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30128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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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楊州 市民- |
분야 | 문화·교육/문화·예술 |
유형 | 작품/음악·공연 작품 및 영상물 |
지역 | 경기도 양주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위상배 |
[정의]
경기도 양주시에서 시민의 단합을 목적으로 만든 합창 가요.
[개설]
「양주 시민의 노래」는 1980년 말 제정에 착수하여 1981년 초에 완성되었다. 이 시기는 구리읍, 미금읍, 진접면 등 8개 읍면이 남양주군으로 분리[1980. 4. 1]되고 동두천시의 분리[1981. 7. 1]가 추진되던 때였다. 양주가 분리되기 이전에는 남양주, 동두천이 양주의 관할 구역이었기 때문에 “북으로 소요산 남에는 한강, 아름답게 펼쳐 놓은 2읍 14면, 삼각산 바라보며 터전 잡으니, 서울을 호위하는 내 고장일세”[전문]를 가사로 했던 「양주의 노래」가 있었다.
1980년 8월 1일 부임한 백종민 군수는 잇따른 행정 구역 축소로 침체된 지역 분위기를 쇄신하고 군민의 의지를 하나로 모으려는 취지에서 군민의 노래를 새로이 만들기 위해, 같은 해 11월 당시 공보실장이었던 이영선에게 군민의 노래를 만들기 위한 실무 작업을 지시하였다. 이에 따라 당시 공보계장 홍영섭은 서울 종로에 있던 건전가요보급회 회장이자 작곡가였던 전석환을 찾아가 곡을 의뢰하였다. 전석환은 작사를 위해 시인 박화목(朴和穆)을 소개해 주었으며, 박화목은 양주군에 관한 설명과 자료를 요청하였고 양주군의 연혁과 천보산, 감악산, 양주산성, 회암사 등 관련 자료를 제공받았다.
1980년 말 남양주는 이미 분리된 상태고 동두천시도 분리 예정에 있기 때문에, 소요산과 한강, 삼각산 등의 지명은 사용하지 않기로 하였으며 대신 천보산, 감악산, 양주별산대놀이 등의 소재와 1980년대 초 대법원장을 역임했던 이영섭(李英燮)과 독립운동가인 조소앙(趙素昻)이 남면에서 출생한 점 등을 들어 “…… 감악산 정기 받은 인물의 고장……” 이라는 가사가 만들어졌다.
이렇게 만들어진 노래가 수록된 녹음테이프를 작곡가 전석환이 양주군을 방문하여 군수에게 전달하였고, 군수는 각계 인사들과 수차례 들어본 결과 반응이 좋다는 결론을 내리고 「양주 군민의 노래」로 결정하게 되었다.
[공연 상황]
「양주 군민의 노래」는 동두천시가 완전히 분리된 1981년 7월 이후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하여 그 이듬해인 1982년에는 각 학교에서 「양주 군민의 노래」 부르기 대회 개최 등을 통해 대중화에 힘썼다. 2003년 10월 9일 양주군이 양주시로 승격됨에 따라 「양주 군민의 노래」는 「양주 시민의 노래」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현재는 시 주관 행사와 양주시립교향악단, 양주시립합창단 등의 공연에서 의례적으로 불리고 있다.
[구성]
「양주 시민의 노래」는 유서 깊은 양주 지역의 전통과 문화를 가사에 담았고, 곡조는 영원히 발전하라는 의미의 힘찬 행진곡 풍이다. 의미를 생각하며 1절과 2절을 부르다 보면 양주의 역사와 현재의 역동적인 모습과 애향심이 절로 느껴진다.
[내용]
가사는 양주시를 상징하는 천보산, 회암사, 양주산성 등을 넣어 이들이 어우러지는 양주별산대놀이의 고장임을 강조하고 있다. 나아가 도농 복합 도시의 이미지로서 인심 좋고 살기 좋은 복지 도시임을 가사로 표현하고 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천보산 푸른 숲이 우거진 곳에 맑은 여울 쉼 없이 흘러내리네/ 회암사 터를 찾는 유람의 발길 시민 모두의 자랑이로다/ 옛 조상의 얼들이 여기 살아 숨 쉬고 민족의 문화가 깃들인 고장/ 인심 좋고 살기 좋은 복지 양주시// 감악산 정기 받은 인물의 고장 양주별산대 놀이 이어온 고장/ 오백년 역사 담긴 우리 양주시 저 멀리 양주산성 호국의 표상/ 옛 조상의 얼들이 여기 살아 숨 쉬고 민족의 문화가 깃들인 고장/ 인심 좋고 살기 좋은 복지 양주시
[의의와 평가]
「양주 시민의 노래」는 양주시가 남양주시와 동두천시 등으로 분리되던 시기에 지역 분위기를 새롭게 하고 애향심을 고취시키기 위해 제작되어 지역민의 단합과 자긍심을 높이는 데 기여하였다. 가사는 전체적으로 양주시의 산하, 역사, 인물 등 가능한 범위 내에서 포괄하여 힘차고 뜻을 생각하며 부를 수 있도록 구성되었으나, 특정 산악 이름을 강조하다 보니 지역적으로 범위를 좁혔다는 지적도 있었다.