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0003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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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東學農民運動 |
영어공식명칭 | Donghak Peasant Revolution |
이칭/별칭 | 동학농민혁명,동학농민전쟁,동학란,동학당의 란,동학농민운동,동학운동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전라북도 완주군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박대길 |
[정의]
1894년 전라북도 완주군에서 펼쳐진 동학농민운동.
[개설]
조선 후기 정치기강의 문란과 삼정의 폐단으로 인한 농민의 피폐한 삶과 농민 봉기, 서양 제국주의 세력의 등장에 따른 위기의식의 고조, 동학의 창도와 전파 등을 배경으로 일어났다. 따라서 동학농민운동은 위정자와 수령의 부정부패와 수탈과 착취에 맞선 사회개혁, 서양 세력의 경제적·문화적 침투와 조선 침략을 노골화한 일본에 맞선 반침략을 목적으로 했다. 1893년 11월 사발통문 거사계획과 1894년 1월 고부봉기에서 시작, 이듬해 1895년 3월 전봉준을 비롯한 주요 지도자들이 순국하면서 막을 내린 동학농민운동은 우리 역사에서 최대의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완주군 동학농민운동의 과정]
전라북도 완주군에서 동학농민운동은 다음과 같은 과정으로 전개되었다. 전라북도 완주 지역에서 가장 먼저 언급되는 동학교도는 전라북도 완주군 고산 지역의 박치경이다. 박치경은 1884년 6월, 동학의 2대 교주 최시형이 정부의 추적을 피해 전라북도 익산 사자암에 은신할 때 모든 편의를 제공했다. 이로 보아 박치경의 동학 입교는 1884년 6월 이전으로 추정된다. 박치경은 1894년 1차 농민농민운동 당시 전라북도 완주군 고산 지역에서 기병(起兵)[군사를 일으킴]했다. 1892년 10월과 1892년 11월 사이에 동학에서는 교조신원운동(敎祖伸寃運動)을 공개적으로 전개했다. 억울하게 순도(殉道)[도의(道義)를 위해 목숨을 바침]한 최제우의 신원[사면복권(赦免復權)], 동학의 공인을 요구한 교조신원운동은 1893년 서울 광화문 복합상소, 보은취회, 금구취회로 이어졌다. 처음에는 종교운동이었으나 점차 정치투쟁으로 바뀜으로써 뒷날 동학농민운동의 배경이 되었다. 삼례취회[삼례집회]에서는 교조 최제우의 신원, 동학 공인을 성취하지 못했지만, 동학교도에 대한 침탈과 착취를 금지시키겠다는 전라감사의 답을 얻음으로써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다.
1893년 11월, 고부[현 전라북도 정읍시 고부면]의 동학교도와 농민은 군수 조병갑의 탐학과 수탈을 응징하고, 전주성을 함락한 뒤 서울로 진격할 것을 결의한 ‘사발통문거사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1894년 1월 10일 새벽, 고부관아를 점령하면서 혁명이 시작되었다. 혁명은 무장기포, 백산대회, 황토현전투, 황룡전투 등을 거친 후 전주성[현 전라북도 전주시]을 점령함으로써 최대의 승리를 거두었다. 전주성을 탈환하라는 고종의 명령을 받은 신임 전라감사를 비롯한 정부의 고위관리들은 전신국이 설치된 삼례에 머물면서 전주 탈환을 하고자 했다. 청일 양군의 조선 상륙과 동학농민군 내부문제 등으로 전주성에서 철수한 동학농민군은 1894년 9월까지 전라도 각지에서 집강소 체제를 운영했다. 1894년 전라북도 완주군 고산을 비롯한 전라북도 완주 지역은 동학농민군이 장악했고, 폐정개혁을 실시한 것으로 전한다.
조선에 무단으로 상륙한 일본은 경복궁을 무력으로 점령하고 친일정권을 수립했으며, 청일전쟁을 일으켜 조선의 침략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이에 전봉준을 비롯한 동학농민군은 구국항일 의병전쟁을 계획했다. 전봉준은 삼례에 대도소를 설치하고 전주를 비롯한 인근 지역에서 군수물자와 병력을 보충했다. 1894년 9월, 삼례를 출발한 동학농민군은 우금치전투에서 일본군과 정부군의 엽합군에게 패배하고 남하했다. 이때 일본군은 삼례를 동학농민군의 본거지로 판단하고 삼례 점령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일본군과 정부군의 일방적인 토벌작전에 맞서던 동학농민군은 1894년 11월 고산현 산천리와 고산읍에서 두 차례의 전투를 벌였으나 패배했고, 일부는 대둔산으로 옮겨 최후까지 항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