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종 복위 운동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200392
한자 端宗 復位運動
이칭/별칭 사육신 사건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서울특별시 동작구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차인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단 시기/일시 1453년(단종 1) - 계유정난(癸酉靖難) 발생
전개 시기/일시 1455년(단종 3) - 세조(世祖)즉위
발생|시작 시기/일시 1456년(세조 2) 6월연표보기 - 1차 복위운동(사육신 사건) 발생
종결 시기/일시 1456년(세조 2) 9월연표보기 - 2차 복위운동(금성대군 사건) 발생
관련 인물/단체 박팽년(朴彭年)|성삼문(成三問)|이개(李塏)|유응부(兪應孚)|유성원(柳誠源)|하위지(河緯地)|수양대군(首陽大君)|김문기(金文起)

[정의]

조선 전기 세조에게 강제 양위한 단종을 복위시키려 사육신이 도모한 사건.

[개설]

단종 복위운동은 1455년 윤6월 숙부 수양대군(首陽大君)[세조]에게 강제 양위했던 단종을 복위시키고자 한 모의와 일련의 행동을 말한다.

[역사적 배경]

1452년 5월 세종(世宗)의 장자 문종(文宗)이 재위한지 불과 2년 만에 병사하자 문종의 12세 아들 단종[1441-1457]이 즉위하였다. 왕이 어린 나이에 즉위하면 수렴청정(垂簾聽政) 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단종에게는 모후(母后) 조차 없었기에 김종서(金宗瑞) 일파가 실상 전권을 가지고 정국을 운영하고 있었다.

이러던 차에 1453년 10월 10일, 세종의 둘째 아들 수양대군이 김종서와 대신들을 제거한 이른바 ‘계유정난(癸酉靖難)’이 발생한다. 이후 수양대군은 동생 안평대군(安平大君)을 강화도에 안치했다가 사사(賜死)하는 등 반대파를 숙청하여 정권을 장악한 후, 2년 뒤인 1455년 윤6월 강제로 조카 단종의 선위(禪位)를 받아 즉위하였다. 단종은 상왕(上王)이 되어 거처를 수강궁(壽康宮)으로 옮겼는데, 이는 사실상 유폐와 다름없었다.

[경과]

1456년 6월, 과거 집현전 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세조를 제거하고 단종을 복위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이들은 명(明) 사신의 창덕궁 연회를 기회로 세조 시해를 모의하였으나 동모자의 배신으로 사전에 적발되면서 실패하였고, 성승, 유응부를 비롯한 많은 인사들이 연루되어 처형당하게 되었다. ‘1차 단종 복위운동’이자 소위 ‘사육신 사건’이다.

[결과]

사건 이후 단종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된 후 1457년 6월 강원도 영월에 유폐되었다. 같은 해 9월 세종의 여섯째 아들 금성대군(錦城大君)이 유배지인 경상도 순흥에서 영남 유생들을 규합하여 세조 타도와 단종 복위를 위해 의병을 모의하는 과정에서 적발되어 사사되었다. ‘2차 단종 복위 운동’의 실패로 노산군은 폐서인되었고, 10월 사망하였다.

단종 복위 운동에 연루된 인물은 기록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1791년(정조 15) 장릉(莊陵)[단종의 능] 배식단(配食壇) 배향기에는 성삼문 등 주요 인물 32인과 연좌되어 죽은 190명의 명단이 기재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현재 서울특별시 동작구 노량진동에는 사육신의 무덤이 사육신공원으로 조성 관리되고 있다. 언제 어떤 연유로 노량진에 무덤이 조영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노량진이 사육신의 거열형 집행 후 효시 장소라는 풍문이 있으며, 태학사 조관빈(趙觀彬)[1691~1757]이 비명을 찬술하여 1782년(정조 6)에 건립한 사육신 신도비에서 박팽년(朴彭年), 성삼문(成三問), 이개(李塏), 하위지(河緯地), 유성원(柳誠源), 유응부(兪應孚) 등 육신의 시신을 무명의 스님 혹은 김시습(金時習)이 수습하여 노량진 언덕에 묻었다고 하여 약간의 단서를 제공한다.

숙종(肅宗) 대에 사육신이 관직 복권되면서, 1681년(숙종7) 이들의 묘소로 알려진 노량진 언덕에 사육신 배향 사당이 건립되었다. 1691년(숙종17) 12월에는 ‘민절사(愍節祠)’로 사액되었다가, 이듬해 1월 ‘민절서원(愍節書院)’으로 고쳤고 신도비가 세워졌다. 민절사는 현재의 사육신공원 내에 위치하였으나 터만 남아있다. 사육신공원에는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 유응부 6인 외에도 김문기(金文起)의 가묘가 추가되었으며, 원래 성삼문의 부친인 성승(成勝)의 무덤이 있었다고 전한다. 김문기는 당시 도진무(都鎭撫)직에 있었는데, 거사 후 군(軍)을 동원하려던 인물이다. 1977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사육신으로 판정하기로 결정한 것인데, 다만 사육신의 명단이 교체되지는 않았다.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24.01.12 내용 변경 [의의와 평가] 남효온(南孝溫)[1454-1492]의 『추강집(秋江集)』「육신전(六臣傳)」에서 박팽년(朴彭年), 성삼문(成三問), 이개(李塏), 하위지(河緯地), 유성원(柳誠源), 유응부(兪應孚) 등 육신의 시신을 무명의 스님 혹은 김시습(金時習)이 수습하여 노량진 언덕에 가묘로 조성했다고 하여 약간의 단서를 제공한다. → 태학사 조관빈(趙觀彬)[1691~1757]이 비명을 찬술하여 1782년(정조 6)에 건립한 사육신 신도비에서 박팽년(朴彭年), 성삼문(成三問), 이개(李塏), 하위지(河緯地), 유성원(柳誠源), 유응부(兪應孚) 등 육신의 시신을 무명의 스님 혹은 김시습(金時習)이 수습하여 노량진 언덕에 묻었다고 하여 약간의 단서를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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