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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중앙감리교회 건물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300366
한자 江陵中央監理敎會建物
영어음역 Gangneung Jungang Gamni Gyohoe Geonmul
영어의미역 Building of Gangneung Central Methodist Church
이칭/별칭 강릉예수교 미감리회당,강릉중앙교회 건물,기독교 대한감리회 강릉중앙교회 건물
분야 역사/근현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건물
지역 강원도 강릉시 금학동 92-1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장정권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시기/일시 1921년연표보기 - 강릉:강릉중앙감리교회 건물 건립
성격 근대건축|교회건물
양식 목조한옥양식
관련인물 안경록
정면칸수 4칸
측면칸수 6칸
높이 20자[6m]
층수 1층
면적 223.74㎡[67.8평]
소재지 주소 강원도 강릉시 금학동 92-1
소유자 기독교 대한감리회 강릉중앙교회

[정의]

강릉 지역의 기독교 대한감리회를 대표하는 교회당 건물.

[개설]

1912년에 105인 사건에 연루되었던 안경록이 본 교회 5대 목사로 부임하여 7년째 되는 해인 1921년 5월에 처음으로 건립한 교회당이다. 건립 당시에는 목조 한식기와집이었다.

[명칭유래]

처음 건립된 1921년에는 ‘강릉예수교 미감리회당’이었는데, 1945년에 ‘강릉중앙교회’로 공식 명칭이 바뀌었다. 현재의 정식명칭은 ‘기독교 대한감리회 강릉중앙교회’이다.

[건립경위]

1921년 5월 교우들의 성금 1천원과 선교부로부터 보조받은 6천원 등 총액 7천원으로 기와지붕 형태의 한옥 30칸의 금학동 92번지 대지 207평에 건평 67.8평의 목조 한식 기와집으로 건축사 최재훈에 의해 건립되었다.

[변천]

1차 건물 준공 후 500여 명이 유년부 행사 및 유치원 졸업식을 하였다. 2차 건물은 1973년 5월 24일 건평 277평 규모의 지하 1층 지상 2층 건물을 조완걸 목사가 공사비 2,065만원으로 건축하였다. 1979년 10월 21일에 3차 건물이 준공되었는데, 3차 건물은 80주년 기념관으로 연면적 133.6평의 지하 1층 지상 3층 건물로 공사 금액은 1,960만원이 소요되었다. 1988년 4월 20일에 4차 건물이 준공되었으며, 4차 건물은 연면적 1,507평의 지하 1층 지상 3층 건물로 공사금액 10억 8500만원이 소요되었고, 현재 사용 중이다.

[형태]

건축양식은 당시의 기독교조선감리회 총리원 사무실과 흡사했다. 건물의 하반신은 화강암 석축을 5척 높이로 쌓고 그 위에다 목조건물을 기둥 높이 10자로 올려 2층집 같이 보이기도 했다. 창문은 아래위로 오르내릴 수 있는 유리창으로 되어 있고 마루바닥은 한 치나 되는 두꺼운 송판을 깔았다. 정면 출입구는 좌우로 출입할 수 있는 계단이 있는데 자연석으로 2m가 되는 돌을 깎아 층계를 만들었다. 왼쪽은 남자 출입문, 오른쪽은 여자 출입문으로 삼았다. 소요된 목재는 주로 삼척, 임원 방면과 오대산에서 반입해 왔다.

[의의와 평가]

강릉의 3·1 만세시위는 두 곳에서 추진되었다. 한 곳은 감리교회이고 다른 한 곳은 남대천 농민이었다. 안경록 목사를 중심으로 한 감리교인과 김모 교사를 중심으로 한 강릉보통학교 학생들이 합동으로 4월 2일 장날에 거사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감리교회 측에서는 단독으로 4월 1일 태극기를 만든 후 이튿날 장터에 나가 안경록 목사를 선두로 만세를 불렀다. 이날 참가인원은 1백 명을 넘었다. 이 중에는 강릉의 유지 최선호, 최선근도 있었다.

또한 4월 7일 장날에도 거사키로 계획을 세우고 4월 6일까지 태극기 5백여 장을 만들어 놓고 있던 중 경찰의 습격을 받아 빼앗기게 되었다. 급히 1백여 장을 다시 만들어 만세를 부르자 군중들 수백 명이 합세하여 장터가 떠나갈 듯이 만세를 부르며 경찰서를 향해 나아갔다.

안경록 목사는 105인 사건에 연루될 만큼 민족정신이 강했고, 강릉 사회에서도 애국지사로 인정받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가 만세시위에 앞장섰을 때 그를 따른 시민들이 많았고, 시위의 규모가 컸던 것이다. 강릉 시위에서 66명이 구속된 것으로 기록되었다. 그러나 대개 검찰의 취조만 받았을 뿐 불기소 석방된 것 같다. 그 후 감리교회 연회 조사에 의하면 삼척, 울진, 평해 등이 포함된 강릉 지방은 구속자 9명, 그의 가족 수가 45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교인 중 강릉 유지 최선호는 8개월의 징역을 살았고, 원산 3·1운동의 주동자 이가순 역시 원산 감옥에서 옥고를 치른바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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