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영각서풍청」
메타데이터
항목 ID GC40000983
한자 鈴閣暑風淸
이칭/별칭 「금학루시(琴鶴樓詩)」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작품/문학 작품
지역 대구광역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전일주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관련 사항 시기/일시 1444년 - 「영각서풍청」 금학루 건설
저술|창작|발표 시기/일시 1444년 - 「영각서풍청」 금유 저술
배경 지역 금학루 - 대구광역시 중구 대안동 50 지도보기
성격 금학루 제영시
작가 금유

[정의]

조선 전기에 대구도호부 부사인 금유경상감영금학루에서 읊은 한시.

[개설]

「영각서풍청(鈴閣暑風淸)」대구도호부(大丘都護府)의 부사인 금유(琴柔)[1379~1444]가 경상감영(慶尙監營)의 누각인 금학루(琴鶴樓)에서 읊은 한시이다. 「금학루시(琴鶴樓詩)」라고도 불린다. 금유는 조선 전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봉화(奉化), 호는 청원정(淸遠亭)이다. 아버지는 금극해(琴克諧), 아들은 금이영(琴以詠)이다. 1396년(태조 5)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 대사간(大司諫), 대사성(大司成), 이조판서(吏曹判書) 등을 역임하였다. 조선 왕조 초기에 고령 읍치(邑治) 3리에 거주하였다. 1419년(세종 1) 강릉부사(江陵府使)에 임명되어 백성들에게 ‘순리(循吏)’라고 칭송받았다. 김종직(金宗直)[1431~1492], 조위(曺偉)[1454~1503]의 학문에 영향을 미쳤다. 주요 저서로는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가 있고, 남지(南智)와 함께 기술한 『영남지리지(嶺南地理誌)』도 있다.

[구성]

「영각서풍청」은 오언율시의 형식이다.

[내용]

위군신수권(爲郡身瘦倦)[고을 위하느라 몸은 수척하고 나른하여]

등루안활명(登樓眼豁明)[누각에 오르니 눈이 뜨이고 밝아지네]

금호신수만(琴湖新水滿)[금호강에는 새로운 물 가득하고]

영각서풍청(鈴閣暑風淸)[관아에는 여름 바람이 청신하네]

감망현가치(敢望絃歌治)[외람되게도 예악의 덕치를 바라리오마는]

휴과조수영(休誇組綏榮)[벼슬살이의 영화는 자랑하지 않으리라]

삼년무촌효(三年無寸效)[3년을 다스려도 조금의 공적이 없으니]

조필만함정(操筆謾含情)[붓 잡고 부질없이 이 마음만 읊조리네]

금학루경상감영에 있던 누각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제26권 경상도 대구도호부 편에 “금학루는 객관의 동북 모퉁이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대구도호부 부사인 금유가 짓고, 경상도관찰사인 김조(金銚)[?~1455]가 기문을 지었다고 한다.

영각(鈴閣)은 지방의 수령(守令)이 집무하는 곳을 의미하기 때문에, 고을 관아로 해석할 수 있다. 동일한 뜻을 가진 어휘로는 영당(鈴堂), 영재(鈴齋), 영헌(鈴軒) 등이 있다.

현가치(絃歌治)는 예악(禮樂)으로 백성을 교화시킨 중국 춘추시대 노(魯)나라의 유학자 자유(子游)[B.C. 506~B.C. 445]의 다스림을 의미한다. 자유는 공자(孔子)[B.C. 551~B.C. 479]의 제자이다. 성은 언(言)이고 이름은 언(偃)이다. ‘자유’는 자(字)이다. 노나라에서 벼슬하여 무성(武城)의 수령이 되었는데, 예악으로 백성을 교화시켜 공자의 칭찬을 받았다.

[특징]

「영각서풍청」을 통하여 금학루에 올랐을 당시의 풍경을 그릴 수 있다. 대구 분지를 구성하는 넓은 들과 금호강이 멀리 한눈에 보이고, 청풍명월을 느끼며 서정적 감흥에 젖을 만한 분위기이다.

[의의와 평가]

「영각서풍청」은 시기적으로 조선 초기에 대구의 누정을 읊은 한시이며, 경상감영에 있었던 금학루의 존재를 나타내었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