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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염업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400700
한자 製鹽業
영어공식명칭 Salt Industry
분야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충청남도 당진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한창준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65년 6월 30일 - 당진 최초 천일 제염인 박명규 염전 개업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07년 - 신가동 염전 폐쇄로 당진에서 염전 사라짐

[정의]

충청남도 당진시 북서부 해안 지역에 있었던 소금 제조업에 대한 내용.

[한국의 제염업]

제염은 고대에서 20세기 초까지 사용된 전오염(煎熬鹽)과 1907년 이후 채용된 천일염(天日鹽)으로 크게 나뉜다. 자염은 화력을 이용하여 채염하는 것으로 전오염이라고 한다.자염은 연료가 많이 필요했다. 따라서 연료의 수급이 원활한 곳에서 생산했다. 대개 갯벌을 이용한 채합 과정과 전오 과정을 거쳐 만드는데 당진 지역은 해수면이 가장 낮은 조금-조수가 가장 낮을 때, 매달 음력 8~9일, 그리고 25~26일 때를 이용하여 바닷가 뻘땅으로 나가서 뻘막을 짓거나 갈자락-조금 때 개흙을 말리던 자리를 소가 끄는 쟁기로 간 다음 몇 차례 더 갈아 개흙 덩어리를 분쇄하고 해수를 그 위에 뿌린다. 그리고 햇빛에 말리는 작업을 몇 차례 반복한다. 개흙의 염분량을 높이기 위한 것이다. 이와 같은 작업을 하루에 2~3회씩 3~4회 반복한다. 개흙을 일종의 여과 장치인 셧등에 넣고 바닷물을 뿌리면 아주 짠 함수를 얻을 수 있다. 이 함수를 가마솥에 넣고 8시간 이상 가열하면 소금을 얻을 수 있다.

이러한 전오염은 옛부터 전해 왔으나 생산비가 많이 들고 조선 말기에는 값싼 중국산 호염(胡鹽)을 수입하여 썼기에 제염업이 발달할 수가 없었다. 한국에서는 비로소 인천시 주안에 천일 염전을 축조하고 시험 재배한 결과 좋은 성과를 거두었다. 그 후 광양만 염전을 비롯하여 많은 염전이 개발되었으나, 근대 산업으로 제염업이 발달된 것은 8·15 해방 이후, 즉 1950년대부터이다. 1950년 이후 관독점 체제를 지양하고 민간 개발을 적극 장려하여 1955년에는 관영 염전 1,900정보, 민영 염전 8,700정보로 민간 염전이 4배 이상 되었다. 1965년에는 오랜 역사를 지켜온 전오염이 자취를 감추고, 천일 제염만이 생산되었다. 최근에는 인스턴트 식품의 대량 유통, 김장 풍속의 쇠퇴, 고임금, 간척 사업 등으로 염전의 휴업과 폐업이 속출하고 값싼 수입 소금의 등장으로 사양 산업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당진의 제염업]

당진은 북부 지역이 리아스식 해안으로 해안선의 드나듦이 심하고 간석지가 많다. 또 조차가 10m 내외로 크고 만조 때 바닷물을 염전에 인수하기 쉽고, 염도가 높다. 해안가에는 높은 산이 없어서 통풍이 좋고, 큰 하천이 적으며, 쾌청 일수가 많아 일조 지수가 높고 증발량이 많기에 제염업을 하기에 입지 조건이 아주 좋은 지역이다. 당진 지역의 제염업은 주로 북서부 해안 지역에 집중적으로 분포하였다. 당진군 석문면, 송산면, 송악면 해안 일대에는 갯벌이 넓게 발달되어 있고, 밀물과 썰물의 차가 커서 옛날부터 전오염을 생산하는 데 유리했다. 또한 주위 야산에는 송림이 울창하였고, 선재(船材), 즉 군함을 만드는 데 필요한 소나무를 육성, 보호하는 봉산(封山)이 많아 전오염 생산에 필요한 땔감을 조달하기 유리한 환경이어서 예부터 제염업이 발달하였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따르면 당진에 소금을 굽는 곳인 염소(鹽所)가 36개나 있었다고 전한다. 이 당시 가장 많이 염소를 소유하고 있던 경기도 남양도호부가 44개, 전라도 나주목이 35개소인 것을 감안하면 굉장히 많았던 것을 유추해 볼 수 있다.

당진 지방에서 전오염을 했던 자료는 찾아보기 어렵고 지명으로만 알아볼 수 있다. 염밭이 있던 곳에서는 지금까지 ‘벌’이란 지명이 남아 있어 소금산지를 알아보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석문면 통정리 벌안, 송산면 유곡리 벌뒤[벌후], 삼월리 벌고개, 가곡리의 목벌, 정미면의 염솔, 염장 등이 있다. 벌이란 소금을 굽는 가마의 보조 시설인 움집과 같이 동발처럼 세우고 볏집으로 이엉을 만들어 지붕을 덮어 놓은 가건물 형태를 말한다. 벌은 벌막, 염막이라고도 한다.

[현황]

2016년 현재 당진시에서의 염전은 남아있지 않다. 자염은 해방 전까지 운영했으나 땔감인 나무가 고갈되어 8·15 해방 전에 사라졌다. 대부분의 천일 염전들은 8·15 해방 후 활발한 간척 사업으로 일궜다.

당진에 최초로 천일 제염이 이루어진 것은 1965년 6월 30일에 신평면 매산리 164-8의 6필지에 생긴 총면적 11만 1359㎡[염전 4만 7160㎡, 저수지 5만 8757㎡, 기타 면적 4,992㎡]인 박명규의 염전이었다. 1974년 송산면 가곡리, 석문면 삼화리, 초락도리 등에 염전이 생기고 1991년 송악면 복운리에 마지막 염전이 생기고서 더 이상의 염전은 개발이 중단되었다. 1965~1991년 사이에 총 39개소의 염전이 허가를 받아서 운영되다가 1997년까지 29개소의 염전이 운영되었다. 고미, 삼보, 온양, 숙명, 이화, 옹가, 함박포, 수랑구미, 영진, 통진 고려 염전 등은 석문 방조제가 축조된 1992년에 폐업했다. 한성 염전은 송산 방조제가 축조된 1980년에 폐업했다. 송산면 가곡리 성구미동곡리에 걸쳐 있던 신가동 염전은 1965년도 새로운 간척 사업으로 생긴 염전인데 그 후 서해안 고속 도로 편입, 석문 방조제 축조, 대호 방조제 축조, 현대 제철소 공사와 함께 2007년에 폐업하였다. 이로써 당진에서 모든 염전은 사라졌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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