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30179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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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碑 |
영어음역 | bi |
영어의미역 | monument |
분야 | 문화·교육/문화·예술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강원도 강릉시 |
집필자 | 임호민 |
[정의]
사적(事蹟)을 기념하기위해 세우는 돌.
[개설]
비(碑)는 보통 비석 혹은 석비라고 하는데 우리나라에는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 까지 석비가 그 숫자를 셀 수 없을 만큼 전국 곳곳에 많이 남아있다. 석비는 묘비와 탑비·능묘비 외에도 비문의 내용이 알려주는 역사적 사료로서의 금석문의 가치나 서체가 보여주는 서예사적 가치, 그리고 석비의 양식의 변천을 통해 미술사적 가치를 함께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석비는 세워진 장소, 용도, 명칭 및 내용에 따라 다양하게 분류되지만 대체로 순수비, 기공비, 신도비, 묘비, 능비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비는 형태에 따라 비와 갈로 나누는데, 비신의 윗부분이 4각인 것을 비(碑)라 하고 위쪽을 원형으로 둥글게 다듬은 것을 갈(碣)이라고 한다. 석비는 기본적으로 비를 받치는 대좌와 비문을 새기는 비신, 비신을 덮는 개석의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있다.
우리나라에는 언제부터 석비가 세워지기 시작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조선말과 대한제국시기에 송덕비, 불망비, 선정비, 추모비 등의 비를 세우는 것이 유행처럼 되어서 여러 가지 폐단을 자아내기도 하였다. 이런 종류의 비는 국가와 관계없이 지방의 아전이나 향민에 의해 세워진 것이므로 이면에 숨은 향민의 애환을 알 수 있는 좋은 자료들이다. 강릉 지역에도 다양한 종류의 비가 전해지고 있다.
강릉에 분포되어있는 비로는 조선시대의 경우 2품 이상의 관직을 지낸 자, 또는 공신, 석유(碩儒)등의 경우에 왕명에 의해 세우는 신도비, 2품 이하 5품관까지 지낸 경우 세우는 묘비, 지방관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선정비와 전장기적비(戰場紀蹟碑) 등의 기념비와 충효비, 척화비, 유허비 등의 기타비가 산재하고 있다.
[역사와 변천]
비석은 비(碑)와 갈(碣)로 나누기도 하는데, 비는 긴 직사각형 모양으로 잘 다듬은 것으로 5품 이상 고위 관료만이 세울 수 있었다. 갈은 자연석의 한쪽 면만을 다듬어서 둥글게 만들었으며 6품 이하가 쓰는 비석이었다.
그러나 이 둘은 엄격하게 구분되지 않고 통용되는 예가 많았다. 비와 갈 모두는 중국 한(漢)나라 때 묘비(墓碑)로부터 출발하여 발달했으며, 원래는 아무런 글자도 새기지 않은 백비(白碑)였다가 역시 한나라 때부터 죽은 이의 공덕을 기록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종류]
비석의 종류는 비문의 내용에 따라 여러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어떤 사실이나 인물, 건물의 내력을 기록한 기적비(紀績碑) 또는 사적비(事蹟碑)가 있다. 강릉 지역에는 오봉서원기적비, 화산재기적비, 고려부마도위문한공의 유적비 등 다수가 있다.
개인의 인적사항이나 행적을 기록한 대표적인 비로는 묘표와 신도비가 있다. 묘표는 무덤 앞에 세워 그 주인공의 신원과 약력을 기록한 것으로 그 수는 상당히 많다. 그리고 신도비는 능묘의 동남쪽에 세우는 것이 일반적인데 주로 3품 이상의 고관을 지낸 경우에 세운다. 강릉 지역에는 김주원 신도비, 최치운 신도비, 최응현 신도비, 김광철 신도비, 최입지 신도비, 김자흠 신도비, 박계립 신도비 등 13개가 전한다. 국왕의 순수(巡狩: 임금이 나라 안을 두루 살피며 돌아다니던 일) 사실을 기록한 순수비가 있는데 강릉 지역에는 이러한 성격의 비는 현재까지 전하지 않는다. 또한 승려의 사리탑 부근에 세워 그 생애와 행적을 적은 탑비(塔碑)가 있다. 강릉 지역에는 고려 때 세워진 낭원대사오진탑비가 있다. 개인 또는 단체의 공적을 기록한 기공비(紀功碑), 지역사회에 큰 공헌을 한 경우 지역민들이 주도하여 세우는 송덕비 또는 유허비(遺墟碑)가 있다. 향교나 서원의 내력을 기록한 묘정비(廟庭碑) 등이 있다. 묘정비는 오봉서원 묘정비와 송담서원 묘정비가 전한다. 또한 효행이나 열행의 사실을 기록한 정려비 또는 효열비가 있다.
[형태 및 제작방식]
비석의 외형은 일정한 형식을 갖추고 있다. 보통 용의 머리에 거북 몸통을 한 귀부(龜趺)가 몸돌인 비신(碑身)을 받치고, 비신 위에는 이무기가 서려 있는 모양의 이수가 올려져 비석을 보호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귀부는 기단 형태로, 이수도 지붕 형태로 바뀌게 된다.
이수에는 그 비문의 제목인 제액(題額)을 쓰는데, 한자 서체 중 전서(篆書)를 쓰게 되므로 보통 전액(篆額)이라고 한다. 그리고 비신의 앞면을 비양(碑陽) 혹은 비표(碑表), 뒷면을 비음(碑陰)이라고 부르고, 비음에 적는 글을 음기(陰記)라고 한다.
비문의 작성 방식은 종류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기본 순서는 공통된다. 즉 비문에 들어갈 기초 자료를 수집하여 문장을 짓고, 제목과 내용을 정성들여 쓴 다음 석공(石工)이 이를 받아 다듬은 돌에 대고 정교하게 조각을 한 다음, 귀부, 이수와 맞추어 건립하는 것이다.
특히 통일신라 선종승려 들의 탑비(塔碑)를 보면, 국왕이 명을 내려 최치원(崔致遠) 같은 당대 최고의 문장가에게 비문을 짓게 하고, 신라의 명필인 김생(金生)의 글씨를 일일이 모아서 고급 석재에 조각한 경우도 있다. 조선 중기 사대부의 묘비 가운데도 당대의 문장가요 명필로서 양송(兩宋)이라 불리던 송시열, 송준길의 문장과 글씨로 쓴 것이 있어, 전통시대에 비석과 비문이 갖는 의미와 중요성을 짐작하게 한다. 강릉 지역에는 율곡 이이, 봉래 양사언 등이 쓴 비문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