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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동삼세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300660
한자 關東蔘稅
영어의미역 Gwandong Insam Tax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제도/법령과 제도
지역 강원도 강릉시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김대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시행연도/일시 조선시대

[정의]

조선시대 강원도 영동 지역에서 부담했던 인삼과 관련한 부세(賦稅).

[개설]

조선 후기 인삼의 징수나 납부 방법은 임토지공(任土之貢)의 명분에 따른 공물납, 포·미·전 등에 의한 대납(代納), 삼공인에게 청부하여 납부하게 하는 방법 등이 있었다. 또한 징수형태도 백성들로 하여금 채취 납부하게 하는 것과 대동법에 의한 포전곡의 징수, 무삼(貿蔘)이라는 이름으로 시가의 절반 이하 정도의 비용을 보조해 주면서 반 강제적으로 징수하는 등 여러 형태였다.

[내용]

인삼의 징수체계는 지역에 따라 다소간의 차이는 있다. 인삼 징수지역은 강원도·경상도·함경도·평안도 지역이었으며, 이 가운데 관동과 관서 지방에 집중되어 있었다. 강원도의 경우 미전으로 대납한 액수가 많아 정확한 인삼 양을 파악하기 어렵지만 평안도 못지않은 부담을 안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 이유는 관동의 인삼이 어공용(御供用)으로 사용될 만큼 품질이 우수해서 여러 명목으로 징수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변천]

인삼의 생산지로 알려진 강원도에서는 조선 초기부터 인삼을 토공(土貢)으로 상납해 왔다. 강원도가 토공으로 납부한 인삼 공액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그러나 1623년 강원도에 대동법이 실시될 때 분정된 진상용 인삼 원수(元數)는 일 년에 70근이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수치는 이후 여러 차례 변화가 있었다.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중간에 10근이 줄어 춘등(春等) 30근, 추등(秋等) 20근, 납등(臘等) 10근으로 모두 60근이 되었다. 1708년에는 암행어사 심수현(沈壽賢)과 강원감사의 건의에 따라 춘등에서 10근, 추등에서 5근을 줄여 45근으로 감액되었다. 1721년에는 납등에서 3근을 감액 받아 삼공액은 모두 42근이 되었다.

인삼의 조달에 참여하였던 삼상(蔘商)으로는 관동삼계인을 비롯하여 세삼공인, 인삼공물주인, 돈삼계공인 등이 있었다. 관동삼계는 1759년에 설립되었는데 전적으로 관동의 인삼을 경무(京貿)하기 위한 것이었다. 관동삼계인에게 지급된 공가는 14,032냥이었는데, 이를 쌀로 환산하면 2,339석 정도였으며, 지급액수의 규모로 보면 선혜청에 소속된 공계인 가운데 28번째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경과하면서 관동삼계는 관동 인삼만 조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지역의 인삼에 대한 책납(責納)까지 부담하게 되었다. 관동 인삼이 크게 감소하는 상황에서 관동삼계인은 1년분의 공납도 감당하기 어려운데 호조의 압력에 의해 나삼(羅蔘)까지 책납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공인들이 큰 피해를 입었으며, 관동삼계인 역시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1845년(헌종 11)의 기록에는 관동삼계가 오랫동안 공가를 미리 받아놓고 상납하지 못한 액수가 15만 냥에 이르고 있었고, 약방의 유재(遺在)도 만여 냥이나 있었다. 결국 관동삼계는 감당하지 못한 16만 냥을 탕감 받고 혁파되었다.

특히 강릉은 강원도 내에서도 삼세의 부담이 가장 과중하여 폐해도 가장 심각했다. 강릉부에서는 과중한 삼세를 충당하기 위해 전세의 일부를 공삼(貢蔘) 재원으로 충당하게 하였다. 또 공삼 재원 조달책으로 보삼군관(補蔘軍官)을 창설하여 일인당 1냥 5전씩을 징수했다. 이러한 방법으로 강행된 인삼 진상은 농민들에게는 커다란 부담이 되었으며 결국은 농민의 유리·도산과 전결감소 현상으로 이어져 농민의 생활을 더욱 압박함과 동시에 국가 재정에도 위기를 초래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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