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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700011
한자 白江戰鬪-五聖山-五聖人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전라북도 군산시
시대 고대/삼국 시대
집필자 이세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사건 시기/일시 475년 - 고구려 장수왕 위례성 침입하여 백제 개로왕을 죽임
천도 사항 시기/일시 475년 - 백제 문주왕 수도를 웅진으로 천도
원정 시기/일시 645년 - 당나라 태종 제 1차 고구려 원정
원정 시기/일시 647년 - 당나라 태종 제 2차 고구려 원정
원정 시기/일시 648년 - 당나라 태종 제 3차 고구려 원정
원정 시기/일시 655년 - 당나라 고종 제 4차 고구려 원정
원정 시기/일시 658년 - 당나라 고종 제 5차 고구려 원정
원정 시기/일시 659년 - 당나라 고종 제 6차 고구려 원정
공격 시기/일시 660년 - 나당 연합군 백제 공격
멸망 시기/일시 660년 - 백제 멸망
현 소재지 오성산 - 전라북도 군산시 성산면 지도보기
성격 전쟁
관련인물 의자왕|소정방|김인문|김춘추|흥수|성충|김유신

[660년 백강전투 이전의 상황]

백제의 시조 온조왕[?~28]이 기원전 18년(온조왕 원년) 위례성에 도읍을 정한 뒤 475년(개로왕 21) 고구려 장수왕[394~491]이 침입할 때까지 대략 500년 동안 백제의 수도는 오늘날의 서울인 한성(漢城) 지역에 있었다. 이 지역에서 성장한 백제는 서해를 원활히 이용함으로써 내륙 수로를 이용한 교역뿐만 아니라 중국 대륙과의 교역까지도 활발히 전개하였다. 그런데 475년(개로왕 21)에 고구려의 침입으로 한성이 함락되자, 백제는 475년(문주왕 원년)에 지금의 공주인 웅진(熊津)으로 도읍을 옮기게 된다. 고구려의 침입에 의한 갑작스러운 웅진 천도에 따라 백제는 한성 지방에 두었던 모든 기반을 잃게 되었다. 문주왕(文周王)[?~477]이 이와 같이 웅진으로 천도하게 된 이유 가운데는 고구려의 세력을 저지할 수 있는 군사적 요충지였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이유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에 못지않게 대중 관계 및 대외 관계상 필요한 금강(錦江) 중심 수로의 확보라는 점도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다. 따라서 금강 하구에 위치한 군산은 백제의 관문으로서 발전하게 된다.

그런데 백제 말기 무왕(武王)[?~641], 의자왕(義慈王)[?~660] 대에 이르러 백제는 신라와의 잦은 전쟁으로 백성들의 생활은 어려움에 시달리고 있었다. 특히 무왕의 사치와 유흥으로 국력은 더욱 소모되었다. 무왕은 백제의 도성인 사비성 남쪽에 궁남지(宮南池)를 파서 물을 멀리서 끌어 들이고, 사방의 둑에는 버드나무를 심고, 연못의 가운데에는 신선이 사는 산과 같은 인공 섬을 쌓아놓고 유흥을 즐기는 등 사치스런 생활을 하였다. 그의 뒤를 이은 의자왕은 태자 시에는 자질이 출중하고 효성이 지극하여 사람들로부터 ‘해동 증자(海東曾子)’라고 칭송되었다. 그러나 의자왕은 왕위에 등극한 후 신라와의 전쟁에서 계속적으로 이룩한 승리에서 오는 자만과 주위 귀족 세력의 분열 등에 의하여 점차 정치를 그르치게 되었다. 또 의자왕은 잦은 신라와의 전쟁에도 불구하고 화려한 태자궁(太子宮)과 망해정(望海亭)을 짓고 궁녀들과 함께 환락에 빠져들었다. 백제의 이러한 사정과는 달리 신라에서는 당나라에 여러 차례 사신을 보내 백제에 대한 공격을 유도하였다.

당나라 고종(高宗)[628~683]은 역대 중국 왕조의 최대 숙적인 고구려를 치기 위해 신라의 백제 공격 제의를 받아들였다. 고구려를 공격하다가 멸망한 수나라의 뒤를 이어 등장한 당나라의 고구려 공격은 집요하였다. 660년 백제의 침공을 결정하기까지 큰 전투만 해도 6차례에 이르렀다. 제 1차 고구려 원정은 645년 당나라 태종(太宗)[626~649]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수십만의 병력을 동원한 당나라 태종의 제 1차 고구려 원정은 안시성(安市城) 전투의 패배로 인해 실패로 끝났다. 당나라의 처절한 패배였으나 당나라 태종은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647년에 제 2차, 648년에 제 3차 고구려 원정이 시도되었다. 당나라 태종에 뒤이어 즉위한 고종 역시 태종의 ‘고구려 공격을 중지하라[罷遼東之役]’는 유언에도 불구하고 고구려 공격을 늦추기 않았다. 655년에 제 4차, 658년에 제 5차, 659년에 제 6차 고구려 원정을 시도하였다. 이러한 계속된 당나라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고구려는 끄떡없었다. 이에 당은 고구려 공격에 대한 방향 전환을 모색하였다. ‘고구려를 멸망시키려면 우선 백제를 없애야 한다[欲呑滅高麗 先誅百済]’는 전략을 세운 것이다. 이러한 전략에 따라 당나라는 신라의 백제 공격 제의를 수락하였다,

[660년 백강전투의 경과]

660년 3월 당나라 고종은 백제 출병을 명하여 6월에 당나라 13만 대군은 산동성(山東省)을 출발하였다. 당나라는 좌무위대장군(左武衛大将軍) 소정방(蘇定方)[592~667]을 신구도 행군대총관(神丘道行軍大摠管)으로, 김인문(金仁問)[629~694]을 신구도 행군부대총관(神丘道行軍副大摠管)으로 삼아 당군을 통솔하게 하였고, 신라왕 김춘추(金春秋)[604~661]는 우이도 행군총관(嵎夷道行軍総管)이 되어 신라군을 이끌고 합세하였다. 백제 공격에 동원된 당군과 신라군의 규모는 당군 13만, 김유신(金庾信)[595~673]이 이끄는 신라군 5만 등 총 18만의 대군이었다. 백제는 역사상 유례없는 나당 연합군의 기습공격에 직면하였던 것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나당연합군의 침공 소식을 들은 백제 조정은 나라의 국운을 놓고 회의를 열었는데, 의견이 양분되었다 한다. 당군이 바다를 건너오니 이들을 먼저 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과 신라가 백제군에게 여러 차례 패했으니 신라군을 먼저 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으로 나뉘었다는 것이다. 고민하던 의자왕은 귀양살이를 하고 있던 좌평 흥수(興首)에게 사람을 보내 물었다고 한다. 이때 흥수의 대답은 5년 전에 옥사한 성충이 죽기 전에 의자왕에게 올린 글과 같이 “당병으로 하여금 백강[현재의 금강]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신라인으로 하여금 탄현을 넘지 못하게 하라.”는 것이었다 한다. 그런데 대신들의 반대로 이러한 흥수백강 사수설은 거부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러한 『삼국사기』 기사는 김부식[1075~1151] 등 『삼국사기』 편찬자들이 백제가 적을 앞에 두고 내분이 일어나 멸망하였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과장한 것이거나 사실을 왜곡한 것으로 보인다. 당과 신라의 침략 사실을 은폐하고 백제가 어리석어 스스로 멸망하였다는 것을 강조하는 가운데 이런 왜곡된 서술이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실제 백강전투는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살펴보자. 660년 6월 18일 산동성 내주(莱州)의 성산(城山)에서 출발한 당군은 21일 서해 상의 덕물도(徳勿島)에 도착하였다. 이때 덕물도에 가서 당군을 맞이하였던 신라 태자 김법민(金法敏)[626~681]은 소정방과 7월 10일 사비성 남쪽에서 신라군과 당군이 합세하기로 결정하였다. 소정방이 거느린 당군은 덕물도를 출발하여 서해안으로 내려가 기벌포[군산]에서 상륙을 시도하였다. 당군이 군산으로 진격해 오자 백제는 『삼국사기』에 “군사를 합하여 웅진강 어구를 막고 강가에 군대를 주둔하였다.[合兵禦熊津口 浜江屯兵]”라고 하듯이 수군과 육군이 합동 작전을 전개하면서, 강을 따라 진을 치고 대응하였다.

금강 입구에 다다른 소정방은 상륙 작전을 펼쳤는데 1차 상륙 부대는 자신이 거느리고 나머지는 군선을 타고 금강으로 들어오도록 하였다. 소정방과 1차 상륙부대가 상륙한 강 하구는 개펄이라 발이 빠져 상륙하기가 어려웠지만 버들로 엮은 자리를 깔아 무사히 상륙할 수 있었다 한다. 이때 버들자리를 깔아 상륙한 장소는 현재 군산시 옥산면 금성리 일대로 추정되고 있다. 이곳은 지금은 사라진 금강 지류가 만경강과 합류되는 여울목에 자리 잡고 있는데, 금성리 주변에는 버드나무와 관련된 마을 명칭이 확인된다. 내류(内柳) 마을, 외류(外柳) 마을, 평류(平柳) 마을, 유풍(柳豊) 마을 등이 그것이다. 이와 같은 버드나무와 관련된 마을 명칭은 이곳에 버드나무가 풍부하게 있었다는 증거이고, 이러한 풍부한 버드나무로 소정방은 상륙을 위한 버들자리를 만들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버들자리를 깔아 군산 상륙에 성공한 소정방은 산 위에 진을 치고, 백제군과 전투를 벌였다. 이를 보여주는 것이 『구당서』에 나오는 다음의 기사이다.

소정방이 동쪽 언덕으로 올라가 산에 올라 진을 치고 백제군과 크게 싸웠다. [당의 수군은] 돛을 달아 바다를 덮고 서로 이어 이르렀다. 적군이 패배하여 죽은 자가 수천여 명이었고 나머지 군사들은 달아났다. [당의 수군은] 조수를 만나 올라가는데 배가 꼬리를 이어 강으로 들어갔다.’

이 기사는 소정방이 먼저 상륙하여 백제군과 대결하는 사이에 나머지 군선들이 뒤이어 금강으로 들어왔음을 보여준다. 때마침 조수가 밀려들어오는 시각이라 당나라 군선은 밀물을 타고 들어와 형세를 완전히 장악하였다. 이때 전사한 백제군이 수천여 명에 달하였다고 한다. 백제의 육군과 수군은 당군을 맞이하여 1차적으로 강가에 주둔하여 대항하였으나 수적 열세에 의해 패배하고 수천여 명이 전사한 것이다. 이와 같이 군산 지역은 나당연합군의 침공 당시 최초로 격전이 벌이진 곳이다. 당나라 침략군에 맞선 백제 군사들과 군산 주민들의 영웅적인 전투는 이후 군산 사람들의 가슴 속에 살아남아 오성산 전설로 이어지게 된다.

『삼국사기』에는 의자왕과 대신들이 성충(成忠)[?~656]과 흥수백강 사수 권고를 듣지 않고 당나라 군사들을 백강에 그대로 들어오게 하여 망했다고 서술되어 있으나, 실제는 그렇지 않았다. 백강[기벌포]에서는 당군에 맞서 백제군과 군산 주민의 저항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이때 백제 저항군의 전사자가 수천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저항군의 전사자가 수천여 명에 달했다면 당군의 전사자는 이보다 훨씬 많았을 것이다. 당시 백제군과 군산 주민은 지형의 이점을 이용하여 게릴라 전술을 사용하였을 것이고 당군은 지형도 익숙하지 못하고 또 많은 군사들이 집결하여 있어 공격 목표가 되기 쉬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삼국사기』를 편찬한 김부식은 이러한 당군의 피해 상황은 기록하지 않고 오직 백제 저항군의 피해 상황만을 기록하였다. 이에 당군의 피해 상황은 정사에는 기록되지 못하고 야사(野史)나 구전으로 전해지게 되었다.

군산 지역에서 전개된 백강전투에서 당군이 입은 피해는 상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군이 고전하였다는 것을 말해주는 야사가 여러 형태로 전래되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삼국유사』에서는 백강전투의 상황을 다음과 같은 형태로 전하고 있다.

‘당나라 군사와 신라 군사는 합세하여 전진하여 진구(津口)까지 나가서 강가에 군사를 주둔시켰다. 이때 갑자기 새가 소정방의 진영 위에서 맴돌므로 사람을 시켜서 점을 치게 했더니 “반드시 원수가 상할 것입니다”하였다. 소정방이 두려워하여 군사를 물리고 싸움을 중지하려 하므로 김유신소정방에게 이르기를 “어찌 나는 새의 괴이한 일을 가지고 천시(天時)를 어긴단 말이오. 하늘에 응하고 민심에 순종해서 지극히 어질지 못한 자를 치는데 어찌 상서롭지 못한 일이 있겠소.”하고 신검을 뽑아 그 새를 겨누니 새는 몸뚱이가 찢어져 그들의 자리 앞에 떨어졌다. 이에 소정방백강 왼쪽 언덕으로 나와서 산을 등지고 진을 치고 싸우니 백제군이 크게 패하였다. 당나라 군사는 밀물을 타고 전선(戰船)이 꼬리를 물어 북을 치면서 전진했다. 정방은 보병과 기병을 이끌고 바로 백제의 도성으로 쳐들어가 30리쯤 되는 곳에 머물렀다. 이때 백제에서는 군사를 다 내어 막았지만 패해서 죽은 자가 1만여 명이나 되었다. 이리하여 당나라 군사는 승세를 타고 성으로 들이닥쳤다.’[『삼국유사』 1권, 「태종춘추공」]

우선 위 『삼국유사』의 전설은 사실과는 다르다. 당나라 군사와 신라 군사가 합세한 것은 당군이 백강전투를 치르고, 신라는 황산벌 전투를 치른 이후인 7월 12일이었다. 당군이 백강전투를 치른 것은 7월 10일 이전으로 이때 소정방김유신을 만났을 리가 없다. 아마 이것은 설화가 구전되어 내려오면서 변이된 것으로 보인다. 백제를 멸망시킨 인물이 김유신소정방이라는 민중의 의식이 이와 같이 백강전투에서도 김유신소정방과 함께 있었던 것으로 만든 것으로 보인다. 민중의 소박한 역사의식이 이와 같이 사실을 변화시킨 것이다. 그런데 위 『삼국유사』 전설에서 김유신 부분만 제외하면 이 전설은 백강전투의 상황을 상징적으로 전해준다 하겠다. 즉 백강전투에서 백제군과 군산 주민의 저항이 소정방의 진영 위에 맴도는 새로 상징되었으나 당군은 이때 ‘원수가 상할’ 정도로 고전했으며, 소정방은 두려워하여 군사를 물리고 싸움을 중지하려고까지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660년 백강전투와 관련된 전설들]

백강전투는 『삼국유사』에서 위와 같은 형태로 전해지고 있지만, 군산 지역에서도 이때의 전투 상황을 전하는 전설이 두 가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오성산(五聖山) 전설’과 ‘천방사(千房寺) 전설’이 그것이다. 오성산 전설은 『여지도서』에 실려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읍지에 말하기를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백제를 칠 때 이 산 아래 주둔하였는데 누런 안개가 해를 가리어 헤매어도 길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때 홀연 다섯 노인이 와서 진 앞에 이르므로 정방이 길을 물었는데 노인들이 말하기를 네가 우리나라를 치고자 하는데 어찌 길을 가르쳐줄쏘냐하였다. 정방이 화내어 다섯 노인을 죽이고 갔다. 회군하는 날에 뉘우치고 신령스런 사람으로 생각하여 이 산에 장사지내고 이어 오성산이라 불렀다 한다. 산꼭대기에는 지금도 오성(五聖)의 터가 있다.’

여기에서는 당군의 고전을 ‘누런 안개’로 상징하고 있다. 누런 안개가 해를 가리어 길을 찾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이 당군을 고전하는 과정에서 다섯 노인이 등장하고 있다. 위 전설에는 다섯 노인이 ‘홀연’ 나타났다고 했을 뿐 다섯 노인이 나타난 구체적인 정황은 전혀 전하고 있지 않다. 그런데 이 다섯 노인에게 소정방이 길을 묻자 다섯 노인이 길을 가르쳐 주기를 거절하자 소정방이 이들을 죽였다는 것이다. 이 전설은 천여 년을 걸쳐 내려오면 구체적인 정황은 생략되어 버렸다. 단지 오성인(五聖人)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당나라 침략군에게 저항하였고 그것이 민중들의 의식 속에 깊이 각인되어 이러한 전설 형태로 전해 내려온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다섯 노인은 ‘노인’으로 묘사된 것으로 보아 백제군의 장군이라기보다는 군산 지역의 원로로 판단된다. 그리고 오성산은 당시 백제 저항군의 방어 거점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도 오성산 정상 부근에는 백제 토성의 흔적이 남아있다. 이와 같이 오성인은 외적에 대한 저항 의지의 상징이었고, 오성산은 외적에 대한 저항 거점이어서 이 둘은 자연스럽게 결합되어 오성산 전설로 전승되어 온 것으로 보인다. 이후 군산 주민들은 오성산을 바라보면서 백제 멸망의 뼈아픈 역사적 경험과 오성인의 저항정신, 호국정신을 상기했던 것이다.

이러한 오성산 전설과는 전혀 다른 유형을 보여주는 것이 『신증 동국 여지 승람』에 나오는 ‘천방사 전설’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천방사는 천방산에 있다. 이응정의 중수기가 있다. 전해지는 말에 신라 장군 김유신이 백제를 침공하고자 당나라에 파병을 요청하자 당나라에서 소정방으로 하여금 배로 12만 군사를 인솔하고 가게 했다. [그가] 도착하여 산 밑에 정박하려고 하는데, 안개가 짙게 끼어 천지가 뿌옇게 어두웠다. 그래서 [김유신이] 산신령께 ‘만약 안개를 거두어 주신다면 모름지기 천 채의 절을 지어 부처님을 받들어 모시겠습니다.’라며 기도를 올렸다. 그러고 나자 그날로 하늘이 맑아졌다. 그런 뒤 산에 올라가 주위를 둘러보니 산세가 아주 좁아 도저히 천 채의 절을 세울 수 없었다. 그래서 돌 천 개를 배열하여 절 모양만을 갖추고 한 채의 절을 짓고는 이름을 천방사라고 하였다. 그 뒤에 선림사로 이름을 고쳤으며, 고려 숙종 때 근신을 보내 중수하고 불상을 모셨다. 지금은 다시 천방사라고 부르고 있다.’

이 전설은 앞에서 살펴본 『삼국유사』와 마찬가지로 백강전투에서 김유신소정방이 함께 있었던 것으로 전하고 있다. 또 주인공을 소정방이라고 해야 할 것을 김유신으로 변이시키고 있다. 소정방김유신이 함께 백제를 멸망시킨 인물이라는 민중의 의식 속에서 오랜 기간 동안 전설이 전해내려 오면서 이러한 변이가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위 ‘천방사 전설’에서는 침략군을 대하는 태도가 오성산 전설과 전혀 다르다. 오성산 전설에서 오성인은 죽음도 불사하고 외적에게 저항하고 있는 것에 비해 천방사 전설에서 산신령은 절 천 채만 지어 주면 외적과도 협력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당시 침략군에 대한 군산 주민과 불교계의 태도가 상이하였음을 드러내고 있다. 오성산 전설에서 군산 주민으로 대표되는 오성인과는 달리 불교계는 포교를 위해서 침략군과도 손잡았던 것이다. 이것은 불교계는 불교 국가인 당이나 신라가 지배를 해도 잃을 것이 없었지만, 군산 주민들로서는 나라를 잃는 것은 모든 것을 잃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망국의 백성들이 당하는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나당 연합군이 백제의 도성을 점령했을 때에도 백제의 민(民)들은 나당 연합군의 온갖 행패를 감수하여야 했다. 소정방은 사비성에서 의자왕의 항복을 받은 후 군대를 풀어 성내의 집들을 겁략하게 하였다. 이에 군사들은 재물을 약탈하고 부녀자들을 겁탈하고 젊은이들을 붙잡아 죽이는 등 온갖 행패를 자행하였다. 그래서 계백 장군은 황산벌로 출정하기 전에 나라가 망하게 되면 처자들은 몰수되어 노비가 될 것이 분명하므로 그는 처자식들을 모두 죽이고 전장에 나갔다. 이와 같이 나라를 잃게 될 경우 그 백성들은 비참하고 고통스럽게 되기 때문에 군산 주민들은 불교계와는 달리 격렬하게 침략군에 저항하였던 것이다.

한편 군산 주민들로서는 당군에 협력한 불교계에 대한 감정이 좋을 리 없었다. 당시 불교계에 대한 군산 주민들의 감정을 엿볼 수 있는 것이 서천에서 전해 내려오는 천방사 전설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소정방이 백제를 치기 위하여 대군을 이끌고 서해를 건너와 금강을 거슬러 오르고자 했다. 그러자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고 바람이 불며 파도가 높아져 계속 진군을 할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천방산 밑에 병선을 정박시키고 묘안을 생각하고 있는데 마침 병영 가까운 곳으로 중이 지나가고 있었다. 중에게 물어보면 묘책이 나올 것 같다는 생각으로 그를 불러오게 하여 방법을 물었다. 그러자 중이 ‘이곳을 지나가자면 텃세를 내야 한다.’면서 그러려면 ‘이곳에 천 칸의 집을 짓고 천일제를 지내야만 한다.’고 했다. 이에 소정방이 부하들을 시켜 그렇게 하도록 했다. 그러고 나서야 그는 무사히 백제도성으로 진군을 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이 절은 천방사가 되고 뒷산은 천방산이라 불렀다. 이로부터 이 절에는 많은 중들이 거처하게 되었는데 어쩐 일인지 이 절의 중들은 인근 주민들을 괴롭히고 부녀자를 농락하기도 하는 등 백성들에게 나쁜 짓들을 많이 했고, 그래서 백성들로부터 늘 지탄을 받았다. 그런데다가 이 절에는 빈대가 하도 들끓어 얼마 가지 않아 그만 망하고 말았다. 사람들은 이 빈대를 당나라 군사들이 뿌리고 간 것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이곳 인근 사람들은 혹 빈대를 보게 되면 ‘천방사 홀아비 당병(唐病)인가!’라는 푸념과 함께 이를 모질게 잡아 죽이곤 한다.’

위 전설에서 천방사 승려들은 나당연합군에 협조하여 교세를 확장하고 이후 군산 주민들을 괴롭히고 부녀자를 농락하는 등 나쁜 짓을 많이 했다고 한다. 그런데 천방사는 빈대가 많이 들끓어 망했는데, 사람들은 이 빈대를 당나라 군사들이 뿌린 것으로 여겼다 한다. 이에 천방사 인근 주민들은 빈대만 보면 ‘천방사 홀아비 당병인가’하면서 이를 모질게 잡아 죽이곤 했다는 것이다. 당나라 침략군들과 이들에 협조한 천방사 승려들에 대한 증오가 빈대에 전이되어 주민들은 빈대를 잡아 죽이면서 그들의 원한을 푼 것으로 보인다. 즉 힘이 없는 민중들은 빈대를 외적에게 협력한 천방사 승려라고 생각하고 이를 잡아 죽이면서 천방사 승려를 응징하는 것으로 간주한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이와 같이 백강 전투가 벌어진 군산에는 오성산 전설과 천방사 전설이라는 상이한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이 전설을 통해 군산 주민들은 외적에 대해 목숨을 걸고 항거한 오성인을 오랫동안 기리고 그들에게 존경의 예를 올린 반면, 침략자에게 협력한 천방사 승려들에게는 빈대를 보면 그들을 생각할 만큼 증오를 드러내었음을 엿볼 수 있다. 한편 오성인들은 군산 뿐만 아니라 부여 지역에서도 침략자들에 대한 저항의 상징으로 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부여군 임천면에 전하고 있는 ‘문동교(問童橋) 전설’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치고자 하였을 때 당나라 소정방이 십삼만 대군을 이끌고 군산 어귀인 기벌포를 지나 나포를 거쳐 반조원까지 올라왔다. 소정방이 반조원에서 잠을 자다가 꿈에 오성산신을 자처하는 노인이 나타나, “돌아가는 것이 살 길이다”라고 말하였다. 다음날 소정방이 각별히 주의하며 진격하여 부여군 임천면 만사리에 이르렀을 때 숲속에서 금송아지가 뛰놀고 있었다. 그래서 배를 강가에 대고 부하 몇 사람과 같이 금송아지를 보고 쫓아갔으나 뒷산으로 달아나버렸다. 다시 임천에 나와 놀고 있는 어린아이에게 송아지 간 곳을 묻고서 가리킨 산에 가서 찾아보았으나 허사였다. 이때 갑자기 어젯밤 꿈을 생각하고 배로 돌아갔다. 그 뒤 어린아이를 만난 곳에 다리를 놓아주고, 아이에게 송아지 간 곳을 물었다 하여 문동교라 하였다.’

백강전투를 치른 이후 소정방은 나포(羅浦)를 거쳐 반조원(頒詔院)까지 올라가 거기서 잠을 잤는데, 소정방 꿈에 오성산신이 나타나 ‘돌아가는 길이 살 길이다’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군산 오성산의 오성인은 군산 인근뿐만 아니라 부여 지역까지 알려져 외적에 대한 저항의 상징으로 된 것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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