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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300501
한자 日帝 强占期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기도 양주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권만용

[정의]

1910년부터 1945년 8월 15일 해방까지 일제 식민기 경기도 양주 지역의 역사와 문화.

[행정 제도]

양주는 서울의 동북 방면으로 이어지는 광활한 지역이었다. 현재의 동두천시·남양주시·의정부시·포천시·구리시 등과 서울의 동북쪽이 모두 양주 지역에 해당되었다. 즉, 1912년 당시 양주 지역은 32면 343동리의 대규모 고을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러나 1914년 면제 개편 때 양주는 16면 148리로 축소되었다. 1922년 행정 체계상의 변천으로 군청사가 양주군 주내면 유양리[현 양주시 유양동]에서 시둔면 의정부리[현 의정부시]로 이전되었다. 1938년 시둔면양주면으로 개칭되었고, 1942년에 양주면은 의정부읍으로 승격되었다. 양주군은 1914년 지방 행정 관할 구역 조정 이후 1945년 해방되기까지 일부 면의 명칭만 변경되었을 뿐, 행정 구역의 변화는 거의 없었다.

[교육 제도]

1. 교육 시설

일제 강점기 양주군의 교육 시설로는 1927년에는 보통학교 8개에 학생 1,700여 명, 실업 학교 1개에 학생 20여 명, 사립 학교 3개에 학생 140여 명, 서당 82개에 학생 1,000여 명 정도였다. 이러한 교육 시설은 당시 양주군에 속했던 의정부에 주로 위치했으며, 동두천과 와부면, 장흥면, 광적면 등에 있었다. 광적면에서는 1927년 초부터 백남용(白南容)·서승복(徐承復)·이하용(李夏鎔)·김풍진(金豊鎭) 등의 발기로 학교를 설립하고자 공보기성회(公普期成會)를 조직하여 교육 기관의 설립을 도모하기도 하였다.

이외의 교육 시설로는 1899년 9월 20일 양주군 주내면 유양리에 설립된 양주공립소학교(楊州公立小學校)가 1919년 의정부4동 225번지로 이전하였고, 1908년 5월에 설립된 양주북내학교(楊州北內學校)가 1919년 12월 28일 북내공립보통학교(北內公立普通學校)로 개칭되었다.

2. 후원회

교육에 관계된 후원회 사업도 활발히 진행되었는데, 시둔면의 장연철(張然哲)을 비롯하여 유지급 인사들은 아동을 교육하고 학교와 가정 간의 연락을 원만히 할 기관이 없음을 유감스럽게 생각하여 1924년 10월 21일에 양주공립보통학교 후원회 창립총회를 군내 공회당에서 개최하였다. 출석 인원은 60여 명에 이르렀고 임시 의장이었던 이종협(李鍾協)의 취지 설명이 있은 후에 임원 선거를 하여 선출하였다. 1925년 11월 6일 공회당에서 역원회(役員會)를 만들고 교사(校舍) 증축을 결의하여 교사 증축금을 모집하였다. 그 밖에 동창회와 운동회, 계몽 활동 등이 활발히 개최되었다. 이와 같은 사실에서 당시 양주군 내의 교육열이 타군 못지않았음을 알 수 있다.

[금융 기관]

당시 양주군 내의 금융 기관은 조합이 3개소로 양주와 금곡, 동두천에 위치하였다. 1920년대 당시 조합원 총수는 2천 명이 넘었고, 출자금은 4만 1500원 정도였다. 개인영업으로는 조선인 30명과 일본인 5명이 각 사업체를 운영하였고, 조선인의 자금은 7만 6600원, 일본인은 1만 3000원이었다. 우편소는 의정부와 금곡, 동두천에 3개소가 있었으나, 다른 지역에 비하여 저축 실적은 낮았다. 그 원인은 농촌에 저축 의식이 아직 고취되지 못한 것과 노동자의 가난한 살림살이에 있었다.

[농촌 상황]

일제는 1910년 이전부터 식량 및 공업 원료를 약탈하기 위하여 조선에 식민지적 농업 생산을 강요하였다. 이와 함께 토지 조사 사업과 임야 조사 사업을 통한 일제의 토지 약탈과 일본인 지주에 의한 토지의 약탈적 매수는 조선인 지주에게 압력을 가하는 동시에 조선 농촌의 계급적 구성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그것은 조선 농민의 생활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토지를 약탈당한 농민은 지주에 예속된 소작인 또는 화전민이 되거나, 길거리로 쫓겨나와 실업자 또는 저임금 노동자로 전락하였다.

양주군도 예외 없이 일제의 가혹한 수탈 등으로 인하여 피폐했던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1925년 여름 대홍수와 1926년 여름에도 수재를 당하여 극심한 피해를 입었다. 특히 양주는 1930년대 들어서 농촌 사정이 급격히 열악해진 것으로 보인다. 1933년 초에는 1931년에 비하여 순 소작농만 1,400여 호 증가하고 지주는 220여 호, 자작농은 420여 호가 몰락한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3·1 만세 운동]

서울과 인접한 양주 지역은 항상 서울에서 일어나는 상황에 많은 영향을 받고 있었다. 3·1 운동 당시 14개 면에 달했던 양주군의 만세 운동은 3월 중순에서 하순 사이에 집중적으로 발생하였다. 양주군의 만세 운동은 3월 13일과 14일에 걸쳐 미금면 평내리에서 봉기가 시작되어 3월 31일 진접면 부평리에서의 봉기에 이르기까지 연인원 1,000명, 시위 횟수 22회에 달하는 독립 만세 운동이 발생하여 양주군 전체 16개 면 가운데 회천면은현면을 제외한 14개 면의 주민들이 참여한 양주군 전체의 민족운동이었다.

3월 중순부터 하순까지 양주군 내의 시위에서 117명이 체포되었는데, 당시 경기도 전체에서 체포된 수는 3,349명이었고 양주군보다 많은 체포자 수를 낸 경기도 내의 군은 안성군[429명], 고양군[267명], 개성군[189명], 수원군[182명]뿐이었다. 이것은 양주군이 서울을 제외하고 경기도 내에서 5번째로 많은 피검거자 수를 기록했을 만큼 당시 시위 양상의 치열함을 보여 주는 것이다.

[사회단체]

3·1 운동을 통하여 민족적·계급적 의식을 자각한 조선 민중은 자신들의 이념을 구현할 사회단체의 결성을 요구하게 되었다. 1920년대 이후 양주군에서는 농민 단체·노동 단체·청년 단체·소년 단체 등 많은 사회단체가 결성되었는데, 각 단체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양주천도교청년회(楊州天道敎靑年會)는 1922년 2월 1일 강연회, 체육, 양학 교육 등 청년 계몽 운동을 목적으로 창립되었고, 의정부청년회(議政府靑年會)는 1922년 3월에 군내 유지(有志)와 일부 조선인과 일본인의 발기로 조직되었다. 유양엠윗청년회[維楊엠윗靑年會]는 1922년 초에 양주군 주내면 유양리에서 기독교 청년 단체로서 강연회, 토론회와 산업 장려 등의 계몽 활동을 목표로 결성되었으며, 양주청년회(楊州靑年會)는 1922년 봄에 조직되었다. 의정부기독청년회(議政府基督靑年會)는 1923년 양주군 시둔면 의정부리 예배당에서 청년과 농촌 생활에 대한 계몽을 목표로 조직되었고, 금오청년회(金梧靑年會)가 1923년 11월 17일 양주군 시둔면 의정부리 예배당에서 습관 개선, 지방 개량, 산업 증진을 목표로 조직되었으며 회천청년수양회(檜泉靑年修養會)는 1924년 10월 19일 양주군 회천면 내에서 사회사업과 지방 발전에 공헌할 것을 목적으로 창립되었다. 의정부소년회(議政府少年會)는 1923년 11월 17일 구내 일부 지식인과 유지들의 발기로 창립되었고, 창동소년회(倉洞少年會)는 1925년 2월 18일 양주군 노해면 창동리 출신의 배희주(裵熙周)의 발기로 신흥의숙(信興義塾)에서 결성되었다. 의정부소년척후대(議政府少年斥候隊)는 1925년 9월 양주군 내 다수 유지의 발기로 창립되었으며, 동명소년회(東明少年會)는 1920년대 말 양주군 시둔면 의정부리에서 농촌 계몽 운동 단체로 결성되었고, 소작농회(小作農會)가 1925년 3월 9일 이사항(李思恒) 등의 발기로 양주군 내 공회당에서 결성되었다. 양주진흥회(楊州振興會)의 경우는 1932년 10월 농촌의 생활 개선과 농민들의 자력갱생을 목표로 결성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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