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9B0301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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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경상북도 고령군 쌍림면 합가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박경용 |
[인민군과 동숙하며 종가를 지키다]
점필재 김종직 선생의 17대 종손 김병식[1933년생] 씨는 서울에서 유학하고 있던 17세 때 6·25전쟁을 맞았다. 그는 전쟁이 일어나자 누나와 생질과 함께 서울을 출발하여 포연 속을 걸어서 꼬박 한 달 만에 고향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발바닥은 불어 터져 피고름이 줄줄 흘렀다. 종가(宗家)인 문충세가(文忠世家)는 6·25전쟁의 포탄에도 건재했다.
그런데 고향집 사랑채는 후퇴한 군경[충북도경]의 집무실이 되어 있었다. 어머니는 피난을 종용했지만, 그는 “종가를 지키겠다.”면서 피난가지 않았다. 무사 귀환했다는 안도의 숨을 내쉰 지 며칠 되지 않아 곧바로 인민군이 들이닥쳤다. 이번에는 종가 사랑채가 인민군 장교들이 집무하는 중대본부로 쓰였다.
종가 안채 한 칸은 그들의 감방이 되었다. 나머지 병력들은 마을의 여러 가옥들에 분산 기거했다. 온 마을에 인민군이 득실대는 와중에 종손 부부는 어머니와 종가 안채의 다른 방 한 칸을 지켰다. 9·28서울 수복으로 그들이 물러날 때까지 약 45일 동안을 그렇게 생활했다.
[점필재 할아버지가 돌봤는지 인명 손실은 없었어]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국군과 인민군 사이에 치열한 교전이 일어났다. 인민군은 강을 건너 대구를 접수하려 했고, 국군은 낙동강을 최후 방어선으로 사수하려 했다. 수많은 인명 피해가 났던 경상북도 칠곡의 다부동(多富洞) 전투도 이때 일어났다. 달성군 위천과 고령을 잇는 낙동교가 아군에 의해 폭파된 것도 이때였다.
인민군에게 타격을 가하기 위한 국군의 비행 공습도 잇따랐다. 그 과정에서 48호나 되는 개실마을의 가옥들이 불타거나 파괴됐다. 담을 사이에 둔 조선 철종 대의 건물인 32칸짜리 가옥도 불탔다. 이 가옥은 우삼각의 격조 높은 형태로서, 당대 시류에 어긋난다 하여 암행어사의 고발로 벌금 1000냥을 물었던 곳이다. 다행히도 이곳은 2010년 현재 전통 시대 건축 문화의 가치를 인정받아 고증을 거쳐 본래 모습으로 복원 공사가 진행 중이다.
이런 와중에 문충세가도 지붕이 뚫리고 벽에 총탄 파편이 박히는 등 여러 곳이 손상되었지만, 김병식 씨의 말대로 ‘[점필재] 할아버지가 돌봤는지’ 비교적 온전했다. 또 가옥은 많이 손실됐으나 300여 명의 일족들은 다행스럽게도 무사히 살아남았다.
공습이 올 때마다 인민군들은 “항공!”이라고 외치면서 호각을 불며 나무 밑으로 피하곤 했다. 피난을 못간 마을 사람들도 그렇게 했다. 김병식 씨는 당시를 회상하고 한숨을 내쉬며, “그때 살아나온 거 지금 생각하면 꿈…… 구운몽 같아요. 우째 살았던가 싶어요. 6·25동란 때 우리가 여기서 고생한 거 말도 못해요.”라는 말로 당시의 절박한 상황을 대신했다.
[대나무 숲 토굴 속에 종가 유물을 숨기다]
6·25전쟁 때 전국의 수많은 문화재가 불타거나 망실됐다. 선산김씨[일선김씨] 종가 역시 대대로 전해져 온 귀중한 물건들을 많이 잃어버렸다. 전쟁 당시 김병식 씨는 종손으로서 조상들이 남긴 각종 서책과 교지를 비롯한 100여 점의 유품들을 어떻게 지킬 것인지 고민하다가, 한밤중에 집 뒤 대나무 숲에 한 길이나 넘는 깊이로 땅을 파서 독을 묻고 그 속에 사당의 신주(神主)와 유품들을 보관했다고 한다. 이런 지혜와 노력 덕분에 김병식 씨는 조상들의 유품을 지금까지 온전히 보존하고 있다.
전쟁이 끝나자 낙동강을 건너 대구나 경상북도 청도 등으로 피난 갔던 마을 사람들도 돌아왔다. 모두들 힘겨운 모습이었지만, 전쟁의 상흔을 지우기 위해 온 힘을 다해 서둘러 마을 복원에 나섰다. 모두가 점필재 선생의 일족들인지라 쌀 한 톨이라도 서로 나누며 어려움을 극복했다고 한다.
[정보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