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수임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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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학자 이이(李珥)가 열 살에 지은 부(賦)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에 1748년 경포대가 기울자 부사 조하망(曺夏望)이 누각의 모습을 옛 모습 대로 단장하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때 오죽헌에 보관 중이던 「경포대부」를 찾아 그 내용을 가래나무에 새겨 경포대 기둥과 기둥 사이인 문설주 윗부분에다 걸었다고 한다. 「경포대부」는 『율곡전서(栗谷全書)』에 실려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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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강릉시에 있는 경포호에 관한 전설. 경포호는 수심이 깊지 않아 사람이 빠져도 상하지 않는다 하여 일명 군자호(君子湖)로 불린다. 또한 주위에 경포대를 비롯하여 수많은 정자가 있어 더욱 운치가 있고 겨울이면 철새들이 날아들어 장관을 더한다. 현재 둘레는 약 10리(4㎞)이지만 예전에는 20리 혹은 30리였을 만큼 넓었다고 전한다. 경포호에는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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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진평왕 때 강릉 남대천 남쪽 연화봉 밑 서출지라는 연못에 대한 전설. 강릉 연화봉 밑에 살았던 연화 아가씨와 무월랑이 만나 사랑을 나누다가 무월랑이 경주로 되돌아가서 헤어졌을 때, 잉어가 대신 편지를 전해주었다고 하여 서출지라 한다. 서출지는 경주에도 있었으나, 강릉에서는 「명주가」의 배경지인 양어지(養魚池)를 다른 말로 서출지라 하였다. 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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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에 부임해온 어사 이현로(李賢老)를 기생 옥영(玉英)이 훼절시킨 이야기. 이 설화는 여색을 가까이 하지 않던 어사 이현로를 옥영이 유혹하여 정을 통한 뒤, 어사가 속았음을 깨닫게 한다는 내용의 훼절설화이다. 이 이야기는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향렴조(香奩條)」에 실려 있으며, 비슷한 내용의 이야기가 구전으로도 상당수 전하고 있다. 조선 세종 때 강릉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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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안렴사 박신(朴信)과 강릉 기녀 홍장의 이야기. 강원도 안렴사 박신이 사랑하던 기생 홍장이 죽었다는 소리를 듣고 크게 슬퍼하던 중, 부사 조운흘(趙云仡)과 함께 경포대에 놀이를 나갔다. 거기서 신선이 탔다고 생각했던 배에 홍장이 타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비로소 자신이 속은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이야기는 정약용(丁若鏞)의 『목민심서(牧民心書)』에 수록되어 있으며, 『신증동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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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백순(崔白洵)이 편찬한 강릉의 읍지. 강릉의 읍지로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가 간행된 직후 최백순에 의해 간행된 사찬 읍지(私撰邑誌)이다. 4권으로 기획된 것으로 보이나, 현재 2권·3권·4권의 세 권만 남아 있다. 2권과 3권은 1934년에, 4권은 1937년에 각각 간행되었다. 주목되는 점은 『동호승람(東湖勝覽)』의 간행과 거의 같은 시기인 1933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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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호(詩湖) 박원동(朴元東)의 문집. 박원동[1873~1949]의 자는 덕영(德英), 호는 시호(詩湖)이며 본관은 강릉이다. 어려서부터 한학에 조예가 깊었고, 안변학교(安邊學校) 교원으로 재직하였으며 귀향하여 면장을 지냈다. 또한 풍호정(楓湖亭)을 짓고 시풍을 즐겼다. 1932년부터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를 편찬하여 발간하였고 『강릉향교실기(江陵鄕校實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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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을 중심으로 강원도 동해안 지역에서 활동한 문인들의 한시를 엮은 시집. ‘예성(蘂城)’이란 강릉을 지칭하는 말로, 『예성시고』는 강원도와 인근 지역에 거주하는 346명 시인들의 7언 한시를 모으고, 조선 후기부터 1910년대까지 한시 작가들의 작품을 공모한 것이다. 『예성시고』는 구활자 한문본이며, 국판 42쪽으로 전체 분량은 많지 않으나 지역의 시인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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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의 역사, 인문, 지리 등을 정리한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를 완역한 책. 『임영지(臨瀛誌)』는 원래 전, 후, 속지가 있었다. 전지는 1615년 무렵, 후지는 1748년, 속지는 1786년에 편찬되었다. 전지·후지·속지를 구지라 하고 1786년부터 1933년까지 147년간의 기록을 구지 끝에 덧붙여 실은 것을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라고 한다. 구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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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 12향현, 조선시대 강릉 지역을 중심으로 충·효·예의 성리학적 이념을 실천했던 강릉의 대표적인 열두 명의 학자를 일컫는다. 이들은 향현사(鄕賢祠)에 배향되었다. -강릉을 빛낸 열두 명의 선비들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이라는 노래를 들을 때마다, 그 100분의 선조들을 생각한다. 그 인물들이 노래에 나오는 대로의 훌륭한 생애를 살아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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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포 호수 주변에는 많은 누정들이 산재해 있으며 정자에는 경포 호수의 자연 풍광을 읊은 시문들이 많이 전하고 있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이 경포팔경(鏡浦八景)이다. 경치 좋은 곳에 정자를 지어 놓고 선비들이 모여 시문을 읊조리는 모습, 결사체 회합의 장소로 누정을 활용한 점 등은 전통적인 강릉 지방의 누정 문화이다. -물 좋고 산 좋으니 정자 있기 좋구나!- 흔히 하는 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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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강릉 지역의 고적을 보존하기 위하여 설립되었던 단체. 강원도 강릉 지역에 있는 오죽헌을 수호하기 위한 차원에서 설립되었으며, 당시 강릉 유림의 중심에 있던 박원동, 김병환 등이 실질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율곡(栗谷) 이이(李珥), 신사임당(申師任堂) 등 성현의 발자취를 보존하고 유교문화와 향토문화를 선양하려는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1931년 강릉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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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강릉대도호부 내의 최고 관장(官長). 강릉은 하슬라(何瑟羅), 하서량(河西良) 등으로 불리다가 신라 선덕왕(善德王)이 소경(小京)을 설치하였으며, 경덕왕(景德王) 16년에 명주(溟州)로 개칭되었다. 고려 태조 19년에는 동원경(東原京)으로 편제되었으며, 성종(成宗) 2년에 하서부(何西府), 동왕 5년에 명주 도독부(溟州都督府), 동왕 11년에 명주목(溟州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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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말 설치되어 조선 말에 폐지된 강릉 지역의 지방 관청. 1308년(충렬왕 34)에 설치되어 1896년(고종 33)에 강릉군으로 개편되었다. 『강릉부읍지(江陵府邑誌)』 건치연혁조(建置沿革條)와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 건치연혁조(建置沿革條)에 관련 기록이 있다. 고려시대 명주(溟州), 명주목(溟州牧), 창해명주도, 경흥도호부(慶興都護府), 강릉도(江陵道)가 차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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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강릉시 옥계면 산계리에 있는 석탑. 강원도 강릉시 산계리 절터에 무너진 석탑재를 모아 놓은 3층 석탑 1기가 있다. 강릉의 읍지인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사찰조에 ‘산계암은 강릉부에서 남쪽으로 80리 떨어진 산계령에 있다[山溪菴在府南八十里山溪嶺下]’라는 기록만 있을 뿐이다. 이후에 간행된 『강원도지』, 『사탑고적고(寺塔古蹟攷)』,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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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읍성은 근대 이전 고려와 조선시대에 강릉 지역의 치소(治所)가 위치했던 행정중심지에 조성되었던 성곽을 말하며, 관아 유적은 강릉읍성 내에 존재했던 치민을 위한 시설물을 일컫는다. -읍성을 보면 역사가 보인다. - 강릉읍성과 관아 유적 강릉은 지리적으로 한반도 중부의 동해안에 위치하며, 서·남·북으로 고도 약300~1,000m의 산지로 둘러싸여 있고, 서쪽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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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의 효자. 통정공(通亭公) 강회백(姜淮伯)의 후손이며 호조좌랑 강인회(姜麟會)의 동생이다. 나이 열네 살 때에 어머니의 병환이 위독하자 손가락을 끊어 그 피를 입에 넣어드려 소생시켰다. 아버지가 나이 60세에 등창이 났는데 강봉회는 약을 구해 오고 형 강인회는 손수 약을 달여 드려 효과를 보았다. 상을 당하여 형은 묘 옆에 여막을 짓고 아침 저녁으로 곡(哭)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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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의 강릉 지역의 효자. 통정공(通亭公) 강회백(姜淮伯)의 후손이며 효행으로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추증된 강봉회가 동생이다. 아홉 살 때 아버지의 종기를 입으로 빨아 독기를 빼내어 효과를 보았으며,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였다. 강인회에 대한 효행 기사는 『증수임영지(增修 臨瀛誌)』인물조에 기재되어 있다. 1893년에 호조좌랑에 추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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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의 효자. 고봉익(高鳳翼)은 성품이 효성스러워 어머니가 병이 나자 배설물을 맛보며 치료하였다. 또 어머니의 병을 대신해서 앓게 해 달라고 하늘에 빌면서 약시중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상을 당했을 때에는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였고, 상이 끝난 다음에도 비바람을 무릅쓰고 성묘를 하였다. 시묘살이를 할 때에 호랑이가 와서 보호해 준 기이한 일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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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효자. 어버이를 섬길 때에 효성을 다하였으며 어머니가 병들자 손가락을 끊어 그 피를 흘려 넣어 낫게 하였다. 고욱에 대한 효행 기사는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인물조에 기재되어 있다. 고욱의 효행을 조정에서 듣고 1555년(명종 10)에 정려(旌閭)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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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열녀. 나이 22세에 남편이 병이 들어 급기야 숨이 끊어지려고 하자 손가락을 끊어 그 피를 입에 넣어 며칠을 더 살게 하였다. 남편이 죽자 세수도 하지 않고 정절을 지켰다. 고익지(高益智) 처 신씨에 대한 효열 기사는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인물조에 기재되어 있다. 마을 사람들이 부영(府營) 및 어사(御使)에게 호소하여 포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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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열부. 나이 19세에 남편의 상을 당하여 상장(喪葬)의 예를 다하고 삼우제(三虞祭)가 끝나는 날에 남편을 따라 죽었다. 고제인(高濟寅) 처 전씨에 대한 효열 기사는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인물조에 기재되어 있다. 여러 번 관부에 알려져 아름다운 행실을 기리는 글이 내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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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강릉시 성산면에 개설되었던 5일장의 하나. 조선 후기 강릉 지역에는 여러 곳에 5일장이 개설되었는데 대표적인 5일장이 강릉장[2, 7개시], 연곡장[3, 8개시], 옥계장[4, 9개시], 주문진장[1, 6개시], 강동장[1, 6개시], 망상장[5, 10개시], 구산장[1, 6개시]이 있었다. 이들 장시는 모두 지역민들의 수요와 공급의 필요에 따라 교통중심지대에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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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의 열녀. 시부모를 효성을 다해 모셨다. 시어머니가 병이 나자 변을 맛보며 치료하였고, 또 손가락을 끊어 그 피를 입에 넣어드렸다. 시어머니의 상을 당했을 때, 베를 짜서 받은 품삯으로 제수를 마련해 상을 잘 치렀다. 남편인 권억영은 스승을 따라 유학하고 있다가 불행하게 일찍 죽었다. 남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날로부터 식음을 전폐하고 따라 죽을 것을 결심했으나 늙으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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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말기의 효부(孝婦). 지극한 효성으로 시어머니를 모셨으며 처음부터 끝까지 조금도 게으르지 않았다. 권종열(權鍾烈)의 처 김씨에 대한 효행 기사는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인물조에 기재되어 있다. 시부모에 대한 지극한 효성으로 정려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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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열녀. 22세 때 남편이 병이 나자, 목욕재계하고 정성을 다해 남편을 낫게 해 달라고 하늘에 빌었다. 남편의 병이 위독하자 자신의 손가락을 깨물어 그 피를 입에 넣어 주었으나, 남편은 끝내 죽고 말았다. 남편의 상을 마친 뒤 최씨는 시부모께 영결을 고하고 조용히 남편을 따라 죽었다. 권진수(權震洙)의 처 최씨에 대한 효열 기사는 『증수임영지(增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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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의 효·열부. 지극한 정성으로 시부모를 섬겼다. 남편이 죽자 늘 칼을 품고 자결하려고 하였으나, 집안사람들이 이 사실을 알고 겨우 만류하여 보호하였다. 스스로 죄인이라 하면서 문밖을 나가지 않았으며 해를 보지 않았으며, 흰 옷과 변변찮은 음식을 입고 먹으며 일생을 보냈다. 남편의 기일에는 종들에게 시키지 않고 제물을 손수 정성껏 마련하였으며, 제사를 마치고는 초상 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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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열녀. 시집간 지 사흘 만에 남편이 병이 나자 손가락을 끊어 그 피를 입에 넣어 회생시켰으나 남편은 사흘을 더 살다 죽었다. 동생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남편을 따라 죽고 싶으나 시부모가 계시고 또 뱃속에 아이가 들었으니 한때의 슬픔을 참고 견디어 뒤에 바른 길로 가겠노라”고 하였다. 그 뒤 아들을 낳아 “할아버지 할머니를 정성껏 봉양하라”고 가르쳤다. 묘막에서 삼년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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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강릉. 김광백의 아버지는 김기(金玘)이고, 할아버지는 김용려(金用礪), 증조는 김보(金黼)이다. 처부는 군수를 지낸 최운상(崔雲祥)이다. 1603년(선조 36) 생원에 입격하였고, 1612년(광해군 4)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1614년 비인현감(比仁縣監) 재직 시 병으로 직무를 수행하기 어렵게 되어 향리들의 작폐가 심해지자 사헌부에 체직(遞職)을 요청하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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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부·열녀. 남편의 병이 위독하자 손가락을 끊고 그 피를 입에 넣어 사흘을 회생시켰다. 남편이 마침내 죽자 자살을 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장사지내는 날 남편의 시신과 함께 구덩이에 뛰어들어 죽으려 하자 “시부모가 아직 살아 계시는데 죽으면 누가 봉양하겠느냐”며 집안사람들이 온갖 말로 타일러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다. 김낙범(金洛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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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의 선비. 유학적 소양을 지닌 문장가로서 출사하지 않고 고을 사람들과 한평생 동고동락하며 지냈다. 재주가 출중하고 문장이 뛰어나 유궁(儒宮)에 출입하였으며, 또 고인(古人)의 기상이 있어 사람들이 자랑스럽게 여겼다. 집은 동문 밖에서 몇 리 떨어져 있었으며, 뜰 가에 은행나무가 울창하게 우거져 이곳에 정자를 짓고 고을 사람들과 함께 즐겼다. 고을에서 사람의 됨됨이를 논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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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의 효자. 조선 전기의 강릉 출신 문신인 김몽호(金夢虎)의 후손이다. 부모님이 살아 계셨을 때나 돌아가셨을 때에도 지극한 정성으로 부모님을 섬기며 살았다. 어버이가 돌아가시자 예를 다하여 상을 치렀다. 김매진에 대한 효행 기사는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인물조에 기재되어 있다. 효행이 뛰어나 조정에서 동몽교관(童蒙敎官)을 증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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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자. 효성이 지극하여 고을에서 모두 칭송하였다. 가묘(家廟)에 불이 나자 죽음을 무릅쓰고 신주를 구해냈다. 김병구에 대한 효행 기사는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인물조에 기재되어 있다. 신주를 구해낸 사실을 사림에서 알려 호역을 면제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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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자. 아버지는 김수호(金壽浩), 형은 김병렴(金秉濂)이다. 아버지가 병환으로 위독하자 약을 구하려고 먼 곳까지 돌아다녔다. 그러던 중 길가에서 산삼을 얻었으며, 꿩이 품으로 날아들어 아버지께 잡아 드렸다. 김병락에 대한 효행 기사는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인물조에 기재되어 있다. 감찰(監察)에 증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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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자. 김수호(金壽浩)의 아들이다. 동생은 효행으로 감찰에 증직되었던 김병락(金秉洛)이다. 어버이가 돌아가시자 3년 동안 상을 치렀으며, 초하루와 보름에는 빠짐없이 성묘를 하였다. 김병렴에 대한 효행 기사는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인물조에 기재되어 있다. 호조좌랑에 증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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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열녀. 평소 효성을 다해 시부모를 섬겼다. 하루는 시어머니와 함께 자다가 시어머니가 변소에 간다기에 부축하여 문을 나섰는데, 그때 갑자기 호랑이가 시어머니를 잡아가려 하였다. 최씨는 한 손으로 시어머니를 껴안고 다른 한 손으로 호랑이를 내리쳤다. 호랑이는 몇 발자국을 끌고 가다 버리고 달아났다. 최씨는 시어머니를 업고 돌아와 정성껏 치료하였으나 이튿날 아침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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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자. 지극한 효성으로 어버이를 섬겼다. 아버지가 위독하자 손가락을 끊어 그 피를 입에 넣어 얼마 동안 더 살게 하였으며,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매일 냇물을 건너 성묘를 하였다. 그러자 집안사람들이 묘막을 지어 주어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할 수 있었다. 그 동안 호랑이가 와서 김부경을 지켜 주었다고 한다. 김부경에 대한 효행 기사는 『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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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의 효자. 부모가 병에 걸려 매우 위급해지자 자신의 손가락을 끊어 치료하였다. 문학으로 세상에 널리 이름을 떨쳤다. 김성일에 대한 효행 기사는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인물조에 기재되어 있다.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증직되었으며 정려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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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건보(健甫). 김준현(金峻賢)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김호변(金虎變)이고 아버지는 김홍적(金弘績)이다. 1658년(효종 9) 경릉참봉이 되고, 1660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다. 김천찰방·감찰·예조좌랑·병조좌랑·병조정랑을 거쳐 1666년(현종 7)에는 홍천현감을 지냈다. 경직(京職)에 돌아와서는 1667년 정언을, 1670년 지평 등을 차례로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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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의 선비. 타고난 자질이 뛰어났고 용모 또한 준수하고 맑았으며, 항상 마음을 바르게 갖고 품행을 닦는데 힘썼다. 15세 때 명재(明齋) 윤증(尹拯)을 알현하였는데, 윤증은 그의 기특함을 한번 보고는 “이 사람은 나이 20이 되지 않아 성명천도(性命天道)의 근원을 꿰뚫을 것이니 우리 무리가 지향하고 있는 성리학이 앞으로 외롭고 쓸쓸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이후 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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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열녀. 남편 김습(金習)이 죽자 3년 동안 죽만 먹었고, 머리 빗질과 세수도 하지 않고 옷도 갈아입지 않았다. 3년상을 무사히 끝내고 제사를 마친 최씨는 다음날 앓지도 않고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김습 처 최씨에 대한 효열 기사는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인물조에 기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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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열녀. 시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을 때 남편 김시린(金始麟)이 애통한 나머지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자 자신의 손가락을 끊어 그 피를 남편의 입에 흘려 넣어 사흘을 더 살게 하였다.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남편을 따라 죽으려고 했다. 집안사람들이 말려 뜻을 이루지 못했으나, 상을 마친 뒤 남편을 따라서 세상을 떠났다. 김시린 처 최씨에 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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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효자. 어머니가 염병을 앓다가 오랫동안 기절해 있자, 모든 사람들이 돌아가신 줄로만 알고 장례를 치르려고 하였다. 그때 김시민은 동생 김시맹(金時孟)과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손가락을 끊어 그 피를 어머니의 입에 흘려 넣고는 머리를 풀어헤치고 통곡을 하였다. 그러자 갑자기 어머니의 입술에 생기가 돌더니 정신을 차렸다. 또 26세 때 아버지가 위독해지자 목욕재계하고 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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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열녀. 어려서부터 가정의 엄한 가르침을 받고 자랐으며, 시집을 가서는 남편 김시중(金始重)과 시부모를 정성껏 모셨다. 남편인 김시중이 기랑(騎郞)의 벼슬을 사직하고 고향으로 오는 중 양근현(楊根縣)에서 갑자기 병이 나 위독하게 되었다. 마침 김시중의 종이 밤새 달려와 병세를 알리자 팔순인 부모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때 시어머니를 위로한 후, 목욕재계하고 하늘에 기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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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문신. 아버지는 김여계(金汝契)이며 어머니는 김겸(金謙)의 딸이다. 아우는 김양신(金養身), 김양정(金養正)이며 아내는 최충남(崔忠男)의 딸이다. 1615년(광해군 7)에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1627년(인조 5)에 문과에 올라 첨정(僉正)·동부승지(同副承旨)를 역임하였고, 집현전 창정(集賢殿 彰幀)을 개수(改修)하였다. 김양성에 대한 기사는 『증수임영지(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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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열녀. 남편 김언진(金彦鎭)이 중병에 걸려 매우 위독하였다. 그러자 어린 자식들과 영원히 이별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후 김언진과 같은 무덤에 묻혔다. 김언진 처 신씨에 대한 효열 기사는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인물조에 기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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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문신. 1507년(중종 2) 강릉대도호부사에 제수되었으나, 곧 강릉부사(江陵府使) 벼슬을 버리고 상경하였다. 김연수가 강릉부사(江陵府使) 직을 그만 둔 것은 당시 도사(都事)에게 욕을 받자 이에 굽히지 않고 사표를 냈기 때문이었다. 이로 인해 이조에서 그를 내섬시정(內贍寺正)으로 임명하였다. 충청도별마절도사로 재임하면서 졸하였다. 김연수에 대한 기사는 『증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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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열녀. 남편 김운성(金雲成)은 보따리 장사를 하느라 영남 지방에 갔다가 죽었다. 당시 부음을 듣고 시신을 거두려 곧 달려가려 했으나 늙으신 어머니와 어린애들이 있어 틈을 낼 수가 없었다. 그 후 마침 어머니도 돌아가시고 아이들도 어느 정도 성장하자 마음을 굳게 먹고 남편이 죽은 곳으로 떠났다. 그런 다음 남편의 유골을 거두어 짊어지고 돌아와 장례를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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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열녀. 나이 20세 때 남편 김윤수(金潤洙)가 중병을 얻어 위독해지자 자신의 손가락을 끊어 그 피를 남편의 입에 흘려 넣었으나 남편은 살아나지 못했다. 그러자 남편을 따라 죽으려고 문을 닫아걸고 빗장에다 목을 매었으나, 집안사람들에게 발각되어 죽지 못했다. 남편의 무덤에 가서 슬피울다 근처 나무에 목을 매었으나 나무꾼이 발견하고 구해 주었다. 두 차례에 걸쳐 자결을 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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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자. 어머니의 상을 당해 시묘살이를 할 때, 집에 홀로 계신 아버지를 보살피기 위해 아침저녁으로 어머니의 묘소까지 왕래를 하였다. 그러던 중 어느 한겨울에 폭설이 내려 묘소로 가는 길이 막혔다. 이 때 갑자기 호랑이가 나타나 눈을 헤쳐 길을 내 주었다고 한다. 김의진에 대한 효행 기사는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인물조에 기재되어 있다. 효행이 조정에 알려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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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효자. 임진왜란 때 늙은 어머니를 업고 산중으로 피하던 중에 왜적을 만났다. 왜적이 뒤쫓아 오자 김인호는 끝까지 어머니를 업고 달아나다 결국 붙잡혀 죽임을 당하였는데, 효행에 감동한 왜적은 김인호의 어머니를 그대로 살려 두고 갔다. 김인호에 대한 효행 기사는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인물조에 기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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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열녀. 나이 24세 때 남편 김작(金焯)이 중병에 걸리자 온갖 정성을 다해 치료하였지만 남편은 세상을 떠났다. 남편을 따라 죽으려고 하였으나 생각한 바가 있어 슬픔을 참고 예를 다해 장례를 치렀다. 그러다 남편이 죽은 지 석 달이 지나 졸곡(卒哭)하는 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김작 처 최씨에 대한 효열 기사는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인물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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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열녀. 중병에 걸린 남편 김재경(金在卿)을 8년 동안 지극정성으로 보살폈고, 늙은 시어머니를 정성을 다해 모셨다. 낮에는 방아를 찧고 밤에는 바느질을 하여 남편과 시어머니를 봉양했다. 비록 집안이 가난해 목숨만 겨우 이어갈 형편이었지만 조금도 싫어하거나 괴로워하는 내색을 하지 않았다. 김재경 처 이씨에 대한 효열 기사는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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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의 효자. 어머니가 병에 걸렸을 때 복숭아를 몹시 먹고 싶어했다. 때는 늦가을이라 복숭아를 구할 길이 없어, 안타까운 마음에 김재숙은 낙엽만 남은 복숭아나무를 껴안고 울기 시작했다. 그러다 낙엽 가운데서 몇 개의 복숭아 열매를 발견하였는데, 이를 즉시 따다가 어머니에게 먹이자 병세가 금세 호전되었다. 김재숙에 대한 효행 기사는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인물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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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의 열녀. 1894년(고종 31) 남편 김재숙(金在淑)이 중병에 걸려 위독하자 자신의 손가락을 끊어 그 피를 남편의 입에 흘려 넣었다. 남편은 다시 살아나는 듯하였으나 끝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김재숙 처 전씨에 대한 효열 기사는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인물조에 기재되어 있다. 이야기가 조정에 알려져 숙부인(淑夫人)에 추증되었고 남편과 함께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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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열녀. 하루는 남편 김종석(金宗碩)이 산에서 나무를 하다가 나무와 돌에 치여 크게 다쳤다. 남편이 들것에 실려 집으로 돌아왔는데, 그 때 피가 남편의 양쪽 폐에 들어가 대소변이 막혀 있었다. 그러자 밤에 자기를 대신 앓게 해 달라고 하늘에 빌고 남편의 생식기를 입으로 빨아 소변을 통하게 하였다. 또 손가락을 끊어 그 피를 남편의 입에 흘려 넣어 남편을 소생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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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강릉군수를 지낸 일본인 행정가. 1926년과 1928년에도 강릉에는 두 명의 일본인 군수가 있었다. 그러나 1931년에 강릉군수를 역임한 다키자와 마코토[瀧澤誠]의 행적은 남달랐는데 성현의 발자취를 보존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오죽헌 보호활동과 율곡, 신사임당 선양사업을 추진하였다. 특히 강릉고적보존회를 결성하여 향교 및 지역문화를 보호하였고, 향토지 발간활동에도 노력하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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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강릉 지역에서 매년 음력 4월 15일 성황신인 범일 국사를 모시고 지내는 제의. 대관령 국사성황사에서 지내는 제사로 국사성황신은 강릉 출신의 승려 범일 국사이다. 대관령 국사성황제는 통일 신라 때 국사로 추앙된 범일 국사가 사후에 대관령을 지키는 성황신이 되었다는 신화에 의거한 명칭이다. 『증수임영지(增修 臨瀛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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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강릉시 강동면 정동진리의 괘방산 중턱에 있는 등명사의 옛터. 등명사라는 명칭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풍수지리에서 입각하여 볼 때 사찰이 강릉대도호부 중 암실(暗室)의 등화(燈火)와 같은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며, 일설에는 이곳에서 공부하는 선비들이 삼경(三更)에 산에 올라 붉을 밝히고 기도하면 급제가 빠르다고 하여 붙여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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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부. 어려서부터 지극한 효성으로 어버이를 섬겼으며, 시집을 가서는 시부모를 더욱 공경하며 모셨다. 관찰사가 표창을 하고 호역을 면제해 주었으며, 관가에서 효열 완문을 발급하였다. 박구호 처 장씨에 대한 효열 기사는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인물조에 기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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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열녀. 아픈 시부모를 위해 새와 물고기를 구해 시부모를 정성껏 보살폈다. 또한 남편 박문오(朴文五)가 위독하자 손가락을 끊어 그 피를 입에 흘려 넣어 1년을 더 살게 하였다. 남편이 죽자 세수와 빗질을 하지 않았으며, 어린 자식들을 훌륭히 길렀다. 박문오 처 어씨에 대한 효열 기사는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인물조에 기재되어 있다. 부영(府營)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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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열녀. 나이 18세 때 남편 박병은(朴炳殷)이 위독하자 손가락 세 개를 끊어 그 피를 입에 흘려 넣었다. 남편은 7일을 더 살다 죽었다. 남편의 상을 당하였을 때는 남편을 따라 죽으려 하였으나 늙으신 시부모님을 두고 차마 죽을 수가 없었다. 시부모님을 끝까지 정성껏 봉양하여 마을에서 효열이라고 칭송하였다. 박병은 처 김씨에 대한 효열 기사는 『증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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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열녀. 어느 날 밤 화적(火賊) 떼 수십 명이 집 안에 들어와 남편을 죽이자,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한 가지 꾀를 내었다. 남자 옷으로 갈아입고서는 화적들이 버린 큰 종이로 얼굴을 덮어쓰고 화적들 틈에 섞여 함께 시끄럽게 소리를 지르며 돌아다녔다. 그러면서 가위로 화적들의 옷깃을 몰래 잘라 놓았다. 화적들이 흩어진 후 관가에 가서 전후의 실상을 낱낱이 알려 화적들의 만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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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부. 어려서 부터 효성을 다하여 어버이를 섬겼으며, 시집가서는 시부모님을 더욱 정성껏 공경하였다. 박시언 처 김씨의 효행 기사는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인물조에 기재되어 있다. 효행이 알려져 암행어사와 관찰사가 포상을 하였으며, 호역(戶役)을 면제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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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선비. 아버지는 학생(學生) 박상의(朴尙義)이다. 박시혁(朴時赫)[1747~?]은 순조 4년(1804) 식년생원에 1등으로 입격하였다. 합격 당시 나이는 57세였으며 직역은 유학(幼學)이었다. 박시혁에 대한 기사는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인물조에 기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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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시 시동 출신의 근대 문인·유학자. 박원동(朴元東)의 자는 덕영(德英), 호는 시호(詩湖)로 어려서부터 한학에 힘써 그 학문이 향촌에 으뜸이었다. 벼슬은 종사랑으로 안변학교 교원으로 재직하였으며 귀향하여 면장을 지냈다. 또한 풍호정을 짓고 시풍을 즐겼다. 1933년 7월부터 2년간 강릉향교 직원(直員)으로 재직하였다. 시호 박원동 선생은 강릉 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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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자. 어머니가 병이 났을 때, 손가락을 끊어 그 피를 입에 넣어 드려 하루를 더 살게 하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3년 동안 죽을 먹고 상복을 벗지 않았다. 고을에서 효성이 지극하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박증석에 대한 효행 기사는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인물조에 기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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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모니(釋迦牟尼)를 교조(敎祖)로 하여 부처의 가르침을 신봉하는 종교. 옛날부터 강릉을 비롯한 영동 지역은 산세가 험하고 교통이 불편해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여러 분야에서 변방의 위치에 머물러 있었다. 다시 말해 영동 지역은 지정학적 특징으로 인해 한국사의 전개과정에서 특별한 주목을 받지 못했던 곳이었다. 그러나 한국불교사의 입장에서 살펴보면 이 지역의 의미는 크게 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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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강릉 지역에 남아 있는 절터. 강릉 지역의 사지에는 굴산사지(掘山寺址), 보현사(普賢寺)[지장선원], 신복사지(神福寺址), 방현사지(坊縣寺址), 한송사지(寒松寺址)[문수사], 등명사지(燈明寺址), 안국사지(安國寺址) 등이 있고, 이들 사지에는 문화재로 지정된 유물이 있다. 그밖에 특별히 지정된 문화재가 없는 사지들도 다수 있다. 사찰이나 사지는 여러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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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려가 불상을 모시고 불도(佛道)를 닦으며 교법을 펴는 곳. 1. 문헌 수록 사찰 강릉시 소재 사찰로서 문헌에 수록된 사찰로는 굴산사(掘山寺), 보현사(普賢寺), 문수사(文殊寺), 신복사(神福寺), 등명사(燈明寺)[현 등명낙가사], 안국사(安國寺)[안곡사], 산계암(山溪菴), 염양사(艶陽寺), 청학사(靑鶴寺), 용연사(龍淵寺), 칠성암(七星菴)[현 법왕사(法王寺)],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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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강릉시 강동면 하시동리에 있는 한송정(寒松亭)에 있었던 신라시대의 다구(茶具). ‘석조(石竈)’는 차를 달이던 도구로서 돌로 만든 아궁이라는 뜻이다.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에 ‘한송정에 석조(石竈)와 석지(石池), 석정(石井)이 있었는데 세상 사람들이 신라의 선인(仙人) 영랑(永郞)이 차를 달이던 도구들이라 하였다.’라는 내용이 있다. 현재 한송정에는 돌우물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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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의 교회 의식이 행하여지는 건물. 한국천주교는 정조 8년(1784년) 이승훈이 중국 북경에서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의 그람몽(Grammont)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돌아와 이벽과 권일신에게 세례를 준 때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당시의 조선 사회는 유학 그 중에서도 주자학이 정치, 경제, 교육, 문화 전반에 뿌리를 내린 시기였기 때문에 유학과는 근본적인 면에서 서로 다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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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자. 본관은 영월. 홍문관 박사(弘文館博士) 신응명(辛應命)의 5세손이다. 어려서부터 성품이 매우 효성스러웠다. 7세 때 어머니의 머리에 종기가 나자 자신의 입으로 빨아내어 낫게 하였다. 또 아버지가 병에 걸렸을 때 산에 들어가 사흘 밤낮으로 기도를 드리자 아버지의 병이 나았다. 16세 때 아버지가 중병에 걸려 혈기가 막히는 등 위독하자 칼로 자신의 손가락을 끊으려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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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자. 본관은 평산(平山). 신신기(辛申耆)의 손자이다. 평소 품성이 곧고 행동에 위엄이 있었다. 아버지가 나이가 많고 식성이 까다로워 날마다 맛 좋은 탁주를 마시고 신선한 국만 찾았는데, 신건동은 하루 세끼를 거르지 않고 갖추어 올려 드렸다. 비록 집안 살림이 가난해서 여기저기에서 빌려 오더라도 조금도 싫어하는 빛을 보이지 않으면서 10여 년간을 계속하였다. 또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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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자. 평생 어버이 섬기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초상을 당했을 때 어머니가 차가운 방에서 주무시자 신붕은 거적을 깔고 밖에서 잤다. 임진왜란 때 신붕이 어머니를 업고 난을 피해 가다 왜적에게 잡혔다. 그 때 왜적들이 두 사람을 죽이려고 하자 신붕이 어머니를 안고 애걸하였다. 효성에 감동한 왜적이 이들을 내버려두고 그냥 가버렸다. 그 후 어머니께서 천수(天壽)를 다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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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열녀. 지극한 효성으로 시부모님을 섬겼으며, 남편 신세린(辛世麟)이 죽자 다락에서 떨어져 같이 죽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집안사람들이 구해 주어 뜻을 이루지 못했다. 소상(小祥)을 맞아 또 죽으려고 했지만 구조되어 죽지 못했다. 평생 동안 세수를 하지 않고 머리를 빗지 않았으며, 날마다 피죽을 조금씩 먹을 뿐이었다. 봄가을로 남편의 새 옷을 지어 놓고 불살랐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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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강릉시 성산면 관음리에 위치한 사지(寺址).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 「사찰조」에 ‘안곡사재성산면안곡동 년대미상 당우소실 단석탑고오척삼촌폭삼척 전면각불상석 비고이척 지장존석조잔류 금폐(安谷寺在城山面安谷洞 年代未詳 堂宇燒失 但石塔高五尺三寸幅三尺 全面刻佛像石 碑高二尺 地藏尊石造殘留 今廢)’라는 기록과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朝鮮寶物古蹟調査資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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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관노가면극」에서 소매각시의 상대역으로 등장하는 인물. 「강릉관노가면극」에는 양반광대, 소매각시, 시시딱딱이 2명, 장자마리 2명으로 총 6명이 등장한다. 양반광대는 호색풍자나 어리석음을 희화화(戱畵化)하기 위한 인물로 등장하는데 양반광대에서의 ‘광대(廣大)’는 『고려사(高麗史)』 권124 , 「전영보전」에 “우리말로 가면을 쓰고 노는 자를 광대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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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열녀. 예를 다해 부모를 섬겼으며, 시부모를 봉양하는데도 예를 다하였다. 또한 남편 어사충(魚史忠)에게는 순종하고 정숙하였다. 남편이 병이 나자 하늘에 기원하였으나 끝내 남편은 세상을 떠났다. 남편의 장례를 치르고 나서, 큰 아이에게는 밥을 먹이고 젖먹이를 재운 후 남편을 따라 죽었다. 어사충 처 김씨에 대한 효열 기사는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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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高麗史)』에 전하는 「명주가」 배경설화의 주인공. 연화부인은 강릉김씨 시조로 명주군왕이 된 김주원(金周元)의 어머니 박씨로 전해지고 있다. 연화부인과 관련된 이어척소(鯉魚尺素) 설화는 아름다운 만남으로 전한다. 신라 왕족 김주원의 강릉 이주 문제와 함께 강릉 출신 연화부인과 경주의 서생 김무월랑의 결연(結緣)에 대한 다양한 형태의 설화가 전한다. 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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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강릉 지역에서 매년 음력 4월 15일 대관령국사성황신을 모셔올 때 횃불로 신맞이를 하는 놀이와 의식. 대관령국사성황신은 강릉 단오제의 주신이다. 강릉 단오제는 음력 3월 20일 신주빚기로 시작하여 4월 15일 대관령에 있는 국사성황신을 강릉으로 모셔오는 영신제를 지낸다.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 기록에 의하면 신목을 베어 모신 대관령국사성황신의 행차가 제민원성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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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강릉시 사천면 사기막리에 위치한 조계종 소속의 사찰. 옛날 이 마을에 못이 있었는데 이곳에서 용이 하늘로 승천하였다고 하는 ‘용연(龍淵)’의 전설에서 비롯되었다. 신라 때 자장율사가 선덕여왕 때 창건했다는 설과 1650년 조선 인조 때에 도승 옥잠(玉岑) 스님이 창건하였다는 설, 그리고 현종 11년(1670)을 전후하여 왕장(王藏) 대사가 창건했다는 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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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충노(忠奴). 박영수(朴英秀)의 종이었으며 타고난 성품이 충직하고 공손하였다. 상전인 박영수의 상사(喪事) 때에는 6년을 하루같이 죽만 먹고 지냈다. 유성에 대한 기사는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인물조에 기재되어 있다. 부사가 쌀과 미역으로 포상하고 요역을 면제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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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부. 시집 온 지 3년 만에 남편 유진구(兪鎭九)가 병이 났다. 백방으로 약을 썼으나 남편이 끝내 세상을 떠나자 상제(喪祭)와 거상(居喪)에 예를 다하였다. 거상 기간에는 머리를 빗거나 세수를 하지 않아 얼굴에 검정을 칠한 것 같았으며, 아침저녁으로 성묘하며 피눈물을 흘릴 정도로 슬퍼하였다. 하루는 산불이 남편의 묘에까지 번지려 하였는데, 하늘에 기도하니 잠시 후 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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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강릉 출신의 무인. 70세에 무과에 올랐다. 참군(參軍) 벼슬에 있을 때 오랑캐가 함경도에 창궐하였다. 그러자 적과 싸울 것을 자청하고 적진에 뛰어들어 맹렬히 싸우다 전사하였다. 윤국경(尹國卿)에 대한 기사는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인물조에 기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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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충노(忠奴). 최빈현(崔斌鉉)의 종으로 상전이 대를 이을 자손이 없이 죽자 3년 동안 상식(上食)을 하루도 거르지 않고 올렸다. 또 상전의 4대에 걸친 제사를 받들고 산소의 성묘를 죽을 때까지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을득에 대한 기사는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인물조에 기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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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열녀. 어느 날 밤, 남편 이돌만(李乭萬)이 집에 없는 틈을 타 이웃 남자가 침입해 욕보이려 하였다. 죽기를 무릅쓰고 반항하다가 칼에 찔려 죽었다. 이돌만의 처 이조이에 대한 효열 기사는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인물조에 기재되어 있다. 이조이(李召史)의 효열이 알려져 정려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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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자. 아버지가 7년 동안이나 병석에 있을 때 밤낮으로 약시중을 들었다. 아버지가 임종할 무렵에는 자신의 손가락을 끊어 그 피를 입에 흘려 넣어 두어 얼마동안 더 살게 하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는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였다. 이동수에 대한 효행 기사는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인물조에 기재되어 있다. 사림에서 천거하여 정려를 받았으며, 동몽교관(童蒙敎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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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자. 어버이가 몇 달 동안 병석에 있을 때 배설물을 맛보고 치료하였으며, 손가락을 끊어 그 피를 입에 넣어 드렸다. 3년 동안의 시묘살이를 처음 시작할 때 땅을 파서 샘물을 길어 썼는데, 시묘살이를 마치고 묘막을 철거하던 날에 그 샘물이 말라 버렸다고 한다. 이동인에 대한 효행 기사는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인물조에 기재되어 있다. 사림에서 표창을 하고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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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열녀. 시어머니 상을 당해서는 3년 동안 죽만 먹었으며, 남편 이면기(李冕箕)의 병이 심했을 때 지극정성으로 하늘과 땅에 기도를 올렸다. 끝내 남편이 죽자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자신도 따라 죽을 것을 맹세하였다. 늙은 시아버지와 자식을 위해 겉으로는 슬픔을 참으며 남몰래 홀로 울다가 잠자리로 돌아와 태연히 목숨을 끊었다. 이면기의 처 심씨에 대한 효열 기사는 『증수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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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우계(羽溪). 강원도 강릉시 우계 출신인 이지방(李之芳)의 후손이며, 중추부사를 지낸 이전(李戩)의 손자이다. 일찍이 무과에 급제하여 1592년(선조 25)에 나주판관이 되었다. 1593년에 전라방어사·충청조방장(忠淸助防將), 1594년에 남원부사·전라도병마절도사, 1595년 나주목사 등을 역임하였다. 다시 전라도병마절도사가 되어 1597년 정유재란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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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영해(寧海). 아버지는 이형(李珩)이며 형은 이상복(李尙馥)이다. 사마시에 올랐으며, 병자호란 때 마을 사람들을 모아 의병을 조직하여 의병장에 추대되었다. 전쟁터로 향하던 중 갑자기 적들이 물러갔다는 소식을 듣고 중도에서 돌아왔다. 이상필(李尙馝)에 대한 기사는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인물조에 기재되어 있다. 이상필의 행적이 임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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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우계(羽溪). 대사헌을 지낸 이감(李戡)의 아들이다. 1560년(명종 15)에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주서(注書)·찰방(察訪) 등을 지냈다. 이성헌에 대한 기사는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인물조에 기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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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열녀. 남편 이업(李嶪)을 일찍 잃고 홀몸이 되자 피눈물을 흘리며 제사를 받들었으며, 이가 드러나게 웃지 않았다. 3년 후에 삭망제(朔望祭)를 지냈으며, 이 때 손수 제수(祭需)를 마련하였다. 박씨는 나이 90에 이르도록 매번 슬퍼하기를 처음과 같이 하였다. 이업의 처 박씨에 대한 효열 기사는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인물조에 기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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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열녀. 본관은 미상이며 성은 김씨(金氏)이다. 남편은 이은진(李殷震)이다. 일찍 남편을 여의고 홀몸이 되었으나 시부모를 효성을 다해 모셨다. 어느 날 저녁 사나운 도적이 침입하자 시부모가 놀라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김씨는 도적을 향해 큰소리로 꾸짖고 시부모를 감싸 보호하며 안정시킨 뒤 조용히 숨을 거뒀다. 이은진(李殷震) 처 김씨에 대한 효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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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영해(寧海). 1486년(성종 17)에 진사시에 입격하고, 1516년(중종 11)에 문과에 합격하였다. 1522년(중종 17)에 울진군수를 지냈으며, 이후 예조정랑(禮曹正郞)을 지냈다. 이전손은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인물조에 기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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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자. 아버지는 이응명(李應命)이고, 아우는 이지면(李之冕)이다. 아버지 이응명(李應命)이 호랑이에 물려 죽자 아버지 상을 치르고 동생 이지면(李之冕)과 함께 호랑이를 찾아 나섰다. 멀지 않은 곳에서 호랑이를 발견한 두 형제가 재빨리 호랑이 앞으로 돌진하자 호랑이는 땅에 엎드렸다. 이 때 이지헌과 동생 이지면은 가지고 있던 창과 칼로 호랑이를 죽여 아버지의 원수를 갚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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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자. 15세 때 두 살 아래인 아우 이취번(李就藩)과 함께 어머니를 따라 산에서 밭을 매고 있을 때, 갑자기 큰 호랑이가 나타나 어머니를 잡아먹으려고 하였다. 이태번이 호미로 호랑이를 내려치고 이취번은 어머니를 껴안고 하늘을 부르며 통곡을 하였다. 그러자 호랑이가 끌고 가던 어머니를 버리고 머리를 수그리고 가 버렸다. 두 형제는 어머니를 업고 재빨리 집으로 돌아와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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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절기 중 가장 먼저 드는 절기. 양력으로는 2월 4일 경이며, 대한(大寒)과 우수(雨水) 사이에 든다. 입춘의 ‘입(立)’은 ‘시(始)’와 같은 의미로 봄이 시작됨을 알리는 것이다. 강릉 지역에서는 관아에서 토우(土牛)를 만들어 가농작(假農作)을 하는 입춘제를 지냈다. 강릉 향토지인 『증수임영지(增修 臨瀛誌)』에 의하면 “고을 풍속으로 매년 동지에 오곡 씨앗을 항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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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적인 생활 형태로 삶이 바뀌면서 재래시장은 점차 그 거래 규모가 줄어들고 있다. 젊은 사람들의 기호와는 잘 맞지 않는 부분이 있을 수도 있지만 재래시장은 오랜 세월 동안 우리 지역민들의 삶과 함께 해왔다. 재래시장 속에서 강릉 사람들의 삶의 모습들을 찾아볼 수 있다. 재래시장은 조상 때부터 대대로 전해 내려온 삶의 터전으로, 지역 사람들의 삶의 냄새가 배어나는 곳이다. 삶의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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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 앞바다에 위치한 육계도. 『관동읍지』, 『증수임영지(增修 臨瀛誌)』에 ‘이 섬은 강릉부 동해 상에 있고 주위가 5리 정도이며 섬은 높지 않고 지금은 파도가 깎아 평탄지가 되다시피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대동여지도』상에 강릉 근처 동해성 섬은 견조도(堅造島)와 죽도(竹島)만 표시되어 있고 이 섬들은 지금은 모두 육지와 연결된 육계도(陸繫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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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정선(旌善). 자(字)는 낙숙(樂叔). 조산대부(朝散大夫) 동몽교관(童蒙敎官) 전성명(全性命)의 아들이며 외조부는 권송(權悚)이다. 1517년(중종 12)에 별시문과(別試文科)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승정원 주서(注書)에 발탁되었다. 1531년(중종 26) 울진군수를 지냈으며, 개성판윤(開城判尹)·함흥판관(咸興判官)·강동현령(江東縣令)·평산부사(平山府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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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강릉시 강동면 모전리에 있는 조선 전기 경휘옹주의 태실(胎室) 옆에 세운 비. 강원도 강동면 모전리에 있는 태봉산 정상부에 조선 9대 왕 성종의 소생인 경휘옹주의 태실비(胎室碑)가 위치하고 있다. 태실비 뒤편으로는 봉분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나, 오래전에 이미 파헤쳐진 상태이고 태실비 주변에서는 관련 석물들은 찾아볼 수가 없다. 태실비의 재질은 화강편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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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자. 본관은 창녕. 충정공 조계상(曺繼商)의 후손이다. 지극한 효성으로 부모를 섬겨 고을에 소문이 자자했다. 상을 당하여 3년간 시묘살이를 할 때에도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조순진에 대한 효행 기사는 『증수임영지(增修 臨瀛誌)』인물조에 기재되어 있다. 조순진의 효행이 나라에 알려져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증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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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학자. 본관은 풍양(豊壤). 풍양군(豊壤君) 조신혁(趙臣赫)의 후손이다. 조시달(趙時達)은 일찍이 경학(經學)과 『사기(史記)』를 익혔다. 『예서(禮書)』를 두루 보고 『사례촬요(四禮撮要)』를 저술하여 관혼상제(冠婚喪祭)에 편리하게 이용하도록 하였다. 조시달에 대한 기사는 『증수임영지(增修 臨瀛誌)』인물조에 기재되어 있다. 가례(家禮)에 대하여 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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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자. 어버이를 섬길 때 정성을 다했다. 아버지가 목에 종기가 나서 고생하자 흑질백장(黑質白章)이라는 뱀이 효과가 있다는 말을 듣고 백방으로 구했으나 도저히 구할 수가 없었다. 그러자 손수 숲속 바위틈을 찾아다니며 큰 뱀이나 구렁이가 흑질백장과 비슷하면 무조건 잡아다 아버지에게 드렸다. 이와 같은 일을 4~5년 동안 계속하였다. 조영기에 대한 효행 기사는 『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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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무인. 진사 호인(好仁)의 아들로 용맹하였고 의기가 남달리 뛰어났다. 무과에 급제하여 병자호란 때 선전관으로 남한산성(南漢山城)에서 인조를 호위하였다. 1637년(인조 15) 정월 적진을 염탐하기 위하여 강화도(江華島)에 들어가 임무를 마치고 돌아왔다. 인조가 이를 가상히 여겨 특별히 말과 좋은 옷을 하사하였다. 또 적의 동태를 파악하라는 명을 받고 적진으로 가던 도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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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자. 어느 해 겨울 아버지가 병에 걸렸을 때 잉어가 먹고 싶다고 하였으나, 추운 날씨 때문에 도저히 잉어를 구할 길이 없었다. 그러자 잉어를 직접 잡기로 하고 동생 조정주(趙鼎周)와 함께 강가에서 단단한 얼음을 깨기 시작했다. 결국 매서운 추위에도 불구하고 잉어를 잡을 수 있었다. 집에 돌아와서 잉어를 아버지에게 먹이니, 아버지의 병이 씻은 듯이 나았다.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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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자. 부모를 봉양하는 데 지극정성으로 하였다. 어머니가 9개월 동안 중병에 시달리자 칠성단(七星壇)을 쌓고 100일 동안 치성을 드려 어머니를 낫게 하였다. 조진묵(趙晉黙)에 대한 효행 기사는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인물조에 기재되어 있다. 사림에서 효자라 칭송하며 부영(府營)에 보고하였다. 부영(府營)에서 표창하고 요역(徭役)을 면제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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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창녕(昌寧). 충정공(忠貞公) 조계상(曺繼商)의 후손으로 조근(曺瑾)의 아들이다. 1681년(숙종 7)에 문과에 올라 벼슬이 현감(縣監)에 이르렀다. 조징한에 대한 기사는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인물조에 기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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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풍양(豊壤). 조정벽(趙廷璧)의 아들이다. 1792년(정조 16)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부사(府使)에 이르렀다. 조항존(趙恒存)에 대한 기사는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에 올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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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자. 본관은 창녕(昌寧). 진사 조영진(曺英振)의 후손이다. 어려서부터 효행이 뛰어나 부모에게 아침 저녁 문안 인사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산골에 살고 있었는데, 하루는 부모가 병이 나자 약을 구하러 100리 밖에까지 나갔다. 어느덧 날이 어두워져서 집으로 돌아오던 중에 길을 잃고 헤매기 시작했다. 그 때 갑자기 호랑이 한 마리가 나타나 꼬리를 흔들며 앞길을 인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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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을 세계 교회의 최고 지배자로 받들고 그 통솔 밑에 있는 그리스도의 교파. 천주교는 조선시대의 지속적인 박해로 말미암아 학문적인 연구를 통해 천주신앙에 입문했던 지식계층의 지도자들을 잃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반면 교세는 배우지 못하고 가난한 서민층으로 점차 확대되었는데, 이에 따라 천주교의 신앙도 윤리 중심적 신앙에서, 일반 민중의 복음적인 신앙으로 변모해갔고 신앙의 중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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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강릉시 연곡면 삼산리에 있는 조선시대 옛 절터. 청학사지는 오대산국립공원 소금강 입구의 삼산초교 소금강분교장에서 서쪽으로 약 1㎞ 쯤 떨어진 절골에 남아 있다. 청학사에 대한 내력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이나 『여지도서(輿地圖書)』에 관련 기록이 전혀 보이지 않아 살필 수는 없다. 다만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사찰조(寺刹條)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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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열녀. 목릉(穆陵)[선조의 능] 참봉을 지낸 남편 최맹인(崔孟仁)이 죽자 40여 년 동안 머리를 빗지 않고 세수도 하지 않았다. 매일같이 슬피 울기를 초상 때처럼 하였다. 최맹인 처 심씨에 대한 효열 기사는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인물조에 기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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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강릉의 향리(鄕吏). 본관은 강릉. 향리로서 90세를 살아 수직(壽職)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를 받았다. 최성복에 대한 기사는 『증수임영지(增修 臨瀛誌)』인물조에 기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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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자. 본관은 강릉(江陵). 이조참판을 지낸 조은(釣隱) 최치운(崔致雲)의 후손이다. 평소에 효성이 지극하여 아버지가 병이 나자 변을 맛보며 치료를 하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3년 동안 죽만 먹으며 3년상을 지냈다. 최수정(崔受禎)에 대한 효행 기사는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인물조에 기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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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부(孝婦). 본관은 미상이고, 성(姓)은 김씨(金氏)이며 남편의 이름은 최시부(崔始溥)이다. 병이 들어 전혀 움직이지 못하는 80세의 할머니를 위해 9년 동안 지극정성으로 병수발을 하였다. 또한 이가 빠져 음식을 먹지 못하는 할머니를 위해 젖을 짜서 미음에 섞어서 먹이기도 하였다. 할머니가 돌아가실 무렵에는 자신의 손가락을 끊어 그 피를 입에 흘려 넣어 7개월을 더 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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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열녀. 본관은 미상이며 성(姓)은 박씨(朴氏)이다. 남편의 이름은 최신규(崔信珪)이다. 지극한 효성으로 시부모를 섬겼으며, 남편 최신규가 죽자 12년 동안 변변치 못한 음식을 먹으면서도 추우나 더우나 매일 한결같이 성묘를 하였다. 최신규 처 박씨에 대한 효열 기사는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인물조에 기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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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효자. 본관은 강릉(江陵). 자(字)는 정여(正汝). 최문한(崔文漢)의 후손으로 강성군(江成君) 최세건(崔世楗)의 12세손이다. 정성을 다해 어버이를 섬겼으며, 손가락을 끊어 그 피를 넣어드리는 등 효성이 지극하였다. 최심하(崔心河)에 대한 효행 기사는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인물조에 기재되어 있다. 지극한 효성으로 중학교관(中學敎官)에 증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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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강릉(江陵). 최문한(崔文漢)의 증손이며 직장(直長) 최윤행(崔允行)의 아들이다. 1465년(세조 11)에 진사와 생원 양시에 합격하였다. 1472년(성종 3)에 문과에 올라 사간원 정언으로 있었으나 간신들의 비위에 거슬려 고성군수로 나갔다. 이 때 강원도 감사 박원종(朴元宗)이 간신들이 사주를 받아 최자점을 파직시키기 위해 최자점의 재산을 조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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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강릉(江陵). 최치운(崔致雲)의 후손이며 아버지는 최주명(崔柱溟)이다. 최치운(崔致雲)의 후손으로 진사에 올라 일찍이 시문으로 명성이 높았다. 풍모가 준수하고 위엄이 있었으며 사림(士林)에서도 뛰어나 고을의 자랑으로 여겼다. 1661년(현종 2)에는 향인들과 함께 향교를 새롭게 중수하였다. 최재태에 대한 기사는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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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자. 본관은 강릉(江陵). 첨추(僉樞) 최익록(崔益祿)의 아들이다.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며 죽을 먹었고, 국상(國喪)과 인산(因山)에는 3년간 고기를 먹지 않았다. 최정검에 대한 효행 기사는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인물조에 기재되어 있다. 부사 조흥진(趙興鎭)은 최정검의 효행을 듣고 요역(徭役)을 면제해 주었다. 또한 사림에서 여러 번 관에 호소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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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열녀. 예도가 밝았으며 홀로 계신 시어머니를 정성껏 모셨다. 남편 최종학(崔鍾鶴)의 병이 위급하자 자신의 손가락을 끊어 그 피를 입에 흘려 넣어 반나절을 더 살게 하였다. 최종학 처 김씨에 대한 효열 기사는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인물조에 기재되어 있다. 마을에서 단자를 부영(府營)에 올려 포상을 받았고 요역을 면제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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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자. 최치운의 후손이다. 부모가 살아계실 때는 부모를 정성껏 봉양하였다. 아버지의 상을 당해서는 집에서 5리쯤 떨어져 있는 사천(沙川) 용연동(龍淵洞)에다 장사를 지냈으며, 3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성묘를 하였다. 하루는 새벽에 성묘를 갈 때 호랑이가 나타나 묘 앞까지 길을 인도하였다. 성묘를 마치고 돌아올 때도 매번 호랑이가 앞서서 집 근처까지 인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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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선비. 본관은 강릉. 생원 최만재(崔萬栽)의 아들이다. 1681년(숙종 7) 진사에 올랐다. 최징은 아버지 최만재(崔萬栽)와 함께 문한으로서의 임무를 맡아 수행하였다. 성품이 술을 좋아하였으나 취하여도 남과 시비를 하지 않았다. 소학대(巢鶴臺) 아래에 살면서 한가롭게 지내다 일생을 마쳐 학담주인(鶴潭主人)이라 불렸다.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에 강릉 강동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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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열녀. 28세 때 남편 최찬구(崔燦九)가 죽자 슬픔이 지나쳐 여러 번 기절을 하였다. 심씨는 대상(大祥)과 그 다음 달에 지내는 담제(禫祭)를 마치고는 음식을 먹지 않고 굶어 죽었다. 최찬구 처 심씨에 대한 효열 기사는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인물조에 기재되어 있다. 사림에서 아름다운 행실을 찬양하였으며, 『속수삼강록(續修三綱錄)』에 최찬구 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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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자. 열한 살 때 어머니가 미친개에게 물려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고을의 의원이 살펴보더니 “사람의 이가 가장 좋은 약이다.”라고 말하였다. 옆에서 듣고 있던 최창효는 곧바로 자신의 이 세 대를 뽑았다. 그리고 불에 태워 가루로 만들어 어머니의 상처에 발라 어머니를 살렸다. 최창효에 대한 효행 기사는 『증수임영지(增修 臨瀛誌)』인물조에 기재되어 있다. 사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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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효자. 아버지 최운상(崔雲祥)의 병이 위급할 때 자신의 손가락을 끊어 그 피를 아버지의 입에 흘려 넣어 병을 낫게 하였다. 최충남(崔忠男)에 대한 효행 기사는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인물조에 기재되어 있다. 최충남의 효행을 조정에서 듣고 1559년(명종 14)에 정려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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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자. 22세 때 아버지가 중병에 걸렸다. 그러자 자신의 손가락을 끊어 그 피를 아버지의 입에 흘려 넣었더니, 아버지의 병이 완쾌되었다. 최태민에 대한 효행 기사는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인물조에 기재되어 있다. 최태민(崔泰旻)의 효행을 조정에서 듣고 정려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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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자.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잃었는데 점차 자라면서 어머니의 얼굴을 알지 못함을 통탄하였다. 그러다 어머니의 무덤을 다른 곳으로 이장할 때 관을 보고 통곡하였다. 그 후 처음 상을 당하였을 때와 마찬가지로 3년 상을 치렀다. 최택항에 대한 효행 기사는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인물조에 기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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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열녀. 남편 최택후(崔宅垕)의 병이 위급하자 이씨는 자신의 손가락을 끊어 그 피를 남편의 입에 흘려 넣었다. 남편은 다시 소생했지만 오래지 않아 죽었다. 이씨는 남편의 시신을 어루만지며 대성통곡을 하다 기절하였다. 주위 사람들이 약을 써서 겨우 정신을 차렸지만 3년 동안 눈물로 지내면서 상을 마쳤다. 그 후 옷단장을 하지 않고 나물밥을 먹으며 14년 동안 문밖출입을 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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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강릉(江陵). 최필숭(崔必崇)의 아버지는 최옥연(崔玉淵)이다. 1480년(성종 11)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1486년 문과에 올라 벼슬이 충청도사(忠淸都事)에 이르렀다. 최필숭은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인물조에 기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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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자. 본관은 강릉(江陵). 교리(校理) 최자점(崔自霑)의 후손이다. 아홉 살 때 아버지의 상을 당하자 옷깃을 부여잡고 슬퍼하였으며, 비바람을 가리지 않고 날마다 성묘를 하였다. 또한 집안 살림이 가난해도 몸소 맛있는 음식을 마련하여 어머니를 극진히 공양하였다. 어머니의 병이 위독하자 자신이 대신 아프기를 하늘에 빌었으며, 어머니의 상을 당하자 시묘살이를 하면서 채식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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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열녀. 시어머니와 남편을 정성껏 섬겼으며, 시어머니 상을 당해서는 매일같이 슬퍼하며 예를 다해 장례를 치렀다. 남편의 병이 위독하자 손수 약을 지었으며, 밤에는 촛불을 켠 채 부채를 부치며 간호를 하였다. 남편이 죽자 초종(初終)을 치른 후 남편을 따라 죽으려고 했지만 자손들의 만류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 후로 평생 머리에 빗질과 세수를 하지 않았으며, 90세가 가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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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문신. 1423년(세종 5)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1426년(세종 8)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벼슬은 호조참판(戶曹參判)에 이르렀다. 함한(咸漢)에 대한 기사는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인물조에 기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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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와 조선시대 향리직의 우두머리. 나말여초 지방의 지배층인 호족의 전신이다. 신라 말에 이들은 중앙의 상대등(上大等) 이하의 관제를 본떠 당대등(堂大等)·창정(倉正)·병정(兵正) 등의 직제를 구성했다. 고려 건국 후에 지방제도를 정비하면서 향리제도도 점차 정비하여 983년(성종 2) 당대등을 호장으로 개칭했다. 고려시대에는 지방의 토호적(土豪的) 존재로서 상당한 세력을 가졌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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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자. 본관은 미상이며, 아버지는 업유(業儒) 홍봉산(洪奉山)이다. 효행이 뛰어났으며,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3년 동안 죽을 먹으며 상을 치렀다. 홍순대(洪順大)에 관한 효행 기사는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인물조에 기재되어 있다. 관청에서 홍순대의 지극한 효행을 듣고 호역(戶役)을 면제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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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열녀. 시부모를 극진히 섬겼으며 아내로서의 행실도 매우 뛰어났다. 시어머니가 죽자 몹시 슬퍼하였으며, 이 때 남편 황기윤(黃基倫)도 어머니의 상을 치르다 병을 얻어 위독해졌다. 매일 남편 대신 아프게 해달라고 하늘에 빌었으나 남편의 병세는 나아지지 않았다. 그러자 “며느리가 되어 시아버지에게 효도를 다하지 못했으니, 엎드려 바라옵건대 시아버지께서는 저를 생각하지 말아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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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효자.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웠다. 어머니가 중병에 걸려 위독하자 자신의 손가락을 끊어 그 피를 입에 흘려 넣어 어머니를 다시 살게 하였다. 그 후 어머니는 14년을 더 살았다. 황손길(黃遜吉)에 대한 효행 기사는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인물조에 기재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