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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1953
한자 西區- 文化遺産
영어공식명칭 Cultural Heritages in Seo-gu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대구광역시 서구
시대 선사/청동기,선사/철기,고대/고대,고려/고려,조선/조선,근대/근대
집필자 배성혁

[정의]

대구광역시 서구의 선사시대부터 근대까지 주요한 문화유산.

[개설]

서구에는 국가지정문화재는 없지만 국보인 비산동 청동기 일괄품이 서구에서 출토되었으며, 대구광역시 지정 무형문화재가 3건이 있다. 비지정 문화재는 대부분 10여 건의 발굴 조사와 지표조사를 통하여 확인된 유적들로 초기철기시대 한국식 청동기가 다량 출토된 비산동평리동의 청동기 유적, 삼국시대 달성 고분군, 조선시대 대구부 사직단이 서구를 대표하는 중요 유적이다.

한편, 2021년 6월 29일 「문화재보호법시행령」 개정에 따라 지정 번호가 삭제되었다.

[국가지정문화재]

대구 비산동 청동기 일괄[국보 제137호, 1971. 12. 21. 지정,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1956년 서구 비산동 와룡산 자락에서 우연히 발견되었는데, 직경 5~6m 정도의 범위에서 50여 점 가량의 청동·철제품이 나왔다고 한다. 일부는 골동품상을 거쳐 당시 호암미술관[현재 삼성미술관 리움]과 김동현(金東鉉)이 소장하게 되었다. 출토 유물은 세형동검 5점, 칼자루끝장식 1점, 칼집부속구, 동모 3점, 동과 2점, 뿔모양동기 3점, 수레부속품인 일산살대투겁 2점, 호랑이모양띠고리 1점 등이 있다. 이 유물들은 인접한 평리동 청동기 유적 출토품과 비슷한 시기인 기원전 1세기경의 것으로 추정된다.

검 및 칼집 부속[국보 제137-1호]: 세형동검은 전형적인 형태로 칼자루끝장식은 물새 두 마리가 머리를 돌리고 서로 바라보는 모습을 하고 있어 북방 지역 청동기 문화와의 연관성을 보여 준다. 칼집의 부속품으로는 자루와 끝의 장신구, 칼집을 고정하던 부속구 등이 있다. 칼과 손잡이 칼끝장식이 별개로 만들어진 점을 들어 한반도 남쪽 지방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투겁창 및 꺾창[국보 제137-2호]: 투겁창[동모]은 3점이 출토되었는데, 자루의 끝에 나무를 끼우고 창끝에 달려 있는 반원형의 고리에 고정시켜 사용하도록 제작되었다. 이 중 하나는 길이 67.1㎝로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투겁창 중에서 가장 큰 편에 속한다. 길이 57.2㎝의 광형투겁창은 의기용으로 보기도 하며, 형태적으로 중국의 것을 모방한 것이나 완전히 한국화된 점이 주목된다.

[대구광역시 지정문화재(무형문화재)]

날뫼북춤[무형문화재 제2호, 1984. 7. 25. 지정]: 비산동 일대에서 전승되어 오는 북춤으로 현재 예능보유자 윤종곤이 맥을 이어 가고 있다.

천왕메기[무형문화재 제4호, 1989. 6. 15. 지정]: 비산동 일대의 주민들이 음력 1월에 지신(地神)을 진압함으로써 악귀와 잡신을 물리치고 마을의 평화와 풍년 및 가정에 다복을 비는 지신풀이를 일컫는 마을행사이다. 모시는 신(神)은 기천왕·중천왕·말천왕으로 천왕들은 천왕나무와 사당 그리고 조산(造山)에 모셔져 있으며, 사당 안에는 천왕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고 전해진다.

동부민요[무형문화재 제19호, 2016. 3. 10. 지정]: 우리나라 서남부 남도민요, 서북부 서도민요, 중부 경기민요와 구별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함경도, 강원도, 경상도 및 동해안 일대에서 전승되는 민요를 총칭한다. 보유자는 향토 소리꾼 박수관으로 백발가, 영남모노래, 상여소리, 치이야 칭칭나네, 장타령 5곡을 보유하고 있다.

[비지정문화재]

1. 선사시대

서구에서 확인된 유적 중 가장 이른 시기는 초기철기시대 분묘로 추정되는 비산동 청동기 유적과 평리동 청동기 유적이 있다. 그러나 입지와 주변 지역의 유적의 분포로 보면, 금호강대구천 일대에서 신석기~청동기시대의 유적이 확인될 가능성이 높다.

평리동 청동기 유적와룡산과 달성과 중간 지점인 서구 평리동에서 청동기 유물이 발견되면서 알려졌는데, 기원전 1세기경의 무덤에 부장된 물품으로 추정된다. 1974년 아파트 기초 공사 중 한국식 동검 3점, 동모 1점, 동과 1점, 원개형동기 1쌍, 한경 1점, 방제경 5점 등과 십자입주상의 칼자루끝장식 삿갓 모양 동기, 장고형 금구, 마면 2점, 동제 고삐 3점, 철제재갈 2점 등이 함께 출토되었다. 유물은 기원전 1세기경 대구 지역을 중심으로 한 한국계 청동기 문화의 전통이 일부 남아 있으면서 새롭게 중국 한(漢)의 청동기·철기 문화가 유입되어 가는 과정을 잘 보여 주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리고 인접한 비산동 청동기 유적에서 출토된 청동기 일괄품[국보]과 같은 시기인 기원전 1세기경으로 보인다.

2. 원삼국~통일신라시대

원삼국시대 유적은 3세기 말~4세기 초로 편년되는 나무덧널무덤 2기에서 다량의 승석문단경호가 출토된 비산동 202-1유적이 유일하다. 특히, 삼국시대에 조성된 달성고분군 내에서 나무덧널무덤이 확인됨으로써 이 일대가 원삼국시대 이래 지속적으로 분묘지로 사용되었음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삼국시대 유적은 고분군이 대표적인데, 비산동내당동 일대에는 대구에서 가장 큰 규모의 달성고분군이 위치하며, 상리동 일대에 비교적 중소형급 고분군이 분포한다. 그 외에는 달성과 관련된 채석장이 있다.

달성고분군: 달성의 남서쪽 구릉에 분포하고 있던 대구 지역 대표 고분군으로 과거 달서고분군, 비산동·내당동 고분군으로도 불렸다. 서쪽으로 5㎞가량 떨어진 와룡산에서 뻗어 내려오는 낮은 능선 중 가장 동쪽에 위치하는 가지능선에 조성되어 있고, 동쪽으로는 대구분지가 넓게 형성되어 있다. 고분군은 능선을 따라 남-북으로 길게 분포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주택지로 변하였다. 1923년 10월에 노모리 켄[野守健]과 코이즈미 아키오[小泉顯夫]에 의하여 87기의 봉토분이 확인되었고, 이 중 비산동 34호와 37호, 내당동 50·51·55·59·62호가 조사되었는데, 토기류, 무기류, 마구류 등 다량의 유물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당시 조사 결과로 1931년에 제작된 고분 배치도가 남아 있다.

이 중 일제강점기에 조사된 후 비교적 자세히 보고된 34호분과 37호분을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비산동 34호분은 1923년 발굴되었으며, 하나의 봉분 내에 대형 횡구식석실 1기와 배장곽으로 추정되는 수혈식의 소형 석곽 1기가 조영되었다. 석실의 장축은 북동-남서 방향이며, 규모는 길이 394㎝, 너비 125㎝, 높이 157㎝이다. 유물은 북쪽의 두부로 추정되는 곳에 백화수피관모·은제 조익형관식·금제 식부이식, 흉부에서는 금동제 경갑, 요부에서는 은제 과대·환두대도가 출토되었고, 족부 부근에서 수정제 곡옥을 중심으로 하는 경식이 출토되었다. 북쪽 단벽 하에서는 토기류, 남쪽 단벽 하에서는 토기류·마구류·철모·철검·철착 등의 철기가 출토되었다. 고분의 입지와 출토된 은제·금동제 장신구로 보면 최고 지배층의 무덤으로 보이며, 조영 시기는 경주 황남대총 북분과 유사한 부장품을 통하여 5세기 후엽으로 편년된다.

비산동 37호분은 1923년 발굴되었는데, 직경 19.7m 봉분 내에 선후를 보이는 2기의 횡구식석실이 나란하게 배치되어 있으며, 장축은 동서 방향이다. 선축된 남쪽 제1석실의 규모는 길이 427㎝, 너비 127㎝, 높이 156㎝로 서쪽에 횡구부가 있다. 피장자와 관련된 유물은 ‘出’자형 금동관식 2점, 금동제 태환이식 1조, 유리제 경식, 은장삼엽문환두대도, 삼루문환대도, 철부, 철제 등잔대, 행엽, 각종토기류 등이 출토되었다. 또한 중앙부의 서쪽과 동쪽으로 치우친 북장벽에 붙어 각각 금동제 소환이식 1쌍과 치아, 유리제 경식 1조와 치아가 출토되어 피장자 이외 2인이 추가장된 것으로 파악된다. 후축된 북쪽의 제2석실의 규모는 길이 380㎝, 너비 127㎝, 높이 156㎝로 횡구부는 서쪽이다. 유물은 금동제 관모와 관식, 금제 수식부이식 1조, 동지금장 소환이식 1점, 은제 심엽형대장식금구, 심염형행엽, 안금구, 등자, 철제 등잔대, 금동제 어린문(魚鱗文)식리, 은장삼엽문환두대도, 삼루문환대도, 철모, 철부, 철겸 등과 통형기대를 비롯한 각종 토기류가 출토되었다. 조영 시기는 화려한 부장품, 특히 금동관 2점으로 미루어 최고 지배계층의 무덤으로 추정되며 경주 황남대총 북분과 유사한 부장품으로 미루어 2기의 석실 모두 5세기 후엽으로 판단된다.

상리동 고분군: 와룡산에서 북동쪽으로 뻗어 내린 세 개의 가지능선상에 3개의 지군으로 나누어져 분포한다. 상리동 산87번지[고분군①], 상리동 산99번지[고분군②], 상리동 산130번지[고분군③]가 해당되며, 상리동 유물산포지와 상리동 유적도 고분군의 범위에 포함된다. 봉토분은 고분군①에서 82기가 확인되었는데, 직경 5~15m 정도인 중소형분이다. 삼국시대인 5세기부터 조성되기 시작하여 통일신라시대까지 이어진 것으로 파악된다.

달성 관련 주변 유적: 서구에 해당하지만 중구의 달성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유적이다. 달성의 서쪽 성벽에 인접한 곳인 비산동 커뮤니티센터부지와 달성토성의 공영주차장 부지에 대한 발굴 조사에서 암광유구(巖壙遺構) 1기가 각각 확인되었다. 동일한 성격의 암광유구들은 달성 성벽의 적심석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석재를 채석하던 채석장이다. 채석 후에 파인 길이 10m 이상의 대형 구덩이는 달성의 외부 방어시설[湟 또는 垓字]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바닥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5세기 대의 토기들로 달성과 달성고분군에서 확인되는 유물들과 동일한 시기의 것이어서 상호 관련 있음을 보여 준다.

통일신라시대 유적은 상리동 유적에서 통일신라시대 돌덧널무덤 1기, 석실분 1기가 조사된 것이 유일하다. 조성 시기는 돌덧널무덤에서 원권문과 점열문이 인화된 병이 출토되어 7세기경으로 보고 있다.

3. 고려시대~근대

고려~조선시대 유적은 비산동 405-1유적과 상리동 유적이 알려져 있다. 비산동 405-1유적은 달성고분군을 일부 훼손하며 조성되었는데, 고려~조선시대의 수혈 16기, 고상식 건물지 1동, 구상유구 5기, 토광묘 2기와 조선시대 토광묘 3기, 목관묘 1기, 집석유구 1기, 우물 1기 등이 조사되었다. 상리동 유적에서는 고려~조선시대 위석식 목관묘 11기, 묘역식 목관묘 5기, 암광 목관묘 14기, 집석 1기, 수혈 2기 등이 조사되었다.

조선시대 유적은 팔달교지와 대구부 사직단지가 알려져 있다. 팔달교지는 비산동 일대에서 칠곡 방향으로 금호강을 가로지르데, 조선시대 초부터 있었고, 다리의 기초가 되는 돌무더기가 있었다고 전하지만 현재는 확인되지는 않는다. 평리동 1337-1유적에서는 유구가 확인되지 않았지만 문헌, 일제강점기 지적도, 항공사진을 통하여 조선 초에 건립된 후 지속적으로 제례가 있다가 일제강점기에 들어와 없어진 대구부 사직단지를 확인한 바 있다. 그 외에는 보호수인 250년 수령의 평리동 회화나무가 있다.

근대 유적은 내당동에 남아 있는 애락교회[1928년경], 대구애락병원 식당[1930년경], 애락보건병원 병동[1923년 5월] 등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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