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500367
한자 新幹會盈德支會
영어공식명칭 Shinganhoe Yeongdeok Branch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경상북도 영덕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허종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설립 시기/일시 1927년 7월 26일연표보기 - 신간회 영덕지회 설립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29년 8월 2일 - 신간회 영덕지회, 신간회 영해지회로 통합
성격 독립운동단체

[정의]

일제 강점기 경상북도 영덕 지역에 있었던 신간회 소속 지회.

[개설]

신간회(新幹會)는 민족주의 좌파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이 연합하여 결성한 민족협동전선 조직이다. 신간회 산하 영덕지부는 1927년 설립되었다.

[설립 목적]

신간회 영덕지회(新幹會盈德支會)는 경상북도 영덕 지역 사람의 정치적, 경제적 각성 촉진과 공고한 단결, 기회주의의 일체 부인 등이다.

[변천]

1927년 7월 26일 영덕청년회관에서 이기석(李基錫)·주병호(朱秉豪) 등이 주도하여 ‘신간회 영덕지회발기대회’를 가지고 지회 설립에 나섰다. 이기석·주병호·이상욱(李尙郁)·강충근(姜忠根)·강대지(姜大智)·정예술(鄭禮述)·김형두(金衡斗) 등이 준비위원으로 영덕 지역의 각 면을 순회하면서 신간회를 선전하고 홍보하며 발기인을 모집하였다. 1927년 해 9월 12일에 설립 대회를 가지고 출범했으며, 설립 대회를 마친 후 참석한 사람들은 신간회 깃발을 앞세우고 영덕 시내에서 가두 행진을 벌였다.

창립 당시 간부는 지회장 정예술, 부회장 강우근(姜佑根)을 포함하여 서무총간사 이기석, 서무간사 김형두, 재정부 총간사 이상욱, 간사 이진경(李震璟), 강충근, 정치문화부 총간사 유웅경, 간사 현창범, 이태범, 조사연구부 주병호, 간사 강대지, 조직선전부 총간사 강호근, 간사 박일영(朴一英)·김학순·김부일(金富逸), 보통간사 한규열(韓圭烈)·노계식(盧啓植)·남병채(南炳埰)·윤태석(尹泰奭)·이성우(李成佑) 등 이었다. 1928년 1월에 정예술·이상욱·이기석이 신간회 본부 대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되었으며, 유웅경과 주병호가 대의원 후보로 선출되었다.

1929년 8월 2일 신간회 영해지회와 통합하고, 기존의 회장제 중심의 운영 체제를 집행위원회 체제로 전환하였다. 통합 당시 간부는 집행위원장 주병호, 서기장 유웅경, 서무부 위원 김우근, 조직부 위원 이성교, 조사부 위원 허영훈(許英勳), 교양부 위원 이한교, 재정부 위원 임광웅, 선전부 위원 박상갑(朴相甲)이었다. 영덕지회 회원은 210여 명이었다. 신간회 중앙본부가 1931년 5월에 신간회 해소를 결정한 사실을 볼 때 신간회 중앙본부가 해소를 결정한 때에 해소된 것으로 보인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신간회 영덕지회는 영남친목회(嶺南親睦會), 호남동우회(湖南同友會), 오성구락부(五星俱樂部) 세 단체를 친일 단체이자 ‘반동분자’들의 단체로 규정하고 규탄하는 활동을 하였다. 1926년 강구항의 축성으로 발생한 지역민의 폐해와 불만을 조사하는 등 지역 현안 해결을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7년 10월에는 일제가 조선공산당과 6.10만세운동 관련자의 재판을 비공개로 진행하는 것을 규탄하고, 관련자의 변호를 맡은 변호사들에게 격려문을 발송하는 활동을 벌였다.

1928년 1월 28일 제2회 정기대회에서 조선인 본위의 산업 정책 확립, 노동자·농민 본위의 금융기관 설치, 동양척식주식회사 및 유사 회사의 철폐와 이민 정책의 반대, 조선인 본위의 교육제 실시, 일반 교육상 조선어 사용 실시, 민간 교육기관의 허가제 폐지,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를 구속하는 특수법령 반대 등을 주장하며 일제 식민지 지배 정책을 반대하였다. 또한 8시간 노동제의 확립, 최저임금제의 확립, 소작권 확립, 마름(舍音)·농감제(農監制) 철폐, 최고 소작료 5할제 확립, 불가항력에 의한 농작 손해의 지주 부담 등 노동자·농민의 생존권과 기본권 보장을 주장하였다. 동시에 봉건적 분한(分限)의 잔존 관습 철폐, 여자의 공법·사법상 차별 철폐, 인신매매 금지 등 봉건 잔재와 잘못된 사회 관습의 철폐를 주장하였다. 봉건 잔재와 잘못된 사회 관습 철폐를 주장한 것은 농민·노동·청년·여성운동 등 각 부문 운동이 민족 통일을 목표로 하고, 정치적·경제적 각성을 촉진하는 동시에 각 부문 운동을 적극적으로 원조하기 위한 정책이었다. 1930년에는 수재민 구제 사업을 펼쳤다.

[의의와 평가]

신간회 영덕지회는 민족주의 좌파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이 연합하여 처음으로 이루어진 반일민족통일전선 운동이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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