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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300762
한자 弓裔
영어음역 Gungye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왕족·호족
지역 강원도 강릉시
시대 고대/남북국 시대/태봉
집필자 김창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아버지 헌안왕|경문왕
아내 강씨부인
성별
몰년 918년연표보기

[정의]

후고구려[태봉]의 건국자이자 왕.

[가계]

신라 제47대 헌안왕(憲安王) 또는 제48대 경문왕(景文王) 김응렴(金膺廉)의 아들이라고 한다. 왕비는 강씨부인이고, 아들은 청광보살(淸光菩薩)과 신광보살(神光菩薩)이다.

[생애]

궁예는 신라 하대 왕의 서자로 태어났다. 태어날 때의 여러 징조가 장차 국가에 해로울 것이라고 하여 죽이려고 하였으나 탈출하는 과정에서 유모가 잘못하여 손가락으로 눈을 건드려 애꾸눈이 되었다고 한다. 그 뒤 궁예는 유모에 의하여 키워졌으며, 세달사(世達寺)에서 출가하여 선종(善宗)이라 하였다. 뒤에 무리를 모아 후고구려국을 건국하여 왕이 되었으나, 918년 왕건이 쿠데타를 일으켜 고려를 건국하자 죽임을 당하였다.

[활동사항]

889년(진성여왕 3)에 신라 중앙에서 과도하게 세금을 독촉하자 전국적으로 백성들이 유망하여 초적(草賊)으로 변하였는데, 그들 가운데 두각을 나타낸 인물로 기훤(箕萱)양길(梁吉)이 있었다. 궁예는 891년 기훤에게 몸을 의탁하여 뜻을 꾀하고자 하였으나 기훤이 잘 대우해주지 않자, 이듬해 양길의 부하로 들어갔다.

그 뒤 궁예양길의 군사를 나누어 받아 원주 치악산 석남사(石南寺)를 거쳐 동쪽으로 진출하여 주천(酒泉)[지금의 예천]·내성(奈城)[지금의 영월]·울오(鬱烏)[지금의 평창]·어진(御珍)[지금의 울진] 등의 여러 현과 성을 정복하고, 894년에는 명주(溟州)[지금의 강릉]에 이르렀는데, 그 무리가 3,500명이나 되었다. 궁예는 이들을 14대로 편성하여 자기의 세력기반으로 삼았고, 이들에 의하여 장군으로 추대되었다. 이를 기반으로 저족(猪足)[지금의 인제]·생주(狌州)[지금의 화천]·부약(夫若)[지금의 금화]·금성(金城)·철원(鐵圓) 등을 점령하자 군세가 매우 강성해져 패서지역(浿西地域)의 무리들이 항복하였다. 이에 양길과 결별하고 독자적인 세력을 이루었다.

한편 『삼국사기(三國史記)』「신라본기」진성왕 8년 10월에는 궁예가 북원(北原)에서 하슬라(何瑟羅)에 들어갈 때 그 무리가 600명으로 되어 있고, 같은 책의 「궁예열전(弓裔列傳)」에는 3,500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을 토대로 적어도 2,900여 명의 군사가 당시 강릉 세력의 휘하에 있었다고 추측하기도 한다. 그러나 600명에서 3,500명으로 증가한 군사는 궁예가 주천·내성·울오·어진 등의 여러 현과 성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그에게 귀부(歸附)한 세력으로 파악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의의와 평가]

궁예가 세력기반을 구축하는데 있어서 강릉은 중요한 군사적 지지기반이 되었고, 그 뒤 국가를 세우는데 있어서도 크게 기여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918년 궁예왕건에게 축출당한 이후에 강릉 세력인 김순식(金順式)[뒤에 왕순식(王順式)]이 왕건에게 불복한 사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1.12.12 2011 한자 최종 검토 김응렴(膺廉)의 아들이라고 ->김응렴(金膺廉)의 아들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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