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30097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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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潤身 |
영어음역 | Kim Yunsin |
이칭/별칭 | 덕수(德叟),괴당(槐堂)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강원도 강릉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박도식 |
[정의]
강릉 출신의 조선 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강릉. 자는 덕수(德叟), 호는 괴당(槐堂). 김주원(金周元)의 후손이다. 부친은 김여명(金汝明)이고, 모친은 김지(金輊)의 딸이다.
[생애]
1468년(세조 14)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1476년(성종 7)에 별시문과에서 병과로 급제한 후, 사록(司祿), 전적(典籍), 주부(主簿), 경상도사(慶尙都事)를 거쳐 전중감찰(殿中監察)이 되었다. 그 후 내직(內職)으로 사헌부장령, 집의, 의정부사인을 거쳤으며, 외직으로는 파주목사와 원주목사(종3품)를 지냈다. 1490년에 통훈대부로서 지평이 되었다. 이듬해 평안도도사가 되었으나 병으로 곧 전직되었다. 1499년(연산군 5)에는 안변부사가 되어 정사를 잘하였다. 김윤신(金潤身)이 벼슬을 그만두고 향리로 돌아왔을 때 부사는 향사례(鄕射禮)와 향음주례(鄕飮酒禮)로 그를 영접하였다. 젊었을 때는 금란반월회 회원이었으며, 만년에는 향좌수로서 향령(鄕令)을 지어 문풍교화에 힘썼다. 강릉 12향현 중 한 사람이다.
[활동사항]
김윤신은 덕성(德性)이 두텁고 학문을 좋아하여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붓으로 베껴 항상 손에서 떼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효성이 지극하여 어버이를 즐겁게 하는 데 힘썼다.
1469년(예종 1) 2월 남윤문과 함께 상원사 주지 학열(學悅)의 비행을 비판한 글을 지어 강릉 사람 전윤(全崙)에게 주어 올렸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승려 학열은 연화를 칭탁(稱托)하여 오로지 재화(財貨)를 늘리는 것만 일로 삼아 민간에 폐단을 일으키니, 백성들이 심히 고통스럽게 여깁니다. 그리고 또 세조(世祖)께서 일찍이 본부(本府)의 진전(陳田)을 승려 신미(信眉)에게 내려 주셨는데 신미가 이것을 학열에게 주었습니다. 학열이 이 땅을 개간하는 것을 꺼려하여, 마침내 이 전지를 빙자하여 백성들의 수전(水田) 70여 석(石)을 파종할 만한 땅을 빼앗아서 백성들이 자못 근심하고 걱정합니다. 게다가 염양사(艶陽寺)와 영서(嶺西) 진부(珍富) 사이에 창고(倉庫)를 많이 설치하였는데, 노적(露積)이 있기까지에 이르렀으니, 생민(生民)들의 피해가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 엎드려 생각건대, 전하께서 불의(不義)한 부(富)를 거두셔서 백성들의 마음을 쾌(快)하게 하소서.” 하였다.
1476년(성종 7) 별시문과에서 병과로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거쳐 전중감찰(殿中監察)이 되었을 때 부모를 봉양하기 위해 귀향을 요청하였다. 성종은 “내가 듣기로 경은 부친의 5년 장병(長病)에 한 번도 옷을 벗지 아니하고 간호하였으니 어찌 대효(大孝)가 아니며, 경이 나를 위하여 성심을 다하였으니, 어찌 충성이 아니겠느냐” 하면서 금성현령(金城縣令)에 임명하여 노친을 봉양하게 하였다.
외직에 있을 때는 가는 고을마다 선정(善政)을 베풀어 백성의 칭송을 받았다. 그가 강원도 어사로 왔을 때 당시 강릉부사 한급(韓汲)이 갖은 방법으로 백성의 재물을 수탈하는 것을 목격하고 장계(狀啓)를 올려 한급을 파직시켰다. 그러자 한급은 자신의 노모를 가마에 태워 연 3일 밤에 걸쳐 김윤신이 머무는 담 밖에 와서 죄를 애걸하게 하였다. 그러나 김윤신은 이 모두가 한급이 시켜서 한 것임을 알고 끝내 들어주지 않았다.
[묘소]
묘소는 강원도 강릉시 저동 강릉김씨 옥가파 종산(宗山)에 있다. 경포대에서 호해정으로 가는 산길 옆에 김윤신 신도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