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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하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301175
한자 泥河
영어음역 Niha Stream
분야 지리/자연 지리
유형 지명/자연 지명,지명/고지명
지역 강원도 강릉시
집필자 김창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고지명|하천

[정의]

신라의 북방 경계가 되는 하천.

[개설]

신라는 니하(泥河)를 경계로 삼국시대에는 고구려와 경계를 이루었고, 통일신라시대에는 발해와 경계를 이루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신당서(新唐書)』에 니하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니하의 위치에 대한 논란은 두 기록의 니하를 같은 지역으로 볼 것인가 또는 다른 지역으로 볼 것인가에서 비롯되었다.

[위치비정]

『삼국사기(三國史記)』에 기록되어 있는 니하의 위치에 대한 연구는 대체로 덕원(德源) 설, 함흥(咸興) 일대설, 남한강 상류설, 강릉 일대설, 낙동강 상류설, 소양강 설로 구분할 수 있다.

덕원 설은 일찍이 안정복(安鼎福)유득공(柳得恭)니하의 위치를 덕원으로 보았으며, 김정호(金正浩)도 신라와 고구려 관계에 있어서 니하를 덕원으로 이해하였다.

함흥 일대설은 일본 학자 이케우치[池內宏]에 의해서 제기되었는데, 그는 고원(高原) 이북 함흥 이남으로 비정하였다.

남한강 상류설은 일본 학자 쓰다[津田左右吉]가 처음 제기하였는데, 영춘(永春)·단양(丹陽) 부근의 남한강 상류를 주목하였다. 남한강 상류설은 이후 주정개장(酒井改藏)·이강래(李康來)·정운용(鄭雲龍)·이노우에(井上秀雄) 등에 의해서 계승되었으며, 서영일(徐榮一)도 논리는 다르지만 정선 일대를 주목하였다.

강릉 일대설은 정약용(丁若鏞)이 주장한 이후 비교적 폭넓은 지지를 받으며 계승되었지만, 구체적인 위치는 연구자마다 다르다. 이병도(李丙燾)는 강릉의 성남천(城南川)으로 보았고, 서병국(徐炳國)·김택균(金澤均)·장창은(張彰恩)은 하슬라 사람을 동원하여 성을 쌓았으므로 니하가 강릉과 가까운 곳이라는 전제로 대관령 북쪽의 니현(泥峴)에서 발원하는 연곡천(連谷川)을 주목하였다. 조이옥(趙二玉)·김영하(金瑛河)·이인철(李仁哲)도 구체적인 위치를 비정하지는 않았지만, 강릉 일대설에 동의하고 있다.

낙동강 상류설은 리지린·강인숙과 양태진(梁泰鎭)으로 대표되는데, 이들은 하슬라를 삼척 이남의 울진(蔚珍) 일대로 비정하였다. 한편 마쓰이(松井) 등은 북한강의 지류로서 소양강을 주목하였다.

통일신라시대 발해와 관련하여 『신당서』에 기록되어 있는 니하의 위치에 대해서는 대체로 덕원 설, 함흥 일대설, 대동강(大洞江) 설, 강릉 일대설, 용흥강(龍興江) 설로 구분할 수 있다.

덕원 설은 안정복유득공니하의 위치를 덕원으로 보았고, 함흥 일대설은 이케우치가 고원 이북 함흥 이남으로 비정하였다.

대동강설은 김정호가 신라와 발해의 경계로서의 니하는 대동강이라 하였으며, 강릉 일대설은 서병국이 연곡천으로 비정하였다.

용흥강 설은 마쓰이가 『삼국사기(三國史記)』「지리지(地理志)」에 인용되어 있는 가탐(賈耽)의 『고금군국지(古今郡國志)』의 기록에 의거하여 신라와 발해의 경계인 정천군(井泉郡)을 지금의 덕원으로 단정하여 덕원과 그 북쪽의 영흥(永興) 사이의 용흥강으로 추정하였다. 따라서 용흥강 설은 덕원 설을 구체적으로 세분화한 것이다.

이와 같이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신당서』에 기록되어 있는 니하의 위치를 같은 지역으로 볼 것인가 또는 다른 지역으로 볼 것인가에 따라서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관련기록]

신라는 니하를 경계로 삼국시대에는 고구려, 남북국시대에는 발해와 북방 경계를 이루었는데 이것이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신당서』에 기록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삼국시대에 고구려와 경계를 이루었던 것은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남북국시대에 발해와 경계를 이루었던 사실은 『신당서』에 각각 기록된 것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삼국시대와 남북국시대의 니하는 따로 구분해서 파악하는 것이 보다 합리적일 것이다. 왜냐하면 남북국시대 신라의 영토는 삼국을 통일한 이후에 고구려의 영토를 차지함으로써 이전보다 더욱 확대되었기 때문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니하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은 125년(지마이사금 14)이다. 신라는 북방에 있던 말갈의 침입에 대비하여 지금의 대관령(大關嶺)에 목책을 세워 방어하고 있었는데, 말갈이 대령책을 습격하고 니하를 지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당시 신라가 이곳까지 진출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102년(파사이사금 23)에 실직국(悉直國)[지금의 삼척]을 복속하였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이와 같이 신라는 일찍부터 강릉 지역까지 진출한 결과 이곳을 중심으로 북방의 경계가 형성되었다.

따라서 삼국시대의 신라는 대체로 연곡천을 중심으로 고구려와의 북방 경계를 이루었다가 남북국시대에는 영토를 확장하여 용흥강 부근을 중심으로 발해와 북방 경계를 형성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1.12.14 2011 한자 최종 검토 가탐(賈耽)의 -><인명>가탐(賈耽)</인명>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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