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300632
한자 寧越 興寧寺址 澄曉大師塔碑
이칭/별칭 징효대사 보인탑비
분야 종교/불교,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비
지역 강원도 영월군 무릉도원면 무릉법흥로 1352[법흥리 385]
시대 고려/고려 전기
집필자 홍성익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문화재 지정 일시 1977년 8월 22일연표보기 - 영월 흥녕사지 징효대사탑비 보물 제612호로 지정
현 소재지 법흥사 - 강원도 영월군 무릉도원면 무릉법흥로 1352[법흥리 385]지도보기
성격 비석
관련 인물 징효대사
재질 석재
크기(높이, 너비, 두께) 4.06m[전체 높이]|2.77m[비신 높이]|1.14m[너비]
소유자 법흥사
관리자 법흥사

[정의]

강원도 영월군 무릉도원면 법흥리 법흥사에 있는 징효대사의 비.

[개설]

영월 흥녕사지 징효대사탑비(寧越興寧寺址澄曉大師塔碑)징효대사가 900년 인천 지역에 있었다고 알려진 은강선원(銀江禪院)에서 입적하자 다비(茶毘)를 하고 나온 1,100여 개의 사리를 수습하여 907년(효공왕 11, 견훤 16)에 전라남도 낙안 동림사로 옮겨 봉안하였다. 924년(경애왕 1) 왕명으로 최언위(崔彦撝)가 비문을 짓고 최윤(崔潤)이 비문과 전액을 썼으나 나라가 혼란스러워 944년(혜종 1)이 되어서야 최환규(崔奐規)가 비석에 글을 새겨 영월 흥녕선원에 건립하게 되었다.

[위치]

영월 흥녕사지 징효대사탑비강원도 영월군 무릉도원면 법흥리 385번지에 있다. 944년 영월 흥녕선원지에 건립되었으나 현재는 영월 법흥사 경내에 있다.

[형태]

영월 흥녕사지 징효대사탑비는 거북 모양의 받침돌 위에 비신을 세우고, 위에 용머리가 조각된 옥개석을 놓았다. 받침돌의 역할을 하는 거북의 머리는 용의 머리에 가깝고 여의주를 물고 있다. 거북의 등에는 육각형의 문양을 새겼다. 옥개석에는 네 마리의 용이 중앙의 보주를 향하여 마주 보고 있다. 이러한 형태는 태종 무열왕릉비로 시작되는 석비의 양식사에서 석비의 양식을 파악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전체 높이는 4.06m, 비신 높이는 2.77m, 너비는 1.14m이다.

[금석문]

영월 흥녕사지 징효대사탑비의 내용을 정리하면 징효의 휘(諱)는 절중(折中)이고 황해도 봉산군 사람으로 아버지는 궁술과 기예에 뛰어 났으며 어머니는 백씨(白氏)이다. 826년(흥덕왕 1) 4월 7일 태어나 오관산사에서 진전법사(珍傳法師)에게 출가를 하고 15세에 부석사에서 잡화경(雜華經)을 배워 큰 도를 얻고 19세가 되던 844년 장곡사에서 구족계를 받은 후 여러 곳을 다니면 수행하였다. 풍악산 장담사(長潭寺)에 머물던 도윤화상(道允和尙)을 찾아가 제자가 되고 이어 도담(道譚)과 자인(慈忍)선사를 찾아 배워 크게 깨달았다. 882년 대법사이고 국통(國統)이었던 위공(威公)이 곡산사(谷山寺)에 머물도록 요청하자 마지못해 머물렀는데 사자산의 대선사 석운(釋雲)이 제자를 보내 자신이 머물던 사찰에 머물게 하였다. 거절할 수 없어 제자들을 이끌고 머물게 되자 여러 사람이 끊임없이 모여들었다. 헌강왕은 조서를 보내 승려를 궁궐로 초빙하고 흥녕선원을 중사성(中使省)에 속하게 하였다. 징효는 다음 왕인 정강왕의 존경을 받았으나 나라가 혼란해지자 891년 상주로 피신하던 중 조령에 도착하였을 때 흥녕선원이 모두 소실되었다. 이후 비문에서는 징효대사가 스승인 도윤화상이 머물다가 입적한 화순 쌍봉사를 향하여 가는 과정을 기록하였다.

징효대사는 충청남도 공주, 전라북도 금산을 거치는 과정에서 왕은 징효를 무량사(無量寺)와 영신사(靈神寺)에 주석하게 하거나 무주현 군리 김사윤(金思尹)이 전남 낙안에 머물도록 요청하기도 하였다. 징효는 낙안의 동림사를 평생 거처로 삼았으나 재해와 도적의 피해를 염려하여 북산을 향하여 떠나고 또 서해에서 풍랑을 만나 표류하다가 당나라로 가려던 유학을 포기하고 경기도 남양 인근의 강화에 도착하였다. 마침내 대사는 은강선원(銀江禪院)에 이르러 십여 일을 머물렀는데 진성여왕이 장연설(張連說)에게 차와 향을 보내서 국사(國師)의 예를 표하였다. 그러나 사양하고 900년 3월 9일 입적하였다. 다비로 장례를 치르자 사리 1100여 과를 얻어 이를 907년에 동림사로 옮겨 봉안하였다. 924년 왕명으로 비문이 지어졌고 944년 비석이 만들어져 흥녕선원에 부도와 부도비가 건립되었다. 건립에 참여한 사람들은 태조 왕건 이후에 정종과 광종으로 왕위에 등극하는 왕요군(王堯君)과 왕소군(王昭君), 왕규 등 왕족과 중앙 귀족, 강릉·죽산·제천·영월 등지에서 광범위하게 활약하는 호족 세력들이 있다. 이러한 비문의 내용으로 미루어 신라 말기와 고려 초기의 선종계 불교 활동상과 사회상을 함께 살필 수 있으며 사자산문의 동향을 파악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비문이다.

[의의와 평가]

영월 흥녕사지 징효대사탑비는 사자산문의 개산조 징효대사의 생애를 기록하면서도 당시 정치와 불교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가치를 지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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