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7004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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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白江戰鬪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전라북도 군산시 |
시대 | 고대/삼국 시대 |
집필자 | 김종수 |
[정의]
660년 전라북도 군산시 금강 하구 유역 일대에서 벌어진 백제와 나당 연합군의 전투
[개설]
백제의 국정이 문란해진 틈을 이용 나당 연합군이 탄현(炭峴)을 넘어 공격하여 백제의 장군 계백이 거느린 5,000명의 결사대를 황산벌에서 격파한 뒤, 당나라의 소정방(蘇定方)과 신라의 김인문(金仁問)이 이끄는 13만 명의 당군이 백강(白江)으로 침입하여 백제군과 싸운 전투이다.
[역사적 배경]
백제는 무왕과 의자왕 대에 걸쳐 신라에 대한 압박을 강화하고, 이에 위협을 느낀 신라는 김춘추로 하여금 당의 고종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당은 오로지 고구려의 공격에 몰두하고 있었으나, ‘고구려를 멸망시키려면 우선 백제를 쳐부수어야 한다.’라는 전술의 변화에 의해 마침내 백제 공격으로 방향을 바꾸게 된다.
[경과]
당의 고종은 백제 출병을 660년 3월에 명하고, 6월에 출병하기에 이르렀다. 당은 소정방으로 하여금 13만 군병을 통솔하여 정벌하러 오고, 아울러 신라왕 김춘추는 우이도 행군 총관이 되어 신라군을 이끌고 합세하였다.
이때 의자왕은 귀양 살이를 하고 있던 좌평 흥수에게 사람을 보내 그 방책을 물었고, 흥수는 5년 전 옥사한 성충이 의자왕에게 올린 글과 같이 백강과 탄현에서 나당 연합군을 저지하자고 주장하였으나 대신들이 흥수가 왕을 원망하고 있다고 말하여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후 당과 신라의 군사가 이미 백강과 탄현을 지났다는 말을 듣고, 계백 장군을 황산벌 전투에 보내고, 이 전투에서 계백 장군이 패한 이후에야 비로소 군사를 합하여 웅진구를 막고 강변에 주둔시켜 지키게 하였다.
660년 6월 21일 덕물도에 도착한 당군은 신라 태자 김법민과 만나 660년 7월 10일 사비성 남쪽에서 합세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당군은 660년 7월 9일 기벌포에 상륙을 시도하였다. 백강 어귀에 이른 소정방은 기벌포 상륙 작전을 펼쳤는데 1차 상륙 부대는 자신이 거느리고 나머지는 군선을 타고 백강 안으로 들어오도록 하였다. 소정방 부대는 갯벌에 버들 자리를 깔아 무사히 상륙하였다. 상륙에 성공한 소정방은 산 위에 진을 치고 백제군과 전투를 벌였다. 이때 전사한 백제군이 수천여 명에 달하였다고 한다.
백제군은 당군을 맞아 강가에 둔을 치고 대항하였으나 수적 열세에 밀려 패배하고 수천여 명이 전사한 것이다.
[결과]
백강전투의 패배로 인하여 당군은 사비성으로 진격하였고, 백제는 좌평 각가(覺伽)를 시켜 당나라 군대의 철병을 간청하지만 소정방의 거절로 실패하였다. 이에 660년 7월 13일 의자왕은 태자 효와 소수의 측근을 데리고 웅진성으로 피난하였지만, 660년 7월 18일 웅진성에서 나와 항복하였다. 이로써 백제는 망하고 백제의 영토는 나당 점령군의 지배 아래에 들어가게 되었다.
[의의와 평가]
백제는 당시 국정의 문제로 인한 내부적 혼란으로 인해 국제 정세를 제대로 읽지 못했다는 한계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오성인 전설과 천방사 전설을 통해서 볼 수 있듯이 당시 백제인들이 나라를 지키고자 했던 노력은 큰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