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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9B030103
지역 경상북도 고령군 쌍림면 합가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박경용

[타고난 종부 김태문 씨]

종부(宗婦)는 종가를 대표하는 종손의 아내로서 한 종가의 살림을 도맡아 꾸려 나간다. 종부의 가장 큰 덕목은 넉넉한 마음 씀씀이로 접빈객에 소홀함이 없어야 하고, 조상을 정성으로 섬기는 일이다. 올해 여든을 맞는 개실마을의 김태문(金太文)[1931년생] 씨는 선산김씨[일선김씨] 문충공파(文忠公派) 17대 종부이다. 김태문 씨는 “다시 태어나도 이 집안과 인연을 맺어 종부를 한 번 더 해 보고 싶제. 그러면 정말 멋진 종부가 될 수 있을 것 같은데…….”라면서, 남들은 한 번도 힘들어하는 종부를 다시 한 번 더 멋지게 해 보고 싶어하는 사람이다.

이러한 김태문 씨를 가리켜 집안사람들은 ‘타고난 종부’라고 입을 모은다. 실제로 동네 친척들도 “사람의 형태는 있어도 속이 없는 사람”이라면서 후덕한 그녀의 마음 씀씀이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면서 “집 안에 풀 한 포기 허투루 자라게 하지 않을 정도로 부지런하며, 언제 손님이 닥치더라도 모든 준비가 되어 있을 정도로 살림 준비에도 빈틈이 없다.”고 칭찬해 마지않았다. 이에 김태문 씨는 “그저 종가에 오면 어설프지 않고 훈훈하다는 마음이 들 정도로 애쓸 따름이다.”라면서 겸손해한다.

[선대 전통을 간직하여 이어 주는 게 큰 임무]

김태문 씨는 선대의 전통을 소중히 간직하고 이를 후손들에게 잘 알리는 것이 종손과 종부의 가장 큰 임무라고 말한다. 6·25전쟁 때는 한창 폭격이 심할 때 남편과 시어머니와 함께 사당의 신주(神主)와 유품들을 안전하게 보존하려고 집 뒤 대나무밭에 토굴을 한길이나 넘게 파서 독에 넣어 묻기도 했다. 조상이 돌보았든지 신주를 옮겨 놓은 곳을 비껴 포탄이 떨어졌고, 종가 옆 33칸짜리 집은 포탄에 맞아 타 버렸지만 종가는 그대로 남았다.

20여 년 전에는 불천위 제사 때 성종 임금으로부터 하사받은 가보인 제주병(祭酒甁)을 다락에서 들고 내려오다 굴러 떨어졌지만, 술병에 얼마나 신경을 썼던지 팔은 며칠 동안 쓰지 못했지만 술병은 깨지지 않았다고.

김태문 씨의 종부론은 조상 받들기와 남편에 대한 태도에서도 나타난다. 딸들이 1년 열두 달 끊임없이 제사를 지내는 엄마의 모습에 제사 많은 집에는 시집가지 않겠다고 하자, “조상을 돌보지 않고 어떻게 여자 된 도리를 다할 수 있겠느냐?”고 설득해 세 딸 모두를 맏이에게 시집보냈다. 아울러 시어머니가 가르친 대로 김태문 씨는 종손[김병식]인 남편을 사가의 남편이기보다는 문중의 대들보인 공인(公人)으로 항시 생각해 왔다.

[시어머니의 자상한 가르침이 큰 힘이 되어]

불천위 제사를 비롯한 ‘4대 봉제사’와 명절 차례, 묘사 등 조상 봉제사는 거의 매달 다가왔다. 사흘이 멀다 하고 점필재 종택 문충세가(文忠世家)를 드나드는 손님맞이도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규모가 작지 않은 기본적인 종가 살림을 빈틈없이 행하기도 만만찮았으나 김태문 씨는 6남매[3남 3녀]의 자녀들 역시 잘 키워 냈다.

17세의 어린 나이에 시집와서 이런 일들을 대과 없이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은 시어머니의 자상한 가르침이 큰 힘이 됐다고 김태문 씨는 말했다. 시집와서 밥을 못해 울고, 빨래를 못해 울고, 친정 생각에 우는 철부지를 시어머니는 한 번도 나무라지 않고 하나하나 꼼꼼하게 가르쳐 주었다. 또 종부의 도리를 몸소 실천함으로써 스스로 체득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고.

[집안의 풍습을 지키는 일이라 생각하고 열심히]

김태문 씨는 시집을 온 후 시할머니의 3년 빈소에 갖추는 시어머니의 정성과 예를 보고 종부의 마음가짐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아침저녁으로 빈소에 상식(上食)을 올릴 때도 놋그릇 7첩 반상기에 정성스럽게 음식을 담고, 드나들 때마다 항상 인사를 드리면서 그날 있었던 일들을 빈소에 고하는 것을 보고 종가의 가풍을 익힐 수 있었다.

시집온 이듬해 시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는 유월장(踰月葬)을 치렀다. 달을 완전히 걸러 다음 달에 장례를 하면서도 매일 밤 12시가 지나서 곡을 하고 새벽에도 곡하는 예를 갖추었다. 이에 대해 김태문 씨는 “요즘은 3일장이라도 상주가 힘들다는데, 3개월을 하니 힘들지요. 집 안의 풍습을 지키는 일이라 생각하고 열심히 했습니다만, 모자라는 점이 많았을 겁니다.”라면서 당시를 회상한다.

이제 김태문 씨는 팔순을 넘겨 기력도 쇠하고 기억도 엷어졌다. 하지만 18대 종부가 될 맏며느리[김향기, 1959년생]가 있어 마음은 든든하다. 차종부인 맏며느리에게 수시로 향후 다해야 할 종부의 일과 도리를 가르쳤고 또 기대감 못지않게 잘 해 나가기 때문이다. 김태문 씨는 지금은 비록 장남이 직장일로 서울에 살고 있지만, 언젠가는 며느리가 자신의 뒤를 이어 종부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다해 줄 것으로 믿고 있다.

[정보제공]

  • •  김태문(여, 1931년생, 쌍림면 합가리 주민, 선산김씨[일선김씨] 문중공파 17대 종부)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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