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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200644
한자 白龍城
영어공식명칭 Baek Yong-seong
이칭/별칭 백상규(白相奎),백형철(白亨喆),진종(震鍾)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서울특별시 동작구
시대 근대/근대
집필자 조은경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64년 5월 8일연표보기 - 백용성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2년 5월 - 백용성 조선임제종중앙포교당 개설
활동 시기/일시 1915년 - 백용성 임제파강구소 개설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월 1일 - 백용성 민족대표 33인에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21년 - 백용성 출옥
활동 시기/일시 1927년 - 백용성 대각교 창건
몰년 시기/일시 1940년 2월 23일[음]연표보기 - 백용성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62년연표보기 - 백용성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추모 시기/일시 1990년연표보기 - 백용성 은관문화훈장 추서
출생지 백용성 출생지 - 전라북도 장수군 번암면 죽림리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 서울특별시 동작구 현충로 210 지도보기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대표 경력 민족대표 33인

[정의]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에 위패가 봉안된 독립운동가.

[개설]

백용성(白龍城)[1864~1940]은 조선 임제종 중앙포교당 설립, 대각교 창건, 경전번역사업 등 불교개혁운동을 전개했으며, 1919년 민족대표 33인으로 3·1운동에 참여한 독립운동가이다.

[가계]

백용성의 족보상 이름은 형철(亨喆), 속명은 상규(相奎), 법명은 진종(震鍾), 법호는 용성(龍城)이다. 아버지 백남현(白南賢)과 어머니 밀양 손씨 사이의 5남매 중 장남이다. 본관은 수원(水原)이다.

[활동 사항]

백용성은 1864년 5월 8일 전라북도 장수군 번암면 죽림리에서 태어났다. 14세에 남원 교룡산성(蛟龍山城)의 덕밀암(德密庵)으로 출가했고 16세에 합천 해인사 극락암으로 재출가했다. 파주 보광사(普光寺)에서 수행하다가 통도사에서 비구계와 보살계를 받았다. 1911년 47세 때 서울로 올라와 일본불교의 영향에 맞서 한국불교의 자주성을 지키고자 1912년 5월 조선임제종중앙포교당(朝鮮臨濟宗中央布敎堂)을 개설하고 사찰령 등 식민지 불교체제에 맞서 민족불교 활동을 전개했다. 1915년부터는 별도로 임제파강구소(臨濟派講究所), 대각사(大覺寺)를 개설하여 포교, 강연 등 활동을 이어나갔다.

1919년 독립선언 준비에 참여했던 한용운으로부터 민족대표 참가 제의를 받아 승낙하고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 날인했다. 3월 1일 오후 2시경 인사동(仁寺洞) 소재 태화관에 모인 민족대표 29명 중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식을 마친 후 일본 경찰에 의하여 경무총감부(警務總監部)에 구금되었다.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 정동분실(貞洞分室)에서 이른바 ‘보안법 제7조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미결구류일수 360일 본형산입]을 선고받았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 1921년 봄 만기 출옥했다.

출옥 후 불교 대중화를 위해 『화엄경(華嚴經)』, 『금강경(金剛經)』 등 불경 20여 종을 한글로 번역 출간했다. 『심조만유론(心造萬有論)』 등 불교사상을 쉬운 우리말로 정리한 사상서 10여 종도 발간했다. 불교개혁운동에 앞장서 대처승(帶妻僧)의 법통 계승을 인정하는 일제의 종교정책에 반대했고 1927년 들어 대각교(大覺敎)를 창건하고 한글과 수행 위주, 선농불교(禪農佛敎) 실천 등 불교개혁과 민족불교 고수에 힘썼다. 대각교가 일제의 외압에 자진 해산하면서 1938년 후신인 조선불교선종 총림으로 이어진 가운데 1940년 2월 23일[음력] 법랍(法臘) 61세로 사망했다.

[저술 및 작품]

백용성 대종사 총서 간행위원회에서 2016년에 펴낸 『백용성 대종사 총서』20권이 있다.

[묘소]

사리탑이 해인사 용탑선원 옆에 있다. 국립서울현충원 위패봉안관에 위패가 봉안되었다.

[상훈과 추모]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았고, 1990년 은관문화훈장을 추서받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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