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2년 지방지도』 「영덕현·영해부 지도」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500532
한자 一千八百七十二年地方地圖盈德縣寧海府地圖
영어공식명칭 『In 1872, Region Map』 「Yeongdeok-hyun·Yeonghae-bu Map」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유물/서화류
지역 경상북도 영덕군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감병훈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제작 시기/일시 1872년연표보기 - 『1872년 지방지도』 「영덕현·영해읍」 지도 제작
특기 사항 시기/일시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청구기호 - 기타99999
현 소장처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 서울특별시 관악구 관악로 1[신림동 산56-1]
성격 고지도
소유자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관리자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정의]

1872년(고종 9)에 간행한 『1872년 지방지도』에 수록된 영덕현·영해부의 지도.

[개설]

『1872년 지방지도』는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집정(執政)하던 1872년(고종 9) 3월부터 6월까지 제작된 지도이다. 전국의 각 군현에서 해당지도를 그린 다음 중앙정부에 올리고, 조정에서는 모인 지도를 취합하여 엮은 후 전국 단위의 군현 지도로 간행한 것이다.

[형태 및 구성]

『1872년 지방지도』는 총 459매의 지도로 구성된 채색의 회화식(繪畫式) 지도이다. 지도에는 각각의 군현 지도가 그려져 있으나 규격은 일정하지 않다. 조선시대의 영덕 지역은 영덕과 영해로 분리되어 있기에 해당 지도책에서도 영덕현과 영해읍의 지도로 제작되었다.

「영덕현 지도」에서 면리(面里)는 모두 생략되어 있는 반면에 동리(洞里)였던 하오리(下烏里)·임리(林里)·둔리(屯里)·창포상리(菖浦上里)·창포하리(菖浦下里)·신리(新里)·의동(義洞)·장전동(長田洞)·용수동(龍水洞)·관동(館洞) 등은 표기되어 있다. 산맥은 일반적인 산 모양의 회화로 묘사했으며 읍치를 중심으로 남쪽에는 문어산(文魚山) 등이 배치되어 있다. 북쪽 방면은 화림산(華林山)과 내류산(內柳山) 등이 있고 임울령(林鬱嶺)과 면현(眠峴)은 각각 진보현(眞寶縣) 및 영해와 경계를 접하고 있다. 동쪽에는 고불봉(高佛峯)과 매령(梅嶺)이 있고, 서쪽 방면은 적벽봉(赤壁峯)과 주산(走山)이 자리 잡고 있다. 하천은 흑색 실선으로 그려졌는데 특히 오십천(五十川)은 읍성을 지나 바다로 흘러가는 지점을 굵은 선으로 강조하였다.

「영해읍 지도」에서 방리(坊里)는 남면(南面)·북면(北面)·서면(西面)·석보면(石保面)이 확인된다. 영해읍의 산세(山勢)는 산수화(山水畵)로 그리면서 맥세(脈勢)를 강조했기에 한 폭의 그림과 같이 묘사하였다. 산의 명칭은 등운산(騰雲山)과 오항산(烏項山) 등이 표기된 반면에 나머지는 대부분 생략되었다. 각 산에서 발원한 하천은 청색 바탕의 선으로 된 물줄기로 표현하여 바다로 흘러가고 있으나 명칭은 누락되었다. 도로는 황색 실선으로 표현되어 읍치를 중심으로 사방으로 뻗어 나가며 인접하고 있는 영덕현과 진보현과의 거리도 기록하였다.

[특징]

「영덕현 지도」의 지도 상단인 북쪽은 오른편에 자리하고 있기에 상하의 좌우가 반전(反轉)되게 그려졌다. 읍성(邑城)은 성첩(城堞)을 가진 성곽 모양으로 묘사했는데 성 안에 객사(客舍)와 동헌(東軒) 및 육방(六房)의 건물과 군기창(軍器倉)·군관청(軍官廳)·사창(司倉)·내삼문(內三門) 등의 건물이 회화로 조밀하게 배치되어 있다. 성문이었던 남문과 동문에는 문을 방어하기 위한 시설인 옹성(甕城)이 표현된 반면에, 서문은 후락당(後樂堂)인 문루만 그려져 있다. 향교 및 강무당(講武堂)·동사창(東社倉)·중남면사창(中南面社倉) 등은 한옥 모양의 그림으로 표현되었다. 역으로는 주등역(酒登驛)과 남역(南驛) 등이 배치되어 있으며, 봉대(烽臺)와 옥천사(玉泉寺)의 탑이 각각의 기호로 들어가 있다. 해안선은 생략되어 바다와 구별되지 않고 단지 해(海)라고만 표기하였다.

「영해읍 지도」의 상단은 서면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상하의 좌우가 반전되어 있다. 읍치는 성첩이 둘러친 성곽 모양으로 묘사하였다. 성 안으로는 객사와 동헌 및 각종 관아 건물의 명칭이 생략된 채 팔작지붕의 기호로 촘촘하게 배치되었다. 성문은 지도에서 생략되었으나 도로가 세 군데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삼문(三門)이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향교와 사찰은 누정의 형태를 한 그림으로 표현되었으며, 특히 사찰 기호 밑에는 읍치와의 거리가 기록되어 있다. 대소산봉수(大所山烽燧)와 축산포(丑山浦)의 관방처는 글자로만 표기했으며, 축산포 바로 아래에 포구의 유래를 담은 글귀를 부기(付記)하였다. 역원인 영양역(寧陽驛)과 병곡역(柄谷驛)과 형승인 보기암(洑基巖)과 관어대(觀魚臺)는 글자로만 지도에 표기되었다. 이에 반해 창고였던 북사창(北社倉)과 사창(社倉), 서사창(西社倉)은 팔작지붕 회화로 지도에 묘사되었다.

[의의와 평가]

『1872년 지방지도』 「영덕현·영해부 지도」는 19세기 말 영덕 지역의 행정·경제·군사 분야의 정보가 실려 있기 때문에 당시 영덕 지역의 상황을 확인할 수 있는 사료로서 가치가 높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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