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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200592
한자 朴彭年
이칭/별칭 인수(仁叟),취금헌(醉琴軒),충정(忠正)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서울특별시 동작구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이선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417년연표보기 - 박팽년 출생
활동 시기/일시 1434년 - 박팽년 알성 문과 급제
활동 시기/일시 1438년 - 박팽년 사가독서 선발
활동 시기/일시 1453년 - 박팽년 우승지 제수
몰년 시기/일시 1456년연표보기 - 박팽년 사망
묘소|단소 사육신 묘소 - 서울특별시 동작구 노량진로 191 지도보기
사당|배향지 민절서원 터 - 서울특별시 동작구 노량진동 일대지도보기
성격 문신
성별
본관 순천
대표 관직 충청도관찰사

[정의]

서울특별시 동작구 노량진동에 묘가 있는 조선 전기 문신.

[가계]

박팽년(朴彭年)[1417~1456]의 본관은 순천(順天)이다. 자는 인수(仁叟), 호는 취금헌(醉琴軒)이다. 회덕(懷德) 출신으로, 증조할아버지는 박원상(朴元象)이고, 할아버지는 박안생(朴安生)이다. 아버지는 박중림(朴仲林)이고, 어머니는 김익생(金益生)의 딸이다.

[활동 사항]

1432년(세종 14) 식년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고, 1434년(세종 16) 알성 문과(謁聖文科)에 을과 2등으로 급제하였다. 1438년 삼각산 진관사(津寬寺)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사가독서는 젊고 유능한 관료에게 학문에만 전념할 수 있는 기간을 주는 제도이다. 1447년(세종 29)에 문과 중시에도 을과 2등으로 급제하였다. 1453년(단종 1)에 우승지에 임명되었고 다음해에 형조참판이 되었다.

1455년(세조1)에 세조단종의 왕위를 빼앗아 즉위하자 울분을 참지 못하고 경복궁 경회루 연못에 빠져 자살하려 하였다. 당시 성삼문이 만류하며 살아서 단종 복위를 위해 함께 할 것을 다짐하였다. 다음해에 형조참판에 임명된 후, 성삼문·하위지·이개·유성원·유응부·김질 등과 뜻을 같이 하여 단종 복위운동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함께 거사를 모의하던 김질이 장인 정창손과 함께 세조에게 알려 발각되었다. 박팽년성삼문 등이 잡혀가자 스스로 시인하는데 세조박팽년을 아껴서 회유하려 하였다. 하지만 이를 거부하고 세조의 신하가 아니라 오직 단종의 신하라고 단언하였다. 실제로 충청도관찰사로 있을 때 세조에게 올린 장계에서 ‘신’자를 쓴 일이 없었다. 결국 갖은 고문 끝에 옥사하였고, 이후 시신은 거열형(車裂刑)에 처해졌다.

[학문과 저술]

세종신숙주·최항·유성원·이개·하위지 등 당시 유능하고 젊은 학자들과 집현전에서 활동하였다. 당대 문장과 필법이 뛰어나 ‘집대성(集大成)’이라 불렸고, 필법이 뛰어나 왕희지에 버금간다는 평을 받았다.

이듬해 내직인 형조참판으로 다시 들어온 뒤 삼대가 모두 죽임을 당하는 멸문의 화를 당하여 박팽년의 행장이나 문집(文集) 등이 현재 전하지 못한다. 단종복위운동에 대해 남효온(南孝溫)이 정리한 『추강집(秋江集)』의 「사육신전(死六臣傳)」과 그 외 관련 기록에 행적이 담겨 있다.

[묘소]

박팽년의 묘소는 서울특별시 동작구 노량진동 사육신 묘역에 있다.

[상훈과 추모]

사육신을 제향하기 위한 사당은 1681년(숙종 7)에 한양과 지방의 사림이 연합하여 세웠다. 1691년(숙종 17) 9월에 숙종이 장릉(章陵)으로 거둥하다가 노량진에 들러 사육신묘 등에 치제하였다. 같은 해 12월에 사육신 제향 사당을 ‘민절사’라고 사액하고 사육신 모두 복권되었다. 민절서원으로 고쳐진 것은 1692년(숙종 18)이다. 1758년(영조 34)에는 자헌대부(資憲大夫)의 품계를 받고 이조판서에 증직되었다. 1791년(정조 15)에 단종에 대한 충신들의 어정배식록(御定配食錄)에 이름이 올랐고 장릉배식단(莊陵配食壇)에 배향되었다.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24.01.05 내용 변경 [활동사항] 사망관련 사실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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