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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조리 여성 노인의 삶과 6·25전쟁 이전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209A030205
지역 경상북도 고령군 고령읍 연조2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박경용

[결혼하고 4년 만에 일어난 6·25전쟁]

고령읍 연조2리에 살고 있는 신임이[1932년생] 씨는 일제 강점기 거창군 북산면 황산에서 무남독녀로 태어났다. 그녀는 어려서 어버이를 여의고 5촌 당숙의 슬하에서 성장했다. 신임이 씨는 여자들은 길쌈만 잘하면 되는 줄 알고 길쌈과 바느질하는 데만 신경을 써 아직까지 한글을 깨치지 못했단다.

신임이 씨는 15세 때 22세의 남편[고 최월달]과 혼인 후 대구시 산격동에서 신혼 생활을 시작했다. 3형제 중의 장남이었던 남편은 타일 기술공으로서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었지만, 결혼 후 4년 만에 터진 6·25전쟁은 그녀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다.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온 북한 인민군은 개전 한 달 만에 대구 지역까지 위협했다. 대구에서 부산까지 옮겨 간 정부는 다급해진 나머지 길거리 모집 등의 비합법적인 방법까지 동원해 가며 젊은이들을 강제 징집시켰다. “늙은 것은 보국대[군수 물자를 운반하는 조직]로, 젊은 것은 군인으로 붙들어 갔다.”는 그녀의 말은 당시 상황의 급박함을 말해 준다.

[남편은 행방불명되고 시동생은 전사하고]

신임이 씨가 19세 되던 1950년 7월 어느 날, 26세이던 남편도 그러한 과정에서 전쟁터로 내몰렸다. 당시 남편은 강제 징집을 피해 마당가 감나무 밑에 파놓은 굴속에 숨어 지내기도 했다. 남편이 입대하고 나자 나머지 두 명의 시동생도 차례로 징집되었다.

남편이 입대한 얼마 후 전국 각처의 이른바 ‘꽃각시들’이 훈련소가 있던 제주도로 밤배를 타고 단체로 면회 갔다. 생사를 기약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전장으로 투입되기 직전 마지막 상면을 위한 배려였다. 머리를 깎고 있는 모습이 똑같아서 남편이 옆에 와도 알아보기 힘들었다. 이것이 신임이 씨가 본 남편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면회 이틀 후 남편은 곧바로 경상북도 영천 전투에 투입되었다는 소문을 전해 들었다. “군에 가고는 아직 전사 통지서조차도 안 오더라.”고 말하듯이, 신임이 씨의 남편은 이후 지금까지 살았는지 죽었는지 소식 한 장 없다. 더욱 안타깝게도 그녀의 시동생들까지 모두 돌아오지 않았다. 시동생 한 명은 전사 통지서와 유골함이 왔지만, 다른 한 명은 남편과 마찬가지로 아직까지 생사조차 알 길이 없다.

사망일조차 모르지만, “귀신이나 올란가 싶어 제사를 지낸다.”는 신임이 씨의 말 속에는 아직도 무사 귀환을 기다리는 간절한 소망이 담겨 있다. 이후 그녀는 아들 하나를 키우며 힘들게 살아 나왔다. 한때는 중이 되려고 여러 사찰을 전전하기도 했단다.

홑몸으로 아이를 키우며 살아가는 삶은 고달픈 생활의 연속이었다. 전사자 유가족에게 나온 대가는 소금 한 부대와 광목 반 필이 전부였다. 결혼 당시 호적이 3년이나 늦어 혼인 신고조차 안 되어 전쟁미망인으로 인정받을 수도 없었다. “죽은 사람하고 어떻게 혼인 신고하나요?”라는 말처럼, 그녀는 13년 동안 홀로서기를 하며 살아왔다.

[아들도 잃고 재혼 후 연조리로 들어오다]

어려운 삶 속에서도 어린 아이를 생각하며 살아왔지만, 유일한 혈육인 아들조차도 중1 때 병으로 죽고 말았다. 이제 더 이상 마음 붙일 곳이 없자 신임이 씨는 재혼을 결심했다. 32세 때 9년 연상의 새 남편을 만나 경상남도 합천군 봉산면 상현리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5년 후에는 새로운 터전을 찾아 연조리로 이사와 정착했다.

신임이 씨는 연조리에서 40여 년 동안 줄곧 농사를 지으며 살아왔다. 밭에는 채소를 심어 시장에 내다 팔고 농한기에는 도로 공사나 집짓는 곳에 가서 노동도 했다. 하지만 재혼한 남편 사이에는 자녀가 없어 삶의 한 곳은 여전히 허전했다. 재혼한 남편마저 그녀가 59세 때인 결혼 27년 만에 영영 떠나갔다.

신임이 씨는 영세민 가정에 지원하는 국가의 도움으로 인생의 말년을 보내고 있지만, 삶에 대한 애착은 어느 누구보다도 강하다. 신임이 씨는 “5년 전부터 공부에 대한 심중이 들더라.”고 하면서, 한글 해독에 대한 강한 열의를 내비친다. “내 죽도록 해도 이야기 다 못 한다.”는 말처럼, 격동의 시대를 살아온 신임이 씨의 가슴속에는 정말 원(願)과 한(恨)이 많은 듯했다.

[정보제공]

  • •  신임이(여, 1932년생, 고령읍 연조2리 주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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