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9A0201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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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경상북도 고령군 고령읍 연조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정동락 |
연조리가 위치한 대가야읍은 현재는 비록 작은 농촌 도시지만, 지금으로부터 1600년 전에는 우리나라 고대사의 한 축을 이루었던 대가야의 화려했던 중심지였다. 도읍의 중심부인 연조리에는 왕이 머무르는 왕궁과 그것을 둘러싼 도성이 있었고, 그 주변으로는 즐비하게 늘어선 관청과 귀족들의 가옥들이 건축되어 있었을 것이다.
또한, 궁성에서 왕의 명령이나 포고문들이 공포될 때마다 그것을 널리 알리기 위한 오늘날의 게시판과 같은 것도 있었다. 연조리는 이 같은 조서를 반포하던 조서문(詔書門)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 때문에 현재 연조리에는 대가야의 궁성 터는 물론 왕릉과 산성, 우물 등 문화유산들이 산재해 있다.
[대가야의 왕이 머물렀던 궁성 터]
고령향교 가 있는 곳은 과거 대가야 시대의 왕의 궁전이 있던 대가야 궁성 터로 전해지는 지역이다.
고령군에서는 지난 2000년 8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경북대학교 박물관에 의뢰해 대가야 궁성 터로 전해지는 지역에 대해 발굴 조사를 실시하였다. 그 결과 대가야 시대의 건물 터와 구덩이 등 7기의 유적과 토기를 비롯한 기와와 벽돌 등이 출토되었다. 특히, 동쪽과 서쪽에 2개의 부뚜막이 있는 대벽(大壁) 건물 터가 확인되었다.
대벽 건물이란 밖에서는 기둥이 보이지 않는 큰 벽으로 된 건물을 말하는데, 주로 궁전이나 절터 건물에서 확인된다. 부뚜막은 뒷부분이 아치형이며 입구 부분은 ‘凹’자형인데, 이는 고구려의 벽화 고분의 부엌 그림과 비슷하다. 따라서 이 건물 터는 대가야 궁성 내에 건립된 왕실의 주방과 같은 용도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어쩌면 중국에 사신을 파견해 국제 무대에 화려하게 등장했던 하지왕(荷知王)이나, 우륵으로 하여금 가야금을 만들고 12곡을 작곡케 한 가실왕(嘉實王) 부부가 먹던 음식을 조리했던 수라간이었는지도 모른다.
[왕궁 방어의 최후의 보루, 주산성]
대가야읍 뒤편에 있는 주산을 오르다 보면, 충혼탑을 지나면서 두 갈래로 길이 갈라진다. 그 중 오른쪽으로 난 길은 주산산림욕장으로 가는 길이고, 왼쪽으로 난 또 다른 길은 지산동 고분군으로 향하는 길인데, 이 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주산약수터와 지산리 바위구멍 유적이 눈에 띈다. 그리고 대가야 시대 외적의 침략을 방어했던 주산성(主山城)의 허물어진 성벽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산성은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이산성(耳山城)으로 기록되어 전한다. 주산은 원래 두 개로 솟은 봉우리가 귀처럼 생겼다고 하여 이산(耳山)으로도 불렸다. 주산성은 일제 강점기 일본 사람들이 남긴 기록에 의하면 내성과 외성의 두 겹으로 된 성벽이 있었던 것으로 전한다.
지금도 부분적으로 성벽이 보이는데, 2m가 넘게 수직으로 쌓은 석축 성벽이 남아 있다. 이곳은 562년 9월 대가야 최후의 어느 날 피비린내 나는 격전장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주산성에서 오늘날 우리가 산림욕을 즐기며 고분 관광로를 따라 거닐고 있음은 역사의 아이러니라 하겠다.
[대가야의 왕과 귀족들의 무덤 지산동 고분군]
주산의 남쪽 능선 위에는 대가야 시대의 왕과 왕족, 귀족 들의 무덤인 지산동 고분군이 웅장하게 펼쳐져 있다. 지산동 고분군은 모두 700여 기에 달하는 봉토분이 분포하고 있는 가야 지역 최대 고분군이다. 천 년하고도 500~600년이 넘는 기나긴 세월 동안 갖은 풍상을 겪고서도 의연함을 잃지 않고 있는 모습은 가히 대가야의 위상을 잘 보여 준다.
지산동 고분군 내에는 대가야의 시조인 이진아시왕의 무덤도 있고, 하지왕의 무덤과 가실왕의 무덤도 있었을 것이다. 또, 신라 왕녀와 결혼하여 월광(月光) 태자를 낳은 이뇌왕(異腦王)과, 나라를 잃은 비운의 마지막 왕인 도설지왕(道設智王)도 함께 잠들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주산의 북쪽 능선에는 연조리 고분군이 위치해 있다. 연조리 고분군은 고분의 규모가 지산동 고분군보다는 작은 편이어서 대가야 시대 하위 지배층의 무덤일 것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고분군의 규모나 크기에서 당시 사람들의 위계와 신분이 드러나는 셈이다.
[임금이 마시던 우물 왕정(王井)]
고령초등학교 교정에는 대가야 시대 왕이 마시던 우물로 전해지는 왕정이 있다. 왕정은 어정(御井)으로도 불리는데, 1977년 발굴 조사를 통해 대가야 시대의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후 고령군에서는 왕정의 옛 모습을 복원하고 팔작지붕의 보호각을 지어 놓았다.
왕정은 그리 깊지는 않지만 사시사철 일정하게 차가운 물이 샘솟고 있다. 1600년 동안 쉼 없이 흘러나오는 샘물처럼 아득히 먼 그 옛날, 물동이를 이고 와서 물을 긷던 대가야의 궁녀들이 눈에 스치듯 지나는 듯하다. 그리고 이제는 대가야의 후손들이 그 앞에서 뛰어놀면서 대가야의 옛 영광을 되새기고 있다.
[우륵기념탑과 우륵영정각]
우륵기념탑 과 우륵영정각은 연조리의 가장 북쪽, 주산의 능선이 내곡천에 막히면서 그 맥이 뭉쳐져 만들어 놓은 곳에 건립되어 있다.
이곳은 우륵이 가야금을 작곡하고 머물렀던 금곡(琴谷)[일명 가야금골]인 쾌빈리의 정정골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이기도 하다. 우륵기념탑은 1977년 5월에 고령군에서 건립하였다.
가야금의 모습을 형상화한 우륵기념탑의 높이는 대략 15m 정도 되는데, 고령터널을 지나 고령읍내로 진입하면 멀리서도 한눈에 바라보인다. 그 때문에 현재 고령 지역의 랜드마크 역할을 하고 있다.
우륵기념탑 옆에는 우륵영정각이 자리 잡고 있다. 가실왕의 명으로 가야금을 만들고 그 곡을 작곡한 악성(樂聖) 우륵을 기리기 위해 1996년 고령군에서 건립하였다.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맞배지붕 기와 건물로, 그 안에 우륵의 표준 영정을 모시고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연조리에는 1600년의 시간을 사이에 두고 과거의 대가야와 현재의 고령이 공존하고 있다. 대가야 왕릉 주변에는 고분 탐방로가 만들어져 수많은 관광객들이 거닐고 있으며, 대가야 병사들의 함성이 가득했던 주산 성벽 위로는 관광객들이 등산을 즐긴다.
가실왕과 우륵이 만들었던 가야금 선율이 우륵기념탑을 타고 우륵박물관 앞의 정정골에 메아리친다. 왕정에는 고령초등학교 아이들의 재잘거리는 음성이 우물 속에서 잔잔한 물결을 일으킨다. 이처럼 연조리에 오면 과거의 화려한 영광을 발 디디고 현재를 살아가는 역사의 숨결을 느껴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