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9C0301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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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경상북도 고령군 우곡면 도진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박경용 |
도진리 토박이 박태곤(朴太坤)[1933년생] 씨는 도진마을 초대 새마을 지도자로서 우리나라 새마을 운동의 산증인 중 한 사람이다. 박태곤 씨는 1971년 3월 17일 도진리 새마을 지도자로 임명된 후 16년 동안이나 마을 발전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해 왔다. 박태곤 씨의 기억으로는 우리나라 새마을 운동은 1971년 1월 14일 시작되었다고 한다.
박태곤 씨는, 경상북도 포항시 기계면 문성리와 청도군 이서면 신도리 주민들이 새마을 운동 발상지 논쟁을 벌이기도 하지만, 도진리 새마을 운동의 역사도 이에 버금갈 정도로 오래되었다고 자부하였다.
[새마을 운동의 첫 사업 도진교 축조]
전국적으로 새마을 운동이 시작되면서 도진리에서 가장 먼저 시행한 일은 협동권 새마을 사업의 일환으로 실시한 마을 앞 회천(會川) 물길을 가로지른 도진교(渡津橋) 축조 공사였다.
도진리의 대부분 전답은 강 건너편에 있어서 별도로 농선(農船)을 두고 거름과 수확한 곡식을 실어 날랐기 때문에 농사일이 여간 힘들지 않았다. 강 건너 사람들 역시 급한 환자라도 발생하면 대구 등지의 큰 병원으로 이송하는 데 큰 애로를 겪었다.
도진리 새마을 운동의 첫 사업인 도진교 축조 공사는 3700만 원의 예산으로 1971년 4월 17일 시작되어 같은 해 10월 17일에 완료됐다.
당시만 해도 레미콘이나 포크레인 같은 중장비가 턱없이 부족하던 시절이라 도진리를 비롯한 야정1리, 야정2리, 대곡리, 속리, 사전리 등 회천 양안 6개 마을 사람들이 공사에 동원되었다.
특히 교각을 세우는 작업 과정에서는 마을별로 교대로 인력이 동원되어 모래와 자갈, 시멘트를 물에 반죽하여 거푸집 안을 채웠다. 강 건너 속리 출신으로 당시 대구지방법원에 근무하던 판사[최재호]도 짬을 내어 도진교 건설 현장에 나와 일을 거들었을 만큼 도진교 축조는 일대 주민들의 숙원이자 출향민에게까지 큰 관심을 촉발시킨 큰 사업이었다.
“다리 만들 때는 동민들이 밤잠까지 설쳐가며 일했습니다.”라는 박태곤 씨의 말처럼, 야간에도 횃불을 켠 채 교량 건설 작업을 진행하였다. 또 많은 일들이 사람 손으로 행해졌기에 단단하게 이루어지지 못한 부분도 생겨 도진교는 준공 후 4년 만에 큰물로 두 동강이 나고 말았다. 도진교는 이후 재축조 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른다.
[마을 안길도 넓히고 지붕과 담벽 개량 공사도 했어요]
도진리 새마을 운동의 두 번째 사업은 마을 안길 넓히기와 지붕 및 담벽 개량 공사였다. 당시 대부분을 차지했던 초가지붕은 슬레이트나 양철 지붕으로 바뀌었고, 지붕 위는 청색이나 붉은색 페인트로 칠해졌다. 지붕 개량으로 장마철에 집 안으로 비가 새는 일도 없었고, 해마다 볏짚과 새끼줄로 용두레를 틀어 초가지붕을 새로 고쳐야 하는 번거로움도 해소되었다.
집 담벽 개량과 마을 안길 넓히기 사업은 동시에 이루어졌다. 기존의 담벽은 대부분 돌이나 흙으로 만들어졌다. 이는 자연 자원의 활용과 원활한 통풍 등 장점도 크지만, 겨울철 보온의 어려움과 붕괴로 인한 안전상의 문제도 있었다. 특히 마을 내부 도로가 좁아 농기계 운행에도 상당한 애로가 있었다. 이에 기존의 돌담을 헐어 블록으로 교체하고, 동시에 마을 안길을 넓혔다. 아무런 보상이 없어 이해 당사자인 일부 마을 사람들과는 갈등도 야기되었지만, 박태곤 씨는 그럴 때마다 새마을 운동의 취지를 설명하며 일일이 설득시켰다.
세 번째 새마을 사업은 마을 환경 청결 운동이었다. 도로 가의 잡풀 매기를 비롯해 마을 안길 쓸기도 주기적으로 실시했다. 근면, 자조, 협동의 새마을 정신을 함양하는 일에도 신경을 썼다. 도진리는 고령박씨 집성촌으로서 새마을 운동과 관련한 일들이 비교적 원활히 이루어졌다고 박태곤 씨는 옛날을 회상했다. 그러면서 자신이 새마을 지도자로 일한 16년 동안 한결 달라진 모습의 마을이 자랑스러웠다고 말했다.
[변함없는 마을 사랑으로 최선을 다하다]
1987년 새마을 지도자 자리를 후배에게 넘겨 준 후에도 박태곤 씨의 마을 사랑은 변함이 없다. 도진리가 자랑하는 충효 전통을 기리고 본받아 널리 알리기 위한 ‘충효마을’ 지정을 위해 박태곤 씨는 2년 동안 지속적으로 경상북도 도청을 드나들었다. 유관 자료를 수집해서 정리한 후 이를 관계 기관의 관련자들에게 제시하며 지정의 당위성을 설득시켰다. 그러한 노력으로 도진리는 1997년 경상북도 내 두 개의 경합 마을을 제치고 충효마을로 지정되었다. 2005년 마을 안에 건립된 도진충효관은 이와 같은 노력의 결실이었다.
[정보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