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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산기」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401313
한자 伽倻山記
영어공식명칭 Book of Gayasan Mountain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유형 작품/문학 작품
지역 경상북도 성주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종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저자 생년 시기/일시 1595년 - 허목 출생
저자 몰년 시기/일시 1682년 - 허목 사망
배경 지역 가야산 - 경상북도 성주군 지도보기
성격 유산기(遊山記)
작가 허목

[정의]

조선 후기 허목이 성주 지역의 가야산을 유람하고 남긴 기록.

[개설]

미수(眉叟) 허목(許穆)[1595~1682]은 근기 남인(近畿南人) 실학의 연원자이다. 허목은 스승 한강(寒岡) 정구(鄭逑)[1543~1620]를 통해 실용학풍을 구축하게 된다. 이를 바탕으로 성호(星湖) 이익(李瀷)[1681~1763], 순암(順菴) 안정복[1712~1791], 황덕길(黃德吉), 허전(許傳) 등에게 이어져 근기 실학을 성립시킨다. 허목은 『한강집(寒岡集)』 서문과 「광명(壙銘)」 등을 지었고, 스승인 정구를 기리기 위하여 회연서원을 중심으로 ‘봉비암’, ‘망운암’, ‘옥설헌’ 등 다양한 글씨를 썼다.

[구성]

「가야산기(伽倻山記)」는 한문 산문으로 기술된 한 단락 정도의 사실적인 기록이지만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허목은 덕유산(德裕山), 수도산(修道山), 무흘산(武屹山), 가야산(伽倻山)을 전체적으로 조망한다. 정구,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 최치원(崔致遠)[857~?]의 유적에 관심을 가지며 유람을 하고 기록으로 남긴다.

[내용]

덕유산, 수도산, 무흘산을 지나 해인사(海印寺), 가야산을 언급한다. 서두에서 스승인 정구에 관해 기술하고 팔만대장경, 최치원 등에도 관심을 가지며 최치원과 관련된 유적을 자세히 기술한다. 남산의 바위 절벽, 천석 사이의 홍류동(紅流洞), 취적봉(吹笛峰), 광풍뢰(光風瀨), 음풍대(吟風臺), 완재암(完在庵), 분옥폭(噴玉瀑), 낙화담(落花潭), 첩석대(疊石臺), 회선암(會仙巖) 등을 자세하게 서술한다. 나아가 무릉교(武陵橋)와 칠성대(七星臺)를 기록하며 최치원의 큰 글씨를 돌에 새긴 것을 기록한다.

[특징]

허목은 정구의 문집 『한강집』의 서문을 적으며 스승의 사상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후 회연서원과 관련된 사업에 적극 참여하여 스승을 기렸다. 『한강집』 서문에서도 밝혔듯이, 스승인 정구의 무흘장서(武屹藏書)를 기념하고 있다. 또 학사 최치원과 그 유적에 관심을 가지며 최치원을 유학자로 인식하고 가야산 일대에 은거하며 남긴 자취를 기록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허목은 가야산을 스승인 정구의 소요처로 인식하고 있다. 즉 덕유산, 수도산, 무흘산, 가야산정구의 유적지인 셈이다. 일반적으로 유학자는 최치원을 우위에 두지만, 허목은 스승인 정구와 그 유적을 높이 칭송하고 있다. 이는 후대에 정구무흘정사를 유람 및 탐방하는 기반이 된다. 비록 「가야산기」의 분량은 적지만 후대에 미치는 파급 효과는 크다. 정구 생존 시 성주에서 영남학파의 양대 산맥인 퇴계학파(退溪學派)와 남명학파(南冥學派)를 통합하여 영남학파의 중심을 이루었고, 그 학통이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1554~1637]과 허목을 중심으로 이어졌다. 장현광은 성주, 인동에서 경주권으로 확대하고 있었고, 허목은 서울 근교를 기반으로 하는 근기학파를 확립시켜 나갔다. 그러므로 짧은 기록이지만 허목의 글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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