계원 선세들에 의해 전해지던 강릉사마소 계련당과 이에 부속된 토지, 임야를 영구보존하고 사기(士氣)를 진흥케 하며 권업 및 식산을 장려함

제오조 본계의 기본재산은 사마소의 재산과 입계금으로 함

제육조 본계의 신입계원은 입계금 1원으로 하되 단 재산이 많은 경우 이 제한을 두지 않음

제칠조 본계의 정기총회는 매년 10월 21일로 정함

제팔조 본계의 임원은 다음과 같다.

계장 1인, 유사 3인

제구조 본계의 계장은 계원 중 연장자로 하고 유사는 계회일 계원 결의에 의하여 계장이 이를 지명함

제십조 계장은 계무를 총괄 감독함

제십일조 유사는 계장의 명에 의하여 서무 및 회계에 종사함

제십이조 계장 및 유사의 임기는 다음과 같음

계장은 무기한 함

유사는 1년으로 함

제십삼조 유사는 매년 총회시 계중 회계 및 수지를 계중에 보고할 일

제십사조 계원 중 사망자가 있을 때에는 상호간 위문하며 계중에서 종이와 초를 부조하고 그 계원의 사손으로 하여금 승입케 할 일, 단 승입계원은 입계금 일원으로 함

제십오조 계원은 사기를 진흥시키기 위하여 성공 가능한 자기 자질(子侄)을 권학하여 명유달사(名儒達士)에 이르게 하여 타의 모범이 되게 할 일

제십육조 본 계원은 실업과 또는 부업을 힘써 행할 것

제십칠조 전항 제15·16조에 해당하는 사람으로 인정될 때에는 이를 포상할 일

제십팔조 본 규약은 본계 창설일로부터 이를 시행함

3. 오성정계규칙

一. 기본재산 백미 이두씩 매년 10월 22일 일제히 수합함

一. 매년 4월 9일, 9월 9일 오성정에서 정기총회 개최

一. 정기 회합일 계원 유고시 자제 대행 할 일, 만약 연유 없이 불참할 경우 다음 모임 일에 불참한 모든 사람을 면책할 일

一. 정기일 비용은 십원을 초과하지 않을 것

一. 정기총회 때 원금은 보름 단위로 세 번 나누어 식리할 일

一. 원금과 식리는 계원이 타인에게 식리하지 말 것

一. 계중 사람의 보증을 허락하지 말 것

一. 현금을 아직 대부하지 않을 경우 유력자가 보관할 일

一. 계원 중 혹 이사 가는 사람은 있으면 친족이 대행함

一. 만약 이사 가면 그 첫 달에 서신을 왕래할 일

一. 계원 중 혹 사망자가 있으면 계에서 미 6승, 포 1필과 더불어 백지 1권, 양초 1갑을 부의함

一. 계원들은 종이와 초로 부조할 일, 양례 시 만사 1장, 백미 1두씩을 부조함

一. 양례시(襄禮時) 계에서 삼실과, 대구포 1미, 제문 1건을 지어 해당유사가 직접 거행할 일(과포 대금은 일원 정도)

一. 양례 때 계원 중 유고가 있을 경우 그 자제가 대행함

一. 3년 후 장자 또는 장손이 승계하며 1번 회차(會次)할 일

一. 정자가 만약 훼손되면 계원 모두가 협력하여 수리하고 영구히 유지할 것

一. 직실(直室)은 매년 세금과 제초 등을 부담할 것

一. 해당 유사와 직이(直伊)는 종종 정자를 살피고 수리할 것

一. 장부는 해당 유사가 서로 인수인계할 것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1.12.06 2011 한자 최종 검토 1722(경종 2년)으로 ->1722년(경종 2)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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