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3040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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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豪族 |
영어음역 | hojok |
영어의미역 | local gentry |
이칭/별칭 | 장군(將軍),성주(城主),적수(賊帥)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강원도 강릉시 |
시대 | 고대/남북국 시대,고려/고려 전기 |
집필자 | 김흥삼 |
[정의]
신라말·고려초 사회변동을 주도적으로 이끈 지방세력.
[개설]
신라말 진골귀족 내부 정쟁으로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약화되면서 독자적 세력으로 등장하였다. 지방으로 낙향한 진골귀족이나 6두품 계통, 지방의 토착세력인 촌주, 해상 세력, 지방군사 세력에서 기원하고 있다. 이들은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여 스스로 장군이나 성주를 자처하였다.
호족은 대토지를 지배하고 있고, 사병(私兵)을 중심으로 한 무력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중앙과 비슷한 관부 조직을 갖추고 지역민들을 통치하고 있었다. 주치(州治)나 소경(小京)이었던 지역의 일부에서는 자제들을 교육시키는 학원을 경영하고 있었다.
[활동사항]
이들은 사회변동을 주도하였고, 신라왕조의 존립을 위협하였으며, 골품제를 타파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새로운 세력으로서 고려왕조를 성립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호족 출신인 태조(太祖)는 후삼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다른 호족들을 끌어들이는 데 많은 공을 들였다.
고려왕조 성립 후 이들은 중앙으로 진출해 문벌귀족화하는 부류와, 지방에 남아 향리화의 길을 걷는 부류로 나눌 수 있다. 대부분 후자의 길을 걸었으며, 이들은 과거와 천거를 통해 중앙 관리로 진출하였다.
[강릉의 호족]
신라말·고려초 강릉의 호족은 중앙의 통제에서 벗어나면서 중앙제도를 모방하여 만든 자신들의 관반제(官班制)를 통해 강릉 지역에 대한 정치적·경제적·군사적 지배권을 행사하였다.
신라 말기 김주원은 왕위계승전에서 패배한 뒤 원성왕 일파에게 위협을 느꼈던지 중앙에서 계속 거주하지 못하고 명주(溟州)[지금의 江陵] 지방으로 물러나고 말았다. 이 지방에는 원래 김주원의 장원(莊園)이 있었고, 또 그와 연결된 친족 세력이 있던 곳이었다. 김주원은 이를 기반으로 지방 귀족화해 중앙과 대립하는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였다. 그 뒤 명주도독은 대대로 그의 후손에게 세습되었는데, 이들은 신라 말까지 반독립적인 지방 호족 세력으로 남아 있었다. 후삼국시대 명주 지방의 대표적인 호족이었던 왕순식(王順式)[王氏 성은 고려 태조에게 귀순한 뒤 賜姓된 것임]도 그의 후손이다.
지명주군주사(知溟州軍州事) 태광(太匡)·명주장군(溟州將軍)·명주대광(溟州大匡)이라는 직함을 갖고 있던 왕순식(王順式)은 명주의 군사력을 장악하고 있으면서 동시에 중앙 최고의 관계(官階)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왕순식은 명주 지역에서 가장 강력한 지방세력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자손들 가운데는 그가 강릉 지방으로 퇴거한 뒤에도 김헌창(金憲昌)·범문(梵文) 부자처럼 계속 중앙에 남아 활약한 사람들도 있었다. 이들은 강릉김씨의 가계를 이루어 굴산사(堀山寺)의 사굴산파(闍掘山派)를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그의 가문은 고려 초 새로운 왕조에 귀의해 공을 세움으로써 강력한 호족 세력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왕순식보다 조금 이른 시기에 명주 모법제자(慕法弟子)인 민규(閔規)가 알찬(閼飡, 阿粲)이라는 관등(官等)을 가지고 있어 하급호족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왕예(王乂)는 오랫동안 왕순식의 참모였으며, 군사를 통솔할 수 있는 명주 도령(都令)으로 「낭원대사비(朗圓大師碑) 」를 건립하는 데 실무를 담당했다. 이는 왕예가 명주에서 활약하였던 세력이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 밖에 탑비 건립의 실무를 맡았던 준문(俊文)·관육(官育)·김예(金乂)·인열(仁悅)·순충(順忠) 등도 명주의 중소호족이었을 것이다. 아울러 왕순식의 소장(小將)인 관경(官景)이 고려로부터 왕성과 관계를 받았으며, 뒤에 관경의 딸이 왕건과 결혼한 점으로 보아 역시 명주 지방에서 비중있는 정치세력가이었음을 알 수 있다.
「징효대사비(澄曉大師碑) 」 음기(陰記)에 평직(平直)·극기(剋奇)·김예(金芮)·연세(連世)·세달(世達) 촌주(村主)·명환(明奐) 등 명주 출신 인물이 상당수가 보이고 있다. 물론 이들이 모두 정치세력화 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여전히 정치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신라말·고려초 명주 지방에는 이와 같이 대호족과 중소호족 등 많은 정치세력들이 있어, 읍(邑)의 권력이 세력의 서열 차이는 있어도 하나의 큰 호족에 의해 단독으로 장악된 것이 아니라 복수의 호족세력들의 연합에 의해 장악되고 있었다. 이처럼 명주 지방사회의 지배체제가 호족들의 연합체 내지 과두체제로 이루어질 때, 호족 간의 견제로 어느 한 호족이 독재적인 권력을 행사하기는 어려웠으므로 상호의존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이 지역을 통치하였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