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500804
한자 姜佑根
영어공식명칭 Kang Ugeun
분야 역사/근현대,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북도 영덕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한준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80년연표보기 - 강우근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월 18일 - 강우근 영덕읍 3.1독립운동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27년 - 강우근 신간회 영덕지회 부회장
몰년 시기/일시 1957년연표보기 - 강우근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83년연표보기 - 강우근 대통령 표창 추서
추모 시기/일시 1990년연표보기 - 강우근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관련 사건 시기/일시 1919년 3월 18일 - 영덕읍 3.1독립운동
출생지 경상북도 영덕군 영덕읍 화개리 지도보기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 대전광역시 유성구 현충원로 251[갑동 산23-1]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대표 경력 신간회 영덕지회 부회장

[정의]

일제강점기 경상북도 영덕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강우근(姜佑根)[1880~1957]은 경상북도 영덕군 영덕읍 화개리에서 태어났으며, 1919년 영덕군 강구면 금호리에 거주하였다.

[활동 사항]

강우근은 1919년 당시 영덕군 영덕면에서 기독교 조사(助事)로 활동하고 있었다. 영덕읍 만세운동은 3월 12일 김세영(金世榮)이 김혁동(金爀東)을 강우근에게 보내 만세운동을 부탁하면서 시작되었다. 이에 강우근권태원(權泰源)과 협의하여 3월 18일 영덕읍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정하였다. 강우근은 3월 10일 『매일신보』를 통해 전국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난 것을 알게 되었고, 영덕읍 내 교회의 신자들을 중심으로 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그리하여 강우근은 3월 16일부터 3월 18일까지 김암우(金岩佑)·이정규(李正奎)·강대열(姜大烈)·김귀근(金貴根) 등에게 만세운동 참여를 권유하였다. 한편, 3월 16일 경상북도 영양군의 이승구(李承玖)는 박윤규(朴潤奎)로부터 소식을 듣고 3월 18일 만세운동을 일으키자고 결의하였다.

3월 18일 강우근강대열·이승구 등과 함께 영덕읍의 기독교 신자 50여 명을 이끌고 남석동 시장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오후 2시경 이들은 100여 명의 군중과 함께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하지만 일제 경찰이 출동해 군중을 제지하면서 강우근을 포함한 주도 인사 20여 명이 붙잡혔고, 군중은 해산하였다. 이후 영덕공립보통학교 학생과 졸업생 등이 영덕경찰서에 구금되어 있는 주도 인사들을 구출하려고 하였으나, 일제의 경계 활동 강화로 실패하였다. 강우근은 일제에 붙잡힌 후 1919년 5월 2일 대구지방법원 영덕지청에서 징역 2년형을 받았으나 공소하여 1919년 5월 22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형으로 변경되었고, 6월 26일 고등법원에서 형량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후 강우근은 1927년 신간회 영덕지회 부회장을 지냈고, 해방 후에는 독립촉성국민회 영덕지부에서 활약하였다. 독립촉성국민회 활동 외에도 영덕 지역에서 기독교 목사로서 다양한 활동을 하였다.

[묘소]

강우근의 묘는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제2묘역에 있다.

[상훈과 추모]

1983년 대통령 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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