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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29B010106
지역 경상북도 고령군 쌍림면 합가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정동락

개실마을점필재 종택에는 김종직과 그 후손들이 남긴 유품들이 문화재로 전해 온다. 이 유물들은 1985년 10월에 ‘점필재 문적 유품 및 종가 문서’라는 이름으로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09호로 지정되었다. 유품은 『당후일기(堂后日記)』 등 서책 5책, 벼루 등 유품 14점, 교지 등 고문서 151매 등 총 170여 점에 이른다.

점필재 종손인 김병식 씨는 “6·25전쟁 때 인민군들이 마을로 들어왔을 때 이 유품과 사당의 신주를 보존하기 위해 한 밤중에 집 뒤 대나무 숲에 굴을 파고 독을 묻고 그 속에 넣어 두었어요. 점필재 할배[할아버지]의 손때가 묻은 것들로, 우리 할배의 분신과도 같은 것이지요. 그같이 소중한 것을 내 대에서 없어지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 후로도 유품이 마음에 걸려 출타 한 번 제대로 못했습니다. 무탈하게 후세에 전하는 게 내 소명이라 생각합니다.”라고 입버릇처럼 말한다.

이처럼 점필재 종택에서 소장하고 있는 문화재들은 김종직이 직접 손으로 만진 수택(手擇) 유품, 또는 그 후손들과 관련된 것들이다. 이 문화재들은 지난 350여 년간 점필재 종손들을 비롯한 후손들이 온 몸으로 지켜 온 개실마을의 보물들이다.

[점필재 종택의 보물들]

『당후일기』 : 김종직 선생이 52세 때인 1482년(성종 13) 승정원에 있으면서 쓴 기록이다. 『당후일기』는 보통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의 별칭으로 불린다. 표지를 제외하고 모두 44장이며, 크기는 가로 21.9㎝, 세로 39.1㎝이며, 총 92쪽으로 이루어져 있다.

표지에는 필재당후일기(畢齋堂后日記)라고 쓰여 있다. 서체는 행초서체(行草書體)이고, 재질은 한지(楮紙)이다. 처음 2장과 마지막 1장은 약간 훼손되어 있으나, 나머지는 보관 상태가 양호하다. 일기의 내용은 1482년(성종 13) 11월 1일부터 12월 25일까지의 약 두 달 분이 수록되어 있다.

상아홀(象牙笏) : 홀(笏)은 관복과 함께 쓰이는 것으로 신하들이 왕을 뵐 때 손에 쥐는 도구로, 옥이나 상아, 나무 등으로 만들었다. 왕의 홀은 옥으로 만들며 규(圭)라고 하였다. 원래는 왕의 가르침이나 임금에게 올리던 글을 기록하여 잊지 않으려는 실용적인 용도를 띤 것이었으나, 후에는 단순한 의례용으로 제도화되었다. 보통 길이는 30㎝ 가량이고, 폭은 4~5㎝ 정도로 얇고 긴 판 모양으로 만들어져 있으며, 아래가 넓고 위가 좁으며, 아래 손잡이 부분을 천으로 감싸 사용하였다. 조선 시대의 경우 태조 때 국가의 의복 제도를 제정하면서 홀의 사용이 규정됐는데, 4품 이상은 상아홀, 5품 이하는 나무홀을 사용하였다. 이 상아홀은 김종직 선생이 직접 사용한 것으로 전한다. 크기는 길이 45.2㎝, 폭 6.5㎝ 정도이다. 아래의 손잡이 부분은 손으로 쉽게 잡을 수 있도록 좁게 다듬어 놓았다.

옥벼루(玉硯) : 조선 시대 제9대 왕인 성종김종직 선생에게 직접 내려 준 하사품이라고 한다. 크기는 가로 15㎝, 세로 24.5㎝, 두께 3㎝ 정도이다. 특히, 아래편 모서리 면에 전서체로 ‘필옹옥우(畢翁玉友)’라는 글씨가 쓰여 있다. 여기서 필옹(畢翁)은 김종직을, 옥우(玉友)는 문방사우 중의 하나인 옥으로 된 벼루를 뜻한다. 벼루의 가운데에는 먹을 간 흔적이 남아 있다. 500여 년이라는 세월의 무게를 담고 있는 이 벼루에서 온 마음으로 학문을 연마한 김종직의 인품을 느낄 수 있다.

매화벼루(梅花硯) : 매화는 난초, 국화, 대나무 등과 함께 고결한 인품과 절개를 지닌 군자의 정신을 상징한다. 이 매화벼루는 조선 시대 훈구파에 대항하여 도덕 정치의 실현을 지표로 삼았던 김종직의 삶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유품이다. 크기는 가로 12.8㎝, 세로 25.5㎝, 두께 1.6㎝ 정도이며, 특히 앞면에 새겨진 매화 등의 조각이 매우 특징적이다. 벼루 아래쪽의 좌측에서 위쪽으로는 이어지는 매화는 당장이라도 꽃을 피울 것 같은 꽃봉오리와 향취가 느껴지는 활짝 핀 매화꽃이 표현되어 있다. 우측 아래쪽의 대나무는 곧고 힘 있게 조각되어 있으며, 위쪽의 구름무늬도 생동감 있다. 그 외에도 기하학적인 무늬가 조각되어 벼루의 가치를 더해 주고 있다. 벼루의 가운데에는 먹을 간 흔적이 남아 있어 김종직 선생이 즐겨 애용했음을 알 수 있다.

강독죽통·경서통 : 강독죽통은 죽간과 한지로 만든 통으로 구성되어 있다. 죽간은 대나무를 길이 14~15㎝, 폭 5~6㎜, 두께 1~2㎜ 내외로 얇게 다듬고 양면에 유교 경전의 구절을 붓으로 적어 놓았다. 죽간의 숫자는 대략 1410개 정도이므로, 모두 2820여 개의 유교 경전 구절이 적혀 있다. 경서통은 한지를 여러 겹 겹쳐서 둥근 통을 만들고 그 표면에 옻칠을 한 원통 모양이다. 지름 8.5㎝, 높이 17㎝ 정도의 크기이다. 이는 조선 시대 사대부들이 평상시에는 물론 출타할 때 들고 다니면서 경전의 구절을 암기하거나, 암기한 내용을 확인하기 위한 것이었다. 요즘으로 치자면 휴대용 단어 암기장인 셈이다.

영의정 추증 교지(領議政 追贈 敎旨) : 교지란 국왕이 신하에게 관직, 관작, 시호, 토지 등을 내려주는 문서로, 요즘으로 치면 임명장과 같은 것이다. 1689년(숙종 15)에 내려진 것으로 크기는 가로 1140㎝, 세로 77㎝ 정도이며, 재질은 두꺼운 한지[壯紙]이다. 김종직 선생은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 때 대역죄로 부관참시 되었다가, 중종반정으로 1507년(중종 2)에 벼슬과 시호 등이 되돌려졌다.

문충공 시호 추증 교지(文忠公 諡號 追贈 敎旨) : 시호란 전통 시대에 벼슬한 사람이나 관직에 있던 선비들이 죽은 뒤에 그 행적에 따라 내려지는 이름을 말한다. 조선 시대의 경우 국왕이나 왕비가 죽은 경우에는 시호도감을 설치하여 시호를 올렸으며, 일반 관리의 경우에는 봉상시(奉常寺)에서 주관하였다. 보통 시호로 사용되는 글자는 300여 자였으며, 자주 사용된 글자는 문(文)·정(貞)·효(孝)·충(忠)·무(武)·경(敬) 등 120자 정도였다. 김종직 선생이 1492년 8월 19일에 작고하자 사림파에서는 ‘문충(文忠)’을 시호로 올렸으나 훈구파에서 ‘문간(文簡)’을 주장하여 결국 문간으로 내려졌다. 그러다가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 때 벼슬을 박탈당한 후 1507년(중종 2) 중종반정으로 벼슬과 시호 등이 되돌려졌다. 문충공 시호 추증 교지는 1709년(숙종 35)에 문충공으로 시호를 추증한다는 교지이다. 크기는 가로 10600㎝, 세로 72㎝ 정도이며, 두꺼운 한지[壯紙]이다.

이 외에도 김종직의 어머니인 밀양박씨와 부인인 창녕조씨가 각각 김종직에게 보낸 편지글, 성종이 직접 하사한 유리주병, 김종직이 관직 생활을 하면서 받은 각종 교지, 부인인 창녕조씨와 남평문씨에게 내린 교지 등은 김종직과 직접 관련된 유품들로 가치가 높은 귀중한 유물들이다. 이들 유품들은 안전한 관리와 일반에 소개하기 위해 2005년 4월부터 대가야박물관에서 보관·전시하고 있다.

점필재 종택 옆에 위치한 서림각에서는 김종직 선생의 생애와 유품들의 사진을 전시해 놓고 설명해 주고 있다.

이들 유품들에는 김종직의 손때와 묻어 있으며, 가문의 보물을 지키고 전승하기 위해 노력한 종손들의 땀이 배어 있다. 이런 점에서 이 유품은 종가와 개실마을의 보물이자, 우리 국민 모두의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정보제공]

  • •  김병식(남, 1933년생, 쌍림면 합가리 주민, 선산김씨[일선김씨] 문충공파 17대 종손)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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