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병 운동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400320
한자 義兵運動(星州)
영어공식명칭 Righteous Army Movement
이칭/별칭 의병운동,의병전쟁,의병투쟁,구국 무력투쟁,무력 구국운동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북도 성주군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권대웅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896년연표보기 - 의병 운동 발생, 이승희 등 성주 유림의 창의 모색
종결 시기/일시 1896년연표보기 - 의병 운동 종결, 곽종석의 창의 반대로 무산
발단 시기/일시 1895년 - 을미사변
발생|시작 장소 의병 운동 - 경상북도 성주
종결 장소 의병 운동 - 경상북도 성주
성격 사건
관련 인물/단체 이승희|곽종석

[정의]

개항기 성주 지역의 의병 전쟁.

[개설]

의병 운동은 일제의 침략에 맞서 자발적으로 조직하여 일어난 민병이 수행한 전쟁으로, 1894년부터 1910년대 중반기까지 전개되었다. 대략 20년 이상 불굴의 항전을 이어갔지만, 경상북도 성주 지역에서는 창의가 무산되었을 정도로 의병 운동에 대해 소극적이었다.

[역사적 배경]

1894년 동학 농민 혁명을 빌미로 침입해 경복궁을 점령한 일제에 맞서 경상북도 안동과 평안남도 상원에서 의병이 일어나 의병 운동을 시작하였다. 이어 1895년 일제가 명성 황후를 시해한 을미사변을 계기로 의병 운동은 전국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경상북도 성주에서는 종조할아버지 응와(凝窩) 이원조(李源祚)와 아버지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으로 이어지는 가학을 계승한 한계(韓溪) 이승희(李承熙)가 위정척사적인 내수외양(內守外攘)의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다.

[경과]

이승희는 1895년 을미사변으로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나자 동문들과 창의를 모색했다가, 곽종석(郭鍾錫)의 반대로 무산된 뒤 외교적인 방안을 통한 국권 회복을 모색하였다. 곽종석은 1895년 을미 의병 때 안동 의진(安東義陣)의 창의장 권세연(權世淵)의 아장(亞將)으로 추대되었으나, ‘불가경기(不可輕起)’라 하며 참여하지 않았다. 안동 의진이 의병장 김도화(金道和) 체제로 재편성된 뒤에도 아장으로 임명되었으나 응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유인석(柳麟錫)의 제천 의진(堤川義陣)을 돌아보고, 명령이 엄숙하고 민간에 폐를 끼치지 않는 규율을 지적하면서도, 의병의 “군졸들이 모두 농사짓는 오합지졸(烏合之卒)로 훈련을 하나도 받지 않아서 대사(大事)를 이룰 수 없을 것”이라고 단정하기도 하였다.

곽종석은 1896년 이승희를 비롯한 성주 유림들이 거의하려 했으나 ‘무가위지(無可爲之)’라는 이유로 반대하였다. 1906년 최익현(崔益鉉)이 창의를 제의했을 때에도 “우리나라의 모든 힘을 들어 국외의 적과 싸우더라도 이것은 달걀로 바위를 치는 것과 같다.”하며 거절하였다. 곽종석의 반대 이유는 일제에게 침략의 빌미를 줄 수 있다는 점, 국왕의 뜻을 왜곡하는 무리들에 의해 역적으로 몰릴 수 있다는 점, 의병을 빙자하여 반역을 꾀하는 무리들이 있을 수 있다는 점, 의병의 비용을 대기 위해 향촌이 피폐해질 수 있다는 점 등이었다.

[결과]

1895년 을미의병기에 이승희를 비롯한 한주학파의 성주 유생들도 창의를 모색했으나 곽종석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이로 인해 1866년 병인양요에 대응하여 성주 유생들이 조직한 의병, 1881년 성주 유생들의 영남 만인소 참여, 1894년 동학 농민 혁명에 대응한 성주 유생들의 민보군 조직 등으로 이어진 성주 지역 위정척사 운동의 역사적 전통이 큰 타격을 받았다.

[의의와 평가]

개항기 성주 지역의 위정척사 운동의 전통은 1895년 을미의병기 창의가 무산된 뒤, 만국공법(萬國公法)에 기대하는 외교 독립론으로 그 대안을 모색하였다. 따라서 대한 제국기 한계 이승희,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1879~1962] 등은 상소 운동이나 국제적 여론에 호소하는 포고문을 통해 국권 회복을 위한 구국 운동을 전개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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