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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당-인물과 문화유적-초당을 빛낸 인물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3T05011
한자 草堂-人物-文化遺蹟-草堂-人物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강원도 강릉시 초당동
집필자 이상수

[초당을 빛낸 인물]

초당마을에 살았던 역사 인물로 먼저 김충각(金忠慤)[1578~1650]을 거론할 말하다. 김충각명주군왕 김주원의 후손으로, 참판 김덕장의 아들이다. 호는 초정(草亭)이고, 조선 선조경포 초당마을에 살면서 벼슬은 사헌부감찰직장을 지냈다. 우복(愚伏) 정경세 선생과 평소 예학을 강론하였으며, 절의와 덕행이 매우 높았다. 생전에 경포호수 부근에 경호당(鏡湖堂)을 건립하여 그의 별당 겸 강정(江亭)으로 삼았으며, 73세의 일기로 죽자 백헌(白軒) 이정승이 와서 공의 산소에 분향하였다.

초당마을의 이름에 유래가 되었다고 전하는 허엽(許曄)[1517~1580]은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태휘(太輝), 호는 초당(草堂)이다. 1546년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 1551년 부교리가 되고, 1553년 사가독서(賜暇讀書)한 뒤 장령(掌令) 때 재물을 탐한 죄로 파면되었다. 1559년 필선(弼善)으로 재기용되고 다음해 대사성으로, 1562년 지제교(知製敎)를 겸임, 박계현과 함께 명종의 소명을 받고 옥취정에 들어가 율시(律詩)로 화답하였다. 그해 동부승지로 참찬관이 되어 경연에 나가 조광조·윤군수의 신원(伸寃)을 청하고, 허자(許磁)·구수당의 무죄를 논하다가 파직되었다. 이듬해 다시 기용되어 삼척부사가 되었으나, 과격한 언사 때문에 다시 파직되었다. 1575년 동인·서인의 당쟁이 시작될 때 김효원과 함께 동인의 영수가 되었으며, 부제학을 거쳐 경상도관찰사가 되었으나 병으로 사퇴, 상주 객관(客館)에서 죽었다. 30년간 관직 생활을 하였으나, 청렴결백하여 청백에 녹선되었다. 장남 성(筬)과 차남 봉(篈), 삼남 균(筠), 딸 초희(楚姬)와 함께 중국·일본에도 잘 알려져 있다. 김정국이 찬수한 『경민편(警民編)』을 보충해 반포하고, 『삼강이륜행실(三綱二倫行實)』 편찬에 참여하였다. 개성의 화곡서원(花谷書院)에 제향되고, 저서에 『초당집(草堂集)』, 『전언왕행록(前言往行錄)』 등이 있다.

허엽의 딸인 허난설헌(許蘭雪軒)[1563~1589]의 본명은 초희(楚姬)로, 호가 난설헌, 별호를 경번(景樊)이라고 했다. 강릉 출생으로 허균의 누이로, 이달(李達)에게 시를 배워 천재적인 시재(詩才)를 발휘했다고 전한다. 1577년 김성립(金誠立)[1562~1592]과 결혼했으나 원만하지 못했다고 한다. 불행한 자신의 처지를 시작(詩作)으로 달래어 섬세한 필치와 여인의 독특한 감상을 노래했으며, 애상적 시풍의 특유한 시세계를 이룩하였다. 작품 일부를 동생 이 명나라 시인 주지번(朱之蕃)에게 주어 중국에서 시집 『난설헌집』이 간행되어 격찬을 받았고, 1711년 분다이야지로(文台屋次郞)에 의해 일본에서도 간행, 애송되었다. 작품으로는 시에 「유선시(遊仙詩)」, 「빈녀음(貧女吟)」, 「곡자(哭子)」, 「망선요(望仙謠)」, 「동선요(洞仙謠)」, 「견흥(遣興)」 등 총 142수가 있고, 가사(歌辭)에 「원부사(怨婦辭)」, 「봉선화가」 등이 있다.

초당마을이 배출한 현대의 역사적 인물로는 여운형(呂運亨)[1886~1947]이 대표적이다. 여운형의 호는 몽양(夢陽)으로 경기도 양평에서 출생하였다. 우무학당(郵務學堂) 등에서 한학을 공부한 후 1907년 고향집에 광동학교(光東學校)를 세우고, 1908년 그리스도교에 입교하였다. 강릉에 초당의숙(草堂義塾)을 세워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국권을 빼앗기고 학교가 폐쇄되자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였다. 선교사 클라크를 따라 서간도의 신흥무관학교를 견학하며 국외에서의 독립운동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학교를 중퇴, 1913년 중국으로 건너갔다. 1918년 신한청년당을 발기하여 김규식을 파리평화회의에 대표로 파견하였다. 1919년 4월 상하이에서 임시정부가 조직되자 임시의정원 의원이 되었는데, 일본 정부는 이를 자치운동으로 회유하고자 그 해 11월 그를 도쿄로 초청하였으나 오히려 장덕수를 통역관으로 삼아 일본의 조야 인사들에게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역설하였다.

1920년 고려공산당에 가입, 1921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원동(遠東)피압박민족대회에 참석, 한국의 사정을 세계에 호소하였다. 1929년 제령(制令)위반죄로 3년간 복역하고, 1933년 출옥, 조선중앙일보사 사장에 취임하였는데 1936년 신문이 일제에 의하여 정간되자 사임한 후 1944년 비밀결사인 조선건국동맹을 조직하였다. 8·15광복을 맞아 안재홍 등과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 9월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하였으나 우익진영의 반대와 미군정의 불인정으로 실패하였다. 12월 조선인민당을 창당, 1946년 29개의 좌익단체를 규합하여 민주주의민족전선을 결성하였으나 반대하여 탈퇴하였다. 극우파 한지근에 의하여 1947년 암살되었다. 체육인으로서의 그는 덴마크체조를 보급하였으며 조선체육회[대한체육회의 전신] 제11대(1946~1947) 회장을 지냈다. 2005년 3·1절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여운형과 관련된 사건으로, 초당마을에서 일어난 초당리 7·24 사건은 한국 현대사의 이데올로기 대립이 낳은 비극이다.

을사늑약 후 몽양 여운형은 ‘민족성을 길러야 한다’는 취지에서 처음 주문진 교항리에 와서 동생 여운홍과 함께 학교를 세워 학생을 가르쳤다. 그 후 취영정 계원인 초당의 최용집이 여운형을 초당으로 모셔와 초당영어학교를 세우게 되었다. 2년 동안(1908~1910)의 그의 가르침은 그 이후 초당리 주민들의 의식 활동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이에 해방 다음해인 1946년 7월 24일 초당의 토착세력들이 중심이 되어 폭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초당에 살고 있는 좌익들이 우익들에게 고통을 준다는 소식에 우익진영(건청, 한청, 서청)이 그들을 구출해야 한다고 초당으로 들어감으로써 충돌이 있게 되었다. 우익진영이 초당에 들어가자 초당 주민이 이에 맞섰고 결국 우익진영은 후퇴하였다. 그날 밤 강릉시내에서 쌍방간에 투석전이 벌어져 2차 충돌이 있었다. 이때 석종문, 김만출, 이종남 등이 주축이 된 검은 셔츠를 입은 주문진 우익청년단이 강릉으로 지원을 나와서 우익청년들과 합세했다. 초당 주민과 건국청년단 소속의 권영기 등 몇몇 부상자가 생겼으며, 그 다음날 에드워드 군정관이 경찰과 함께 초당으로 파견되었다. 미군이 온다는 소식에 초당 주민이 일치단결하여 폭동진압대와 충돌이 있게 되었는데, “미군 죽여라”라는 구호까지 난무하면서 모여드는 주민들 앞에서 에드워드 군정관이 급박하여 총을 발사함으로써 주민들을 해산시켰다. 결국 양측의 여러 명이 미군정청에 체포되어 재판을 받게 되었다.

강원도 경찰청 공보실 발표에 ‘강릉읍에서 4㎞쯤 떨어져 있는 송정리에서는 좌우충돌로 약 1.000여 명이 일대격전을 하였다.(『동아일보』1947. 9. 5)’는 기록으로 보아 이 충돌은 당시 정치적 상황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 것 같다. 이 기사에서 송정리는 초당리의 잘못된 기술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해방직후 최사규, 최학선 등을 중심으로 독서회를 조직하여 좌익정신을 주입시켰다는 평가에서 알 수 있듯이 우익 측에서는 초당에 대해 상당한 선입관을 갖고 있었던 것 같고, 또한 초당과 송정지역은 소작이 많았기에 지주에 대한 반발이 심했던 것 같다.

초당리 7·24사건은 몽양 여운형의 영향이 컸다는 점, 미군정에서 초당마을을 Left Village(좌경촌)라고 표현한 것, 한국전쟁 때 이 지역이 월북자가 많은 지역이었다는 점 등의 원인으로 본격적인 이데올로기 분쟁이라고 사경시(斜輕視)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미군이 공동으로 양측의 인원을 체포한 점이라든가, 극렬좌익 분자가 없었다는 점 등에서 보듯이 민란의 성격을 갖는 우발적 사건으로 평가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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